[re] 제 26회, 안사연 정기산행(하남)-미리보기-성경온 묘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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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12-10 18:50 조회1,292회 댓글0건본문
성경온(成景溫) : 1461년(세조 7) ∼ 1504년(연산군 10)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아(士雅)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성준(成俊)이며, 어머니는 참의 이계기(李啓基)의 딸이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여러 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다가 1498년(연산군 4) 빙고별제(氷庫別提)에 제수되었고, 이어 사헌부감찰·호조좌랑·의금부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503년(연산군 9) 별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공조정랑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버지 성준이 윤씨의 폐위를 찬성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갑자사화 때 직산에 유배되어 교살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형 성중온(成仲溫)과 함께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가 해도(海島)로 이배(移配)되었으며, 연산군이 아버지를 용서해주지 않고 대죄를 그에게 씌우려고 하자 자살하였는데, 그의 나이 44세였다. 이에 중종은 그의 무고함을 불쌍히 여겨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하였다. 기개와 도량이 크고 넓었으며, 행동이 엄하여 국사를 할 때에도 정도를 굽히지 않았다. 그의 묘는 하남시 감북동에 있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國朝人物考』 ; 『成景溫墓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 치 : 하남시 감북동
연 대 : 조선전기
크 기 : 전체높이 210㎝, 비신 123㎝, 폭 55㎝, 두께 17㎝
찬서전 : 신용개 찬, 김희수 서
<原文>
贈弘文館副提學行工曺正郞昌寧成公景溫之墓碣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申用漑撰 金希壽書
君姓成諱景溫字士雅知中樞府事揜之曾孫刑曺參判順祖之孫父俊議政府領議政外祖李啓基工曺參議內外名閥遠有訓誨自幼深沉有度長而學不倦中癸卯司馬試其後累擧不中時論稱屈議政欲官之君誓志力辭雖布褐終身不願由他侄進歲戊午授氷庫別坐非其志累歷司憲府監察戶曺佐郎歲辛酉丁外憂廬墓三年服闋拜翊衛司翊贊陞右司禦癸亥秋擢文科別試拜工曹正郞先是議政上十條言甚忉大怍燕山旨甲子夏酷被凶禍君與兄仲溫俱連坐流遠方又移配海外燕山怒議政未解不欲留其子姓幷置大罪君聞有命色不少變笑謂其子覽曰余性命豈可辱人手卽仰藥而逝人服其氣量至有流涕者時丙寅六月二十四日君年四十有四也是年十一月葬于廣州治西井林山麓聖上哀愍無辜贈官弘文館副提學爲人氣宇宏遠風儀峻嚴居官莅事持正不撓性又淸潔方直而和氣常盎然不事産業不喜紛華以閑靜自適議政暮年病不能朝國有大事燕山遣近侍就問議政必咨君爲可否多合與論君常侍議政若見有毫髮之失必和顔徵諫不改不止議政甚敬重之君娶宗室明川都正長孫之女李氏生一男三女男卽覽娶師傅洪達汀女生四女女長適進士具元之生三男一女次適完川副正禧生二男次適幼學柳仁瞻早死無后李氏廬于塋側奠朝夕必躬日暮號痛朝廷嘉其節就旌其閭進士以李氏意來扣用漑曰哀慕死者無以爲欲銘其行治于墓道以昭諸後嗣得立史翰者一言令死者不朽幸肯哀李氏之請使婦翁名永長存則死者有知將不悼其不幸於泉下矣用漑與士雅氏旣同庚又同司馬試相知甚悉旣哀傷士雅氏之一家常慘 于懷而李氏之節行高一世進士之來叙辭懇而實其銘安敢辭銘曰
質粹美天所厚命厄蹇天何負吉與凶葬難期惟此心在不欺宅于玆深且固神庶安永無懼
<번역문>
홍문관부제학 행공조정랑 창녕 성공 경온의 묘갈에 증(贈)하다.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 신용개가 찬하고 김희수가 썼다.
군의 성은 성(成), 이름은 경온, 자는 사아이다. 지중추부사 성엄의 증손이며, 형조참판 성순조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성준으로 의정부 영의정이었고 외할아버지 이계기는 공조참의이니, 안팎(친가와 외가)으로 이름난 가문(名閥)이다.
오래 전부터 가르침이 있었으므로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도량이 있었으며, 자라서는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계묘년(1483년, 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그후 여러 차례 과거(大科)에 급제하지 못했다. 여론이 뜻을 굽힐 것을 말하고 군의 아버님께서 벼슬을 시키려고 하였으나, 군이 맹세하며 힘써 사양하여 비록 벼슬을 하지 않은채 일생을 마칠지라도 남의 힘으로 어리석게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무오년(1498년, 연산군 4)에 빙고별좌를 주었으나 군의 뜻이 아니었고, 이어 사헌부감찰과 호조좌랑을 거쳤다. 신유년(1501년, 연산군 7)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했다. 상복을 벗고는 익위사익찬을 벼슬받았고, 우사어로 승진하였다. 계해년(1503) 가을에 문과별시에 뽑혀서 공조정랑에 임용되었다.
이보다 앞서 군의 아버님이 열 개 조항의 상소(十條疏)를 올렸는데, 말씀이 매우 근심스러워 연산군을 크게 부끄럽게 여기게 하였던 것이다. 갑자년(1504년, 연산군 10) 여름 혹독하게 화를 당하니 군과 형 성중온이 함께 연좌되어 멀리 유배되었다가 다시 섬으로 옮겼다. 연산이 군의 아버님에 대한 화가 풀리지 않아 그 자손을 남기지 않으려고 큰죄를 주려 하자, 군은 이를 듣고 얼굴빛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웃으면서 아들 성람에게 이르기를, “내 목숨을 어찌 남의 손에 욕을 보겠는가” 하고 이내 약을 마셔 생을 마치니 사람들이 그의 기량(氣量)에 탄복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이때가 병인년(1506년, 연산군 12) 6월 24일로, 군의 나이 44세였다. 이해 11月 광주 주치소(州治所) 서쪽 정림산 기슭에 장사지냈다. 성상(중종)께서 죄없이 죽은 것을 불쌍히 여겨 홍문관부제학을 추층하였다.
군의 사람됨은 기개와 도량이 크고 넓었으며 행동이 매우 엄하여 관에 나가 일할 때에도 정도를 지켜 굽히지 않았다. 또 성품은 깨끗하였고 곧았으나, 온화한 마음씨가 넘쳐 흘렀다. 산업을 일삼지 않았으며,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아 한가롭고 조용하게 여유있게 생활하였다. 군의 아버님이 만년에 병으로 조정에 나가지 못하자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연산이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군의 아버님에게 물었는데, 군의 아버님은 반드시 군에게 물어 가부(可否)를 결정했는데, 여론과 많이 부합되었다. 군이 항상 아버님을 곁에서 모셨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반드시 온화한 얼굴로 조용히 간(諫)하여 고칠 때까지 그치지 않았으므로 군의 아버님이 군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군은 종실 명천도정 이장손의 따님 이씨와 혼인하여 1남3녀를 두었다. 아들 성람은 사부 홍달정의 따님을 맞아 4녀를 두었고, 맏딸은 진사 구원지에게 시집가 3남1녀를 두었고, 둘째딸은 완주부정 이희에게 시집가 2남을 두었으며, 막내딸은 유학 유인첨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어 후손이 없다.
이씨가 묘소곁에서 여막살이를 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술잔을 올렸는데 반드시 직접 하였고, 밤낮으로 통곡하였다. 조정에서도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정문(旌門)을 내렸다. 진사(구원지)가 이부인의 뜻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이르기를 “돌아가신 분을 애모(哀慕)하는데 욕심은 없지만 그 공적을 비석에 새겨서 여러 후손에게 밝히고자 합니다. (이에) 사한자(史翰者)의 한마디를 얻어 돌아가신 분을 썩지 않고자 하니, 다행히 이씨의 청을 슬피 여겨 장인의 이름을 길이 전할 수 있게 한다면 돌아가신 분도 알고 저승에서 그 불행을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나와 사아씨는 같은 나이고, 또 사마시도 같이 하여 서로 깊이 알고 있어서 이미 사아씨 일가를 슬퍼하고 아파하여 늘 마음으로 슬퍼하였는데, 이부인의 절행 또한 세상에 높고 진사가 가져온 글이 간절하고 진실하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이에 명하기를,
바탕이 순수하고 이름다우니 하늘이 두터이 하였지만,
명운이 액건(厄蹇)하니 하늘이 어찌 저버리는가.
길장(吉葬)과 흉장(凶葬)은 약속하기 어렵지만
오직 이 마음은 속이지 않음에 있다.
유택이 더욱 깊고 또 견고하니
공이여 바라건대 두려움 없이 영원히 평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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