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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발굴의 감동이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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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4-11 21:52 조회1,5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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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발굴의 감동이 아직도...





우리 홈페이지 게시판을 열어본 순간,



"김뉴 교첩1, 교첩2..., 김시양 친필, 국사편찬위원회에 엄청난 보물이..."







눈이 번쩍 뜨이고, 덩달아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 들었습니다. 바로 이런 감동이 우리 안.사.연.이 함께 하는 맛이고 소중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은회 종친님, 항용 종친님, 너무도 큰 발굴을 하셔서 감격과 감동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오늘은 정말 행복한 날입니다. 앞으로도 1주일에 한번 정도는, 하니 한달에 한번 정도는 이런 행복한 날이 계속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한가지 검토해야 할 사항은



우리 선안동김씨 안정공파이신 金紐 선조는 1420년에 나시고, 1490년에 이조참판을 지내시고, 沒年은 미상입니다.



또다른 金紐라는 분이 있는데 1527년生 1580년沒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은회종친께서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대발굴하신 자료중



1. 金紐文科及第敎旨부터

2. 金紐敎牒(1) - 8. 金紐敎牒(7)

9. 金紐差定帖 는



제작년도가 1568-1580년 사이이므로 또다른 金紐(1527-1580)라는 분과 관련된 것인 듯하고







10. 書簡帖 은



제작년도가 1470년이므로 우리 선안동김씨 안정공파 金紐(1420생-1490이조판서-?몰) 선조의 작품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慶北 高靈郡 雙洞面 合伽洞 金泰鎭 이라는 분이 위의 10가지를 모두 소장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한 분에 해당하는 자료로 볼 수 있는데



1. 서기로 연도 환산을 잘못하였을 수도 있고

2. 안정공 金紐 후손 중에 이름이 같은 金紐라는 분이 있을 수 있고,







어쨌든 10. 書簡帖에 실린 書簡 6점은 金紐 선조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항용 종친님께서 발굴하신 하담 김시양 선조 친필 1점, 정말 대단한 발굴을 하셨습니다.











▣ 국사편찬위윈회 홈페이지



검색어 : 김뉴

총검색건수 : 19 건(1 - 10)



1. 金紐文科及第敎旨

2. 金紐敎牒(1)

3. 金紐敎牒(2)

4. 金紐敎牒(3)

5. 金紐敎牒(4)

6. 金紐敎牒(5)

7. 金紐敎牒(6)

8. 金紐敎牒(7)

9. 金紐差定帖



10. 書簡帖







書簡帖

s0649-01 s0649-02 s0649-03 s0649-04 s0649-05 s0649-06



古文書 私人文書 書簡

사자 0649

(발급) 金紐 (수급) 鄭訓導

成化 庚寅 10月 등 (1470)

6(12), 한문, 첩:39.0×22.0cm

촬영:1930. 1. 22.

소장:慶北 高靈郡 雙洞面 合伽洞 金泰鎭





서간 4건

(戊子 10月 母 朴氏가 아들 校理에게 보내는 것,

家人曹氏가 家翁 앞으로 보내는 것,

成化 庚寅 10月 아우에게 보내는 것,

庚辰 7月 紐가 鄭訓導 앞으로 보내는 것 등의 4건) 및



집안의 忌日 기록 1건,



집안 내의 각서 1건(父 前參奉 金과 長子 綸의 수결이 있다).











▣ 야후대백과사전



김뉴 金紐 [142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 안동

호 : 금헌 ·취헌 ·쌍계재 ·관후암 ·상락거사





본관 안동. 자 자고(子固). 호 금헌(琴軒) ·취헌(翠軒) ·쌍계재(雙溪齋) ·관후암(觀後庵) ·상락거사(上洛居士). 중엄(仲淹)의 아들.



1464년(세조 10) 녹사(錄事)로서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가 되고, 이듬해 호조좌랑으로 《경국대전》 편찬작업을 위해 〈이전(吏典)〉을 수교하였다.



1466년 발영시(拔英試) ·등준시(登俊試)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안효례(安孝禮) 등과 함께 도성(都城)을 측량, 지도를 작성하였다.



또 예문관직제학으로 《세조실록》 《예종실록》 편찬에 이바지하였고, 1470년(성종 1) 완성단계의 《경국대전》을 재수교하였다.



1472년 동부승지를 거쳐 공조참판 ·충청도관찰사 ·중추부동지사 등을 역임한 뒤, 1478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군비확장을 위해 전라도 순천(順天)지방에 석보(石堡)를 쌓고 함경도 등에 식량을 저축할 것을 건의하여 실현되었다.



1481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곧 파직되어, 1484년 정5품 군직인 행사직(行司直)이 되는 수모를 겪었으며, 1490년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



글을 잘 짓고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으며 거문고도 잘 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렸고, 그림 또한 잘 그렸다. 글씨로는 《해동명적(海東名蹟)》 《초로관주(草露貫珠)》 등에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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