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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돈지간인 직제학공 맹헌과 좌의정 김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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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5-12-24 09:40 조회2,175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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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돈지간인 직제학공 맹헌과 좌의정 김종서


  안동김씨문온공파세보(기미보)에는 좌의정 시충익공 절재 김종서(金宗瑞)의 사위가 직제학공 휘 맹헌(孟獻) 맏아들 직장공 휘 자정(自埥 : 실록에서는 자청으로 번역)이 아니고 자정의 외아들 대사헌공 휘 연수(延壽)로 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선조님을 확인해 보던 중 실록 곳곳에서 충익공의 사위는 자정(自埥)이고, 자정(自埥)의 아들 연수(延壽)는 충익공의 외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향후 족보 편찬 시 이에 대한 논의와 정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단종 006 01/06/08 (계사) 001]

  강맹경(姜孟卿)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계전(李季甸)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이변(李邊)을 경창부 윤(慶昌府尹)으로, 박중손(朴仲孫)을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로, 노숙동(盧叔仝)을 좌승지(左承旨)로, 권준(權蹲)을 우승지(右承旨)로, 최항(崔恒)을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신숙주(申叔舟)를 우부승지(右副承旨)로, 함우치(咸禹治)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이석정(李石貞)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강윤(姜胤)을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김자청(金自埥)전구서 승(典廐署丞)으로, 한치형(韓致亨)을 사온 직장(司醞直長)으로 삼았다.

<중략>

  김자청(金自埥) 김종서(金宗瑞)의 사위였고, 한치형(韓致亨)은 한확(韓確)의 조카였으니, 당시 정부 대신(政府大臣)들이 제수(除授)하는데 참여하여 의논하고 상피(相避)하는 법을 지키지 아니하니, 매양 주의(注擬)1366) 할 즈음에 당하여서는 아들·사위·아우·조카를 서로 바꾸어 천거하여 이끌어 들이고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 전구서(典廐署) : 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여러 가지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官廳). 태조(太祖) 1(1392)년 7월에 베풀고, 영(令)(종7품(從七品)) 1명ㆍ승(丞)(종8품(從八品)) 2명ㆍ사리(司吏) 2명 등의 관원을 두었는데, 7대 세조(世祖) 6(1460)년 5월에 전생서(典牲暑)로 이름을 고쳤음


[세조 011 04/02/02 (신묘) 003]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안치(安置)한 사람 강윤(姜胤)·윤당(尹瑭)·정석조(鄭錫祚)·최열(崔烈)·김자정(金自埥)· <중략> 등은 자원(自願)에 따라 옮겨 안치(安置)하고,


[세조 038 12/03/12 (계축) 001]

  의금부(義禁府)에 전교하여 부평(富平)에 안치(安置)한 김자청(金自埥)을 석방하였다.


[연산 021 03/02/04 (병자) 002[

  전교하기를,

  “들은즉 난신(亂臣) 김종서(金宗瑞)의 후손이 조정에 나오는 자가 있다 하는데 〈사실〉 그러한가? 무릇 난신 연루인의 자손이 혹 억울한 자도 있을 것이니 서계하라.”

  하매, 이조에서 이르기를,

  김종서의 본손은 없고, 외손 김연수(金延壽)가 지금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중종 002 02/03/06 (기유) 007]

  이조에 전교하기를,

  “강원도 도사(都事) 유부(柳溥)를 독촉하여 부임케 하라.”

하였다.

【부는 그 후에 강릉 부사(江陵府使) 김연수(金延壽)와 말다툼을 하였다. 그래서 연수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니 백성들이 길을 막고 만류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후에 백성들이 부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달려들어 말하기를 “우리 태수(太守)를 내치고 어찌 우리를 살리겠는가.” 하였다. 연수김종서(金宗瑞)의 외손으로 청백한 절개가 있었다.


[중종 004 02/11/09 (무신) 001]

  헌부가 박의영·겸교수에 관한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내섬시 정(內贍寺正) 김연수(金延壽)는 강릉 부사(江陵府使)로서 벼슬을 버리고 왔으니, 지금 준직(準職)1079) 을 줄 수 없고,

[註 1079]준직(準職) : 당하관으로서 가장 높은 당하 정3품의 벼슬.


[중종 012 05/10/12 (을미) 001]

  “종성 부사(鍾城府使) 김연수(金延壽)는 사람됨이 맑고 깨끗하여서 모든 일을 다 법으로 다스리고자 하니, 야인(野人)이 원망할까 걱정됩니다. 연수와 같은 자는 남쪽 지방 잔폐(殘弊)한 고을에 옮기고, 너그러움과 사나움이 중용을 얻은 다른 사람으로써 대신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벌(橃)이 아뢰기를,

연수가 과연 맑고 깨끗하다면 야인이 비록 무지(無知)하나 또한 반드시 외복(畏服)할 것입니다.”

  하였다.


[중종 021 10/02/10 (무술) 008]

  권민수(權敏手)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경세창(慶世昌)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황형(黃衡)을 함경북도 절도사로, 유담년(柳聃年)을 평안도 절도사로, 김연수(金延壽)를 충청도 절도사로 삼았다.


[중종 021 10/02/16 (갑진) 002]

  “청백 탁이(淸白卓異)한, 예조 판서 김전·도승지 손중돈(孫仲暾)·좌부승지 조원기(趙元紀)·승문원 관교 강숙돌(姜叔突)에게는 각각 한 자급을 더하고, 충청도 절도사 김연수(金延壽)에게는 당표리(唐表裏)5481) 를 하사하며,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여산 군수(礪山郡守) 송흠(宋欽)에게는 각각

향표리(鄕表裏)5482) 를 하사하라.”

  사신은 논한다. 김전(金詮)은 온아 염담(溫雅恬淡)하고, 손중돈은 질박(質朴)하면서 간소하였고, 조원기는 천성이 청검(淸儉)하였다. 일찍이 경원 부사(慶源府使)로 있을 때에 흉년을 만났는데, 엄한(嚴寒)에도 술을 들지 않고 무양(撫養)에만 전심하여서 백성이 많이 힘입어 살아났다. 김연수는 청렴하고 간소하였다. 일찍이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부임하는 길에 공주(公州)의 전장(田庄)에서 잘 때에 목사가 주찬(酒饌)을 갖추어 가지고 가서 방문하였는데, 이튿날에 모두 봉환(封還)하니 목사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고절(苦節)이라고 일컬었는데,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고 끝내 부사(府使)로 있다가 죽었다.


[중종 021 10/02/23 (신해) 004] 충청도 병마절도사 김연수의 졸기

충청도 병마절도사 김연수(金延壽)가 죽었다. 청백하기 때문에 특별히 당표리(唐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는데 미처 받지 못하고 죽었다.



댓글목록

이왕섭님의 댓글

profile_image 이왕섭
작성일

  이전에 이곳 게시판에 올렸던 본인의 글에 김종서의 사위 김자청(土靑은 청 또는 정으로 읽는다)을 간략하게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다시 올립니다.

그리고 김종서의 본손 김조동(金祖同)·김수동(金壽同)·김석동(金石同) 등은 1453년 계유정난에 연좌(緣坐)되어 주사, 교형 또는 참형에 처해지거나 노비로 영속되었기 때문에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김윤종(金胤宗)과 김예생(金禮生)에 대하여..... 

김맹헌의 첫째 딸은 현감(縣監)과 현령(縣令)을 지낸 파평윤씨(坡平尹氏) 윤기(尹沂)에게, 둘째딸은 정난 좌익 공신(靖難左翼功臣) 병조 참의(兵曹參議) 이예장(李禮長)의 아들이며,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지낸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세보(李世珤)에게 출가하였다. 장남은 직장(直長) 김자청(金自土靑:土靑은 청 또는 정으로 읽는다)으로 순천김씨(順天金氏) 좌의정(左議政) 김종서(金宗瑞)의 사위이며, 차남은 첨정(僉正) 김자양(金自壤)이며, 셋째딸은 판관(判官) 송계사[宋繼祀:김종서(金宗瑞)의 아우인 김종흥(金宗興)의 사위]의 아들인 예조 정랑(禮曹正郞) 은진송씨(恩津宋氏) 송순년(宋順年)에게 출가하였다. 위의 순서는 출생년순(出生年順)이다. 현령(縣令) 윤기(尹沂)의 딸은 동궁 소훈(東宮昭訓)으로 들어가 세조(世祖)의 후궁(後宮)이 되었다. 1453년 계유 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金宗瑞)는 주사(誅死)되고 그의 아들 김승규(金承珪)와 김승규의 아우 김승벽(金承璧), 사위 박금손(朴金孫), 김자청(金自土靑), 김승규(金承珪)의 아들 김조동(金祖同)·김수동(金壽同)과 김승벽(金承璧)의 아들 김석동(金石同) 등은 연좌(緣坐)되어 참형(斬刑)과 교형(絞刑)에 처해지거나 관노(官奴)로 영속(永屬)되어졌다. 전라도(全羅道) 나주(羅州)의 속현(屬縣)인 안로(安老)를 관향(貫鄕)으로 하는 안로김씨(安老金氏)의 녹사(錄事), 직장(直長) 김증(金增)은 김종서(金宗瑞)의 또 다른 사위이다. 김증(金增)은 회양 부사(淮陽府使), 광주 목사(廣州牧使), 제주 목사(濟州牧使) 겸 제주 도안무사(濟州都安撫使), 호조 참의(戶曹參議),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해주 목사(海州牧使),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 겸 의주 목사(義州牧使), 전주 부윤(全州府尹), 총제(摠制) 등을 지낸 김정준(金廷雋)의 아들이며, 평양조씨(平壤趙氏) 검교 한성부 윤(檢校漢城府尹) 조곤(趙琨)의 외손(外孫)이다. 구안동김씨(舊安東金氏)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자행(金自行)의 아들로 행 청주 목사(行淸州牧使)와 정평 부사(定平府使), 양주 목사(楊州牧使)를 거쳐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이른 김숙연(金叔演)이 김증(金增)의 사위이다.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자정 선조님의 후손이 절손하다보니 족보상 오류가 생겼습니다.
이 자료는 국조방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왕조실록에도 명확히 있으며
연대로 보아서도 맞습니다.
김명리( 1361-1438) --김맹헌--김자정
김맹헌1426급제
김종서
1390-1453

국조방목
김연수(金延壽)

성종(成宗) 14년 (계묘, 1483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14(丙科14)

인적사항
자(字) 이강(而康)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가족사항
부(父) 김자정(金自埥)
조부(祖父) 김맹헌(金孟獻)
증조부(曾祖父) 김명리(金明理)
외조부(外祖父) 김종서(金宗瑞)



이력 및 기타사항
소과(小科) 1480(경자) 생원시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官職) 대사헌(大司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