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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21)기구한 젊은 때(10) - 감옥에서 배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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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1-01 11:12 조회1,88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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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젊은 때(10) - 감옥에서 배운 것들


둘쨋날 심문에 나는 전번에 할 말은 다 하였으니 더 할 말은 없다고 한 마디로 끝막고 뒷방에 앉아서 나를 넘겨다 보고 있는 와다나베를 향하여 또 일본을 꾸짖는 말을 퍼부었다.


그 이튿날부터는 더욱더욱 면회하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대개 내 의기를 사모하여 왔노라, 어디 사는 아무개니 내가 출옥하거든 만나자, 설마 내 고생이 오래랴, 안심하라, 이런 말을 하였다.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음식을 한 상씩 차려 가지고 와서 나더러 먹으라고 권하였다. 나는 가져온 사람이 보는 데서 한두 젓가락 먹고는 나머지는 죄수들에게 차례로 나누어 주었다.


그 때의 감옥 제도는 지금과 달라서 옥에서 하루 삼시 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수가 짚신을 삼아서 거리에 내다가 팔아서 쌀을 사다가 죽이나 끓여 먹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내게 들어온 좋은 음식을 얻어먹는 것은 그들의 큰 낙이었다.


제 3 차 심문은 경무청에서가 아니요, 감리서에서 감리 이재정 자신이 하였는데, 인천 인사가 많이 모인 모양이었다. 요샛말로 하면 방청이다. 감리는 내게 대하여 매우 친절히 말을 묻고, 다 묻고 나서는 심문서를 내게 보여 읽게 하고 고칠 것은 나더러 고치라 하여 수정이 끝난 뒤에 나는 '백(白)' 자에 이름을 두었다. 이날은 일인이 없었다.


수일 후에 일인이 내 사진을 박는다 하여 나는 또 경무청으로 업혀 들어갔다. 이날도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김윤정이 내 귀에 들리라고,


"오늘 저 사람들이 창수의 사진을 박으러 왔으니,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딱 부릅뜨고 박히시오"


한다.


그러나 우리 관원과 일인과의 사이에 사진을 박히리, 못 박히리 하는 문제가 일어나서 한참 동안 옥신각신하다가 필경은 청사 내에서 사진을 박는 것을 허할 수 없으니, 노상에서나 박으라 하여서 나를 노상에 앉혔다. 일인이 나를 수갑을 채우든지, 포승으로 얽든지 하여 죄인 모양을 하여 달라고 요구한 데 대하여 김윤정은,


"이 사람은 계하 죄인(啓下罪人) - 임금이 친히 알아 하시는 죄인이라는 뜻 - 인즉 대군주 폐하께서 분구가 곕시기 전에는 그 몸에 형구를 대일 수 없다"


하여서 딱 거절하였다.


그런즉 일인이 다시 말하기를,


"형법이 곧 대군주 폐하의 명령이 아니오? 그런즉 김창수를 수갑을 채우고 포승으로 얽는 것이 옳지 않소?"


하고 기어이 나를 결박하여 놓고 사진을 박기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윤정은,


"갑오경장 이후에 우리 나라에서는 형구를 폐하였소"


하고 잡아뗀다. 그런즉 왜는 또,


"귀국 감옥 죄수를 본즉, 다 쇠사슬을 차고 다니는데..."


하고 깐깐하게 대들었다.


이제 김 경무관은 와락 성을 내며,


"죄수의 사진을 찍는 것은 조약에 정한 의무는 아니오, 참고 자료에 불과한 세세한 일에 내정 간섭은 받을 수 없소"


하고 소리를 높여서 꾸짖는다. 둘러섰던 관중들은 경무관이 명관이라고 칭찬하고 있었다.


이리하여서 나는 자유로운 몸으로 길에 앉은 대로 사진을 박게 되었는데, 일인은 다시 경무관에게 애걸하여 겨우 내 옆에 포승을 놓고 사진을 박는 허가를 얻었다.


나는 며칠 전보다는 기운이 회복되었으므로 모여 선 사람들을 향하여 한바탕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왜군들이 우리 국모 민 중전마마를 죽였으니, 우리 국민에게 이런 수치와 원한이 또 어디 있소. 왜놈의 독이 궐내에만 그칠 줄 아시오? 바로 당신들의 아들과 딸들이 필경은 왜놈들의 손에 다 죽을 것이오. 그러니 여러분! 당신들도 나를 본받아서 왜놈을 만나는 대로 다 때려죽이시오. 왜놈을 죽여야 우리가 사오"


하고 나는 고함을 하였다. 와다나베놈이 내 곁에 와서,


"네가 그렇게 충의가 있으면 왜 벼슬을 못하였나?"


하고 직접 내게 말을 붙인다.


"나는 벼슬을 못할 상놈이니까 조그마한 왜놈이나 죽였다마는, 벼슬을 하는 양반들은 너희 황제의 모가지를 베어서 원수를 갚을 것이다"


하고 나는 와다나베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날 김윤정에게 이화보를 놓아 달라고 청하였더니 이화보는 그날로 석방되어서 좋아라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나는 심문은 끝나고 판결만을 기다리는 한가한 몸이 되었다. 내가 이 동안에 한 일은 독서, 죄수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 죄수들을 위하여 소장을 대서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들여주신 '대학'을 읽고 또 읽었다. 글도 좋거니와 다른 책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감리서에 다니는 어떤 젊은 관리의 덕으로 천만 의외에 여기서 내 20 평생에 꿈도 못 꾸던 새로운 책을 읽어서 새로운 문화에 접촉할 수가 있었다.


그 관리는 나를 찾아와서 여러 가지 새로운 말을 하여 주었다. 구미(歐美) 문명국의 이야기며, 우리 나라가 옛 사상, 옛 지식만 지키고 척양척왜로 외국을 배척만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이며, 널리 세계의 정치, 문호, 경제, 과학 등을 연구하여서 좋은 것은 받아들여서 우리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창수와 같은 의기 남아로는 마땅히 신학식을 구하여서 국가와 국민을 새롭게 할 것이니 이것이 영웅의 사업이지, 한갖 배외 사상만을 가지고는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지 아니한가"


하여 나를 일깨워 줄뿐더러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 한문으로 된 책자와 국한문으로 번역된 조선 책도 들여 주었다. 나는 언제 사형의 판결과 집행을 받을지 모르는 몸인 줄 알면서도, 아침에 옳은 길을 듣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이 신서적을 수불석권(手不釋卷)하고 탐독하였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읽는 것을 보고 감리서 관리도 매우 좋아하였다.


이런 책들을 읽는 동안 나는 서양이란 무엇이며, 오늘날 세계의 형편이 어떠한 것을 아는 동시에 나 자신과 우리 나라에 대한 비판도 하게 되었다. 나는 고 선생이 조상의 제사에 부르는 축문에 명나라의 연호인 영력 몇 년을 쓰는 것이 우리 민족으로서는 옳지 아니한 것도 깨달았고 안 진사가 서양 학문을 공부한다고 절교하던 것이 고 선생의 달관이 아니라고(?)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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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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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