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제 26회, 안사연 정기산행(하남) -미리보기 - 운산군 신도비
페이지 정보
김발용 작성일05-12-10 18:55 조회1,393회 댓글0건본문
운산군(雲山君) : 1453년(단종 1) ∼ 1510년(중종 5)
조선전기의 종실로 아버지는 세종의 12자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이다. 이름은 계(誡), 자는 신옹(愼翁)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세조의 귀여움을 받았다. 12세에 정의대부(正義大夫)를 제수받고, 세조가 직접 사서(史書)와 경서(經書)를 가르쳤다. 그뒤 그는 밀지를 잘 받들어 정2품 승헌대부(承憲大夫)에 올랐으며, 1468년(예종 즉위) 10월에 운산군(雲山君)에 봉해졌다. 성종이 즉위한 후, 1472년(성종 3) 정월 종묘에 부제할 때 헌관인 그에게 안구마(鞍具馬) 1필을 하사하고, 1484년(성종 15) 4월 소덕대부(昭德大夫) 운산군(雲山君)으로 봉하였다.
이듬해 4월 다시 흥록대부 운산군(雲山君)으로 삼았고, 흥록상전 종부시(興祿常典宗簿寺)의 도제조(都提調)에 이르렀다. 일을 시행하는데 너그럽고 가혹하지 않아, 종실들이 공경하여 감히 잘못을 저지르지 못했다고 한다. 또 문소전(文昭殿)과 사옹원(司饔院)의 일을 주관할 때에도 어긋남이 없어 보는 이들이 뛰어나다고 하였다 한다.
1493년(성종 24) 3월 종친의 병을 살피는 것에 대한 불만스러운 점을 상소하였다. 그는 “신 등이 만약 병들었다고 보고하면 종부시에서 살펴보고도 믿지 못해 또다시 가까운 이웃에게 물어봅니다. 그러나 동반(東班)의 조사(朝士)들은 비록 참봉(參奉)만 되어도 병들었다고 보고하면 다시 묻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종친에게는 이와 같으니, 이는 전하께서 종친을 가까이 하시는 뜻에 어긋납니다”고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죄에 연루되었으나, 지위가 높고 오랫동안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를 지냈다 하여 죄를 모면하였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왕은 그를 가장 높은 직품인 현록대부(顯祿大夫)를 내렸다. 한편, 대신들이 연산군을 내쫓고 중종을 추대할 때 이를 도와 그 공으로 그는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509년(중종 4) 6월 종친부·종부시·사옹원의 제조가 되었으나, 대간은 그가 의롭지 않은 일을 많이 행하였기 때문에 제조가 되기에 알맞지 않은 사람이라 반대했다. 왕은 “운산군이 의롭지 못한 일을 하였는 지는 모르겠으나, 종부시의 유사는 의례로 지위 높은 종실을 임명하는 것이니 또한 교대할 수 없다”면서 거부하였다. 그러나 대간과 대신들의 계속되는 비판을 견디지 못해 벼슬을 그만 두고 조회만 받들었다. 그후 매번 대궐에 나가 문안례를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소일하였다.
1510년(중종 5) 12월 17일에 죽었고, 1511년(중종 6) 3월 초10일에 광주 서쪽 대덕들(大德原 : 현재의 하남시 초이동)에 장사지내고 공소(恭昭)의 시호를 내렸다. 첫째 부인은 주부 곽득륜(郭得倫)의 딸로 딸 하나를 낳고 죽었고, 재취 정씨는 김제군수 정자숙(鄭自淑)의 딸로 1460년(세조 6)에 태어나 시집왔는데 운산군을 장사지내고 4개월만에 병으로 죽으니, 이해 8월 19일 운산군의 묘에 합장하였다. 운산군과 정씨 사이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은 이갱(李戡)으로 철성군(鐵城君)이고, 둘째 아들은 이강(李鋼)으로 고성군(固城君)이며, 셋째 아들은 이전(李銓)으로 광성부정(匡城副正)이다. 딸이 3명 있었는데, 큰딸은 곽씨 소생으로 파천군(坡川君) 윤탕노(尹湯老)에게, 둘째 딸은 참봉 조신충(趙信忠)에게, 셋째 딸은 유학 송세영(宋世英)에게 시집갔다. 1518년(중종 13) 4월 28일 남곤(南袞)이 찬한 신도비가 초이동에 있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雲山君神道碑』
운산군 신도비(雲山君神道碑)
위 치 : 하남시 초이동 산4번지
연 대 : 중종 13년(1518)
크 기 : 전체 높이 295cm, 비신 165cm, 폭 82cm, 두께 23cm
찬 서 전 : 남곤 찬, 김희수 서, 이언호 전
<原文>
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顯祿大夫雲山君 謚諡恭昭公碑銘
崇政大夫行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經筵春秋館事南袞撰
嘉善大夫全羅道觀察使兼兵馬節度使李彦浩篆
奉正大夫守宗簿寺正兼承文院參校金希壽書
古之所謂貴戚之卿者當平世則隱然有維城之固不幸而遇艱危則翊衛王室有弘濟之美若雲山公者可謂近之依謹按璿源譜牒我 世宗第十二子曰密城君諱琛寔聘驪興閔氏景泰癸酉生公諱誡字愼翁幼聰秀俊爽大爲 世祖眷憐年十二特授正義大夫封雲山君命侍左右親授經史時承密旨傳宣于外敷奏詳允 上益重之進階承憲及成宗卽位尤加禮異累增級至興祿常典宗簿寺都提調卽古之大宗正也公莊以磊職寬以不苛宗室敬憚莫敢爲非又管文昭殿司饔院事易于之際儀度閑整卒事無差觀者偉之燕山雖荒亂亦知敬公特階顯祿恕于極品時諶五日甚國步踰危公以宗姓元老義同休戚居常北北不自得但日飮無何而已而會大臣協策推戴聖明知公可屬大事遂以謨告之公曰此天命也乃馳詣潛邸贊決大計卽日奉衛 乘與卽位于景福宮策功 賜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之號旣而干就故常口不言國家事奉朝請惟勤每詣闕起居禮訖便還居第幅巾一室蕭然而已由是朝廷益知其賢正德庚午十二月十七日供微恙卒于正寢明年三月初十日卜宅于廣州治西大德原矜耶之公先娶主簿郭得倫之女爲配生一女早逝繼室以鄭氏金提郡守自淑之女天順庚辰生封烏川郡夫人兵曹判書淵之孫以門德歸于公璟儀之備一門則之旣葬公第四月病疾逝而歿享年五十二是年八月十九日卽公眺塋而耶公事親色養處兄弟無間言其居內外喪廬于墓側朝輔之奠躬自供具喪畢遇俗節則必詣墓展省終身不小廢生長紈綺而能刮盡豪奢習惟以書史自娛暇則蒔花藝草以觀天機發生之妙 上自在潛邸雅尊敬之事有疑難或 親臨問至是病革 命賜御藥及訃聞輟朝二日賻賜有加太常謚以恭昭哀榮終始世所罕此有男三人長曰戡鐵城君次曰鋼固城君次曰銓匡城副正女三人長適坡川君尹湯老卽郭出也次適參奉趙信忠次適幼學宋世英鐵城娶僉正柳仁濡女生一男曰濠平陵守女適洪怜疇固城娶直長閔賻女生二男二女女適申匡國匡城娶判官金由岳女生二男一女幼坡川生一男曰珍女適李昌仁參奉生三男三女皆幼幼學妻先公逝戊寅夏戡等將立石以狀來曰垂諸遠必得詞之無華者袞不敢辭乃作銘曰顯允密城世宗之穆振振雲山寔似寔續遇賞光廟年尙垂蝨爵命驟加飾之金貂惟賢待以異數歷事累朝 王曰伯父恩以日隆公一股弩扶危定傾不動聲色中興功成身退以默相在其室左圖右書物無我累方寸淡如朱虛平難東平爲善兼之一身今古所鮮名擅宗英勳歸麟閣一疾奄爾年五十八契龜卜兆原曰大德誰與附之厥有賢匹爰伐貞石勒之銘詞深谷可堙高陵可夷恭昭之聲與國同垂
正德十三年戊寅四月二十八日立碑
<번역문>
병충분의 익운 정국공신 현록대부 운산군 익시공소공비명
숭정대부행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춘추관사 남곤(南袞)이 글을 짓고
가선대부 전라도관찰사 겸 병마절도사 이언호(李彦浩)는 전액을 쓰고
봉정대부 수종부시정 겸 승문원 참교 김희수(金希壽)는 글을 쓰다.
예전의 이른바 귀척(貴戚)의 경(卿)이란 평온한 세상을 만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왕족〔維城〕의 꿋꿋함이 있고, 불행하게도 어려움과 위태로움을 만나면 왕실을 보좌하고 호위해서 널리 구제하는 아름다움이 있었으니, 운산공이야말로 이에 가깝다고 할 만하다. 삼가 『선원보첩(璿源譜牒)』註 1103)을 살펴 보건대 우리 세종대왕 열 두 번째 아드님이 밀성군 침(琛)이다. 이 분이 여흥 민씨에게 장가들어 경태 계유년(1453년, 단종 1)에 공을 낳았으니, 이름은 계(誡), 자는 신옹(愼翁)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수려하며 준수하고 건장하였다.
세조께서 귀여워하셔서 12세에 특별히 정의대부(正義大夫)를 제수하고 운산군으로 봉하였다. 좌우에서 모시기를 명하고 친히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주셨다. 때때로 밀지(密旨)를 받들어 밖에 전하고 아뢰는 것이 자세하고 마땅하니 세조 임금께서 더욱 소중히 여겨서 품계를 승헌대부(承憲大夫)註 1104)로 올렸다. 성종께서 즉위하시자 더욱 예를 남달리 하여 여러 차례 품계를 더해서 흥록상전(興祿常典) 종부시(宗簿寺)의 도제조(都提調)에 이르렀으니, 곧 예전의 대종정(大宗正)이다.
공은 엄정하게 직무를 수행하였으나, 너그럽고 가혹하지 않았으므로 종실들이 공경하고 어려워해서 감히 잘못을 저지르지 못했다. 또한 문소전(文昭殿)과 사옹원(司饔院)의 일을 주관할 때 의표와 도량이 한가롭고 가지런해서 일을 마칠 때 어긋남이 없었으니 보는 자들이 뛰어나다고 하였다. 연산군이 비록 주색에 빠져 정치를 어지럽혔으나, 역시 공을 공경할 줄 알아서 특별히 현록대부(顯祿大夫)를 제수함으로써 가장 높은 품계에 올려 놓았다. 이때 (연산군이) 과음하고 주정이 날로 심해져서 나라의 운명이 매우 위태로웠다. 공이 종실의 원로로서 의리상 기쁨과 슬픔을 같이해야겠기에 평소 근심으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여 날마다 술만 마실 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마침내 대신들이 계책을 합쳐서 중종 임금(聖明)을 추대할 때 공에게 큰 일을 맡길만 하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계책을 여쭈었다. 공이 “이것은 천명(天命)이다”하고는 곧바로 잠저로 달려가 큰 계획을 도와서 결정하고, 그 날로 승여(乘輿)를 받들어 호위하였다. (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자 공신에 책봉되었는데,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공신을) 수여받고는 곧 일상으로 돌아가 입으로 국가의 일을 말하지 않고 조회 받들기만 오직 힘써 하였으며, 매번 대궐에 나가 문안례를 마치면 바로 사는 집으로 돌아와서 폭건(幅巾)을 쓰고 집에서 조용히 지낼 따름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서 더욱 그의 어진 것을 알았다. 정덕 경오년(1510년, 중종 5) 12월 17일에 가벼운 병환을 만나 정침(正寢=正殿)에서 돌아가셨다. 다음해 3월 초10일 광주 서쪽 대덕원에 산소자리를 잡아 장사지냈다.
공이 먼저 주부 곽득륜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딸 한 명을 낳고서 일찍 세상을 떴다. 두 번째 부인 정씨는 김제군수 자숙의 딸로써 천순 경진년(1460)에 태어났고 오천군 부인에 봉해졌다. 병조판서 연의 손녀로 가문의 덕행을 지니고 공에게 시집와 안방 의절을 갖추었는데, 한 집안의 법으로 삼았다.
이미 공을 장사지내고 넉 달만에 병환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52세였다. 이 해 8월 19일에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공이 어버이를 섬길 적에 얼굴빛을 살펴 봉양하였으며 형제를 대할 적에 이간시키는 말이 없었다. 부모의 상〔內外喪〕을 당해서는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아침 저녁에 스스로 제구를 갖추어 몸소 전을 드렸다. 상을 마치고 속절(俗節)을 만나면 반드시 묘에 나가 성묘하였는데, 죽을 때까지 조금도 폐하지 않았다. 부귀한 집안에서 낳고 자랐음에도 능히 호활하고 사치한 습관을 씻어버리고, 오직 글씨와 사서(史書)로써 스스로 즐겼으며, 여가가 있으면 꽃을 심고 풀을 길러서 천기(天機) 발생의 오묘함을 관상하였다. 임금(중종)께서 왕위에 오르기 전〔潛邸〕부터 존경하여 의심나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혹 직접 찾아가서 묻기도 하더니, 이에 이르러 병이 위독하자 어약을 하사하라고 명령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이틀 동안 조회를 거두고 부의를 하사하면서 태상(太常)을 더하였다. 공소(恭昭)를 시호로 하였으니, 슬픔과 영화로움이 시종 한결같아 세상에서 비유할 바가 드물다.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갱(戡)으로 철성군(鐵城君)이고, 둘째 아들은 강(鋼)인데 고성군(固城君)이며, 셋째 아들은 전(銓)인데 광성부정(匡城副正)이다. 세 딸이 있는데 큰딸은 파천군(坡川君) 윤탕노(尹湯老)에게 시집갔으니 곧 곽씨 소생이다. 다음은 참봉 조신충(趙信忠)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유학 송세영(宋世英)에게 시집갔다. 철성군은 첨정 유인유(柳仁濡)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한 명을 낳았는데 (이름은) 호(濠)로 평능수(平陵守)이고, 딸은 홍서주(洪怜疇)에게 시집갔다.
고성군이 직장(直長) 민은(閔賻)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딸은 신광국(申匡國)에게 시집갔다. 광성부정은 판관(判官) 김유악(金由岳)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파천군(윤탕노)이 아들 한 명을 낳았으니 진(珍)이며, 딸은 이창인(李昌仁)에게 시집갔고 참봉(조신충)이 3남 3녀를 낳으니 모두 어리다. 유학(송세영)의 처는 공보다 먼저 죽었다.
무인년 여름에 갱(戡) 등이 장차 비를 세우려고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먼데까지 전할려면 반드시 글의 화려함이 없는 것을 얻어야 합니다”라고 하기에 내(남곤)가 감히 사양을 못하고 이에 명을 지어 말하기를,
현달하고 믿음직한 밀성군은 세종대왕의 아드님이다. 인자하고 후덕한 운산군은 밀성군을 닮았고 세조대왕에게 총애를 받아서 나이 아직 어릴 적에 작(爵)과 명(命)을 급히 더해서 금관자로 장식하였다.
생각하니 현명하여서 남다른 운수로 대우하고 여러 임금을 두루 섬겼다.
왕은 백부라고 말하며 은혜가 날로 융성했다. 공이 한번 구부리고 굽혀서 위태로움을 붙들고 기울어진 것을 정함에 말과 안색을 변하지 않고 중흥의 공을 이루었다. 몸이 물러가 침묵으로 그 집에 있었는데, 봄에 왼쪽은 그림이요 바른쪽은 글씨이며 물건은 나를 더럽히지 않고 방촌(方寸 - 마음)이 담담했으며 주허(朱虛)는 난리를 평정했으며 동평(東平)은 착한 일을 하였는데 한몸에 겸한 것이 예전이나 지금도 적은 바이다. 이름을 종실에 떨치고 훈업은 기린각에 돌아갔다. 병으로 돌아가니 나이 58세이다.
부부를 합장하였는데, 그곳을 대덕원(大德原)이라 한다. 누구로 더불어 하폄할꼬. 그 어진 배필이 있다. 이에 돌을 다듬어서 명을 새기니 깊은 골짜기는 가히 막혀질 것이고 높은 언덕은 가히 편편할 것이다. 공소공의 명성은 나라와 함께 전할 것이다.
정덕 13년(1518) 무인 4월 28일에 비를 세우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