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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댁, 고모댁 (17) 양간공(김승택)사위 풍천임씨 任景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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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2-21 10:37 조회2,2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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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간공(김승택)께서는 이남(1김묘-상락군,2.김면(김사고)삼녀(1.풍천임씨 임경유, 2광산김씨 김광재, 3유지정)를 두시었습니다.

큰아드님은 상락군 김묘- 상락군의 아드님이 문온공 김구용, 내서사인공 김제안, 안정공 김구덕이십니다.

작은아드님은  안렴사공(김면, 이전에는 낭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척약재집에 기록되기를 숙부(김면)을 안럄렴사로 칭한 기록이 많아

안렴사공으로 칭함이 옳을 듯 싶습니다.)은 일명 師古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분의 아드님이 九鼎-도평의공파 파조이십니다.

 

큰사위 任景儒는 풍천임씨로서 

우리족보에의하면

풍천인 좨주 父서하부원군子松, 子任君輔밀직부사 풍천군, 任毅 밀직

 

 

풍천임씨 족보에 의하면

任景儒

官中顯大夫成均祭酒, 室안동김씨도첨의정승영창군양간공승택女전법판서선孫女판전리사사상락군개국공충렬공방경증손

판삼사사계림부원군충선공계림김혼외손

 

임경유의 아들이 풍산군 任君輔 배위 여산송씨,  

풍산군(임군보)의 아들은 병마사 증병판 任巨卿 배위 고성박씨,

병판(임거경)의 아들이任肩(증좌의정 서하부원군)-

임견의 아들이 좌찬성 任元濬이다.

암원준의 아들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주역인 任士洪이다

임사홍은 효령대군의 손녀사위가 되고

그의 아들 광재(光載)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顯肅公主)의 남편으로 풍천위(豊川尉)가 되고,

숭재(崇載)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徽淑翁主)의 남편으로 풍원위(豊原尉)가 되어

왕실과 두터운 인척관계를 맺어 권력의 중심부에서

정쟁을 중심인물이 되었다.

임자송(任子松)
생몰년 미상.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어사 주(澍)의 아들이다.
1319년(충숙왕 6)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가 죽자 원윤으로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상을 고하였다.
1321년 이의풍(李宜風)과 더불어 동지밀직사사가 되었으며, 1324년 직조언량익찬공신(直朝言亮翊贊功臣)에 올라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1327년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일이 수습되면서, 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보필하였던 신하들에 대한 포상이 내려졌는데, 서하군(西河君)으로서 1등공신에 봉하여졌다.
1330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있다가 즉위하자 만호 권겸(權謙)과 같이 원나라 객성부사(客省副使) 칠십견(七十堅)을 따라 국왕인(國王印)을 가지고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해 찬성사가 되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조적(曺頔)을 토죄하고 왕을 원나라에서 잘 옹위한 공으로 다시 1등공신의 호를 받았다.

 

임군보(任君輔)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거경(巨敬)의 아들이다.(오류 경유의 아들이며 아들은 거경이다.)
1352년(공민왕 1)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가 되고 1355년 천추사로 원나라에 다녀온 뒤 밀직부사가 되었다. 이어 환관 김빠앤티므르(金伯顔帖木兒)의 거짓 왕지(王旨)로 내승제조(內乘提調)가 되었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태안군에 유배되고, 다시 제주에 이배되었다. 다시 기용되었으나 1356년 기철(奇轍) 등이 복주(伏誅)될 때 삭발하고 삼각산(三角山)에 숨었다가 붙잡혀 장형(杖刑)을 당하였다.
1365년 새로 집권한 신돈(辛旽)에 의하여 밀직부사에 복직되어 김란(金蘭)·목인길(睦仁吉)과 함께 궁중에서 서무(庶務)를 맡아 총애를 받았다.
이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신돈의 천거로 재상이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최영(崔瑩)·이구수(李龜壽) 등의 폄출(貶黜)을 반대하고 천승(賤僧)인 신돈에게 정사(政事)를 맡기지 말 것을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같이 복직된 김보(金普)가 신돈의 참소로 재상직에서 파면된 이후로 국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어 간관 정추(鄭樞)와 이존오(李存吾)가 신돈을 논하다가 쫓기게 될 때 이를 구호하여 더욱 신돈의 미움을 받았다.
이때 신돈이 참소하여 전주에 유배된 목인길을 변호하다가 여흥으로 유배되었다.

 

임원준(任元濬)2
1423(세종 5)∼1500(연산군 6).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심(子深), 호는 사우당(四友堂). 고려 밀직사판사 군보(君輔)의 증손이다.
10세에 글을 지어 신동으로 불렸다.
1445년(세종 27) 세종이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농장에 갔을 때 그가 글을 잘 짓는 것을 보고 칭찬하였으며, 얼마 되지 않아 동반직의 벼슬을 주었다.
1456년(세조 2)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부교리가 되었다. 다음해 중시에 병과로 합격하여 사헌부장령·봉상시판사(奉常寺判事) 등을 거쳐 이조참의에 오르고, 호조·예조·병조·형조 등 4조의 참판을 지냈다.
1466년 발영(拔英)·등준(登俊)의 양시에 합격하여, 바로 예조판서와 의정부좌·우참찬에 올랐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3등이 되고 서하군(西河君)에 봉해졌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풍수·의복(醫卜)에도 능통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교활하고 탐사(貪邪)하며, 그의 아들 사홍(士洪), 손자 숭재(崇載)도 탐욕스럽고 간사하여 나라를 그르치게까지 되어 당시 사람들이 대임(大任)·소임(小任)이라고 하였다. 시호는 호문(胡文)이다.

 

임사홍(任士洪)
?∼1506(연산군 1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초명은 사의(士毅). 자는 이의(而毅).
좌찬성 원준(元濬)의 아들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이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세 아들 중 두명이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광재(光載)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顯肅公主)의 남편으로 풍천위(豊川尉)가 되고, 숭재(崇載)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徽淑翁主)에게 장가 들어 풍원위(豊原尉)가 되었다.
1466년(세조 12)에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으로서 춘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뒤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교리·승지·도승지·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중국말에 능통하여 관압사(管押使)·선위사(宣慰使)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승문원에서 중국말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477년(성종 8)에 서얼출신인 유자광(柳子光)과 손을 잡고 지평 김언신(金彦辛)을 사주하여 효령대군의 손자 서원군(瑞原君)의 사위인 도승지 현석규(玄錫圭)를 왕안석(王安石)과 같은 소인이라고 탄핵하도록 하였다. 김언신에 이어 유자광이 다시 현석규를 공척(攻斥)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성종은 이를 붕비(朋比)로 보고 김언신을 하옥하였다.
그러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구해(救解)상소가 계속되었으며, 그 이듬해 4월에 홍문관부제학 유진(兪鎭), 예문관봉교 표연말(表沿沫), 종실 주계부정(朱溪副正) 심원(深源) 등의 잇따른 상소에서 임사홍이 사주한 것으로 밝혀져 그는 의주로, 유자광은 동래로 각각 유배되었다. 따라서 그는 후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성종조에는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 재기하여 사화를 주도하였다.
유자광은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종직(金宗直)·김일손(金馹孫) 등 사림계열에 보복을 가하였으며, 그는 1504년에 갑자사화를 주도하여 훈신계열을 축출하는 데 앞장을 섰다.
즉, 그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과 제휴하여 연산군의 생모가 죽은 내막을 밀고함으로써 폐비사사(廢妃賜死) 당시의 중신들을 타도하고, 사림계 인사들에게도 다시 화를 입혔다. 그의 아들 희재(熙載)는 김종직의 문하가 되어 무오사화 때 화를 입었으며, 그는 1506년 중종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임희재(任熙載)1
1472(성종 3)∼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경여(敬輿), 호는 물암(勿菴). 도승지 사홍(士洪)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고 홍문관에 들어간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 사림이 탄핵을 받게 되자 김종직의 제자로서 강백진(康伯珍)·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 등과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비방하고 세상의 일을 비평하였다 하여 곤장 100대를 맞고 천리 밖으로 귀양갔었다.
일찍이 시 한 절구를 병풍에 썼는데 “요순(堯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한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가? 재앙이 집안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라고 하였다.
어느날 연산군이 사홍의 집에 들렀다가 그가 이 시를 쓴 것을 알게 되어 화를 당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으나, 1504년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으며, 경기도 여주의 〈임호문공원준신도비 任胡文公元濬神道碑〉와 양주의 〈성판서건묘비 成判書健墓碑〉 등이 있다.

 

임숭재(任崇載)


?∼1505(연산군 11). 조선 중기의 간신. 본관은 풍천(豊川). 사홍(士洪)의 아들이며, 성종의 사위이다.
1491년(성종 22) 휘숙옹주(徽淑翁主:성종의 庶女)와 혼인, 풍원위(豊原尉)에 봉해졌다.
성질이 음흉하고 간사하기가 그 아버지보다 더하였으며 충신들을 추방하고 남의 첩을 빼앗아 왕에게 바침으로써 총애를 받았다.
창덕궁 곁에 저택을 두고 왕과 음란행위를 같이 하는 등 비행을 일삼았고, 미복(微服)으로 궁중을 출입하였다.
가무에 능하여, 1504년(연산군 10)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가 되었는데 특히 처용무(處容舞)를 잘 추었다.
1505년 채홍준사(採紅駿使)에 임명, 경상도의 미녀·준마(駿馬)를 구할 때 도내 사람들이 놀라 모두 피신하였고, 그가 수레를 타고 다닐 때에는 마치 왕의 행차와 거의 같았다. 그가 임무를 마치고 상경할 때에는 연산군이 승지를 시켜 강상(江上)에서 맞게 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일찍이 휘숙옹주와 혼인한 날 밤에 집에 불이 나 옹주가 인근 민가에 피신하는 소동이 벌어졌는데 당시 사신(史臣)은 “임사홍은 소인(小人)으로서 불의로 부귀하게 되었는데 복이 지나쳐 재앙이 생겼다.”고 적고 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관직을 추탈당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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