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충렬공 김방경(조선왕조실록에서)-6- 양성지의 상소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6-01-03 20:48 조회1,728회 댓글0건

본문

세조 003 02/03/28 (정유) 003 /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춘추 대사·오경·문묘 종사·과거·기인 등에 관한 상소①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가 상소(上疏)하기를,

“신(臣)이 엎드려 보니, 주상 전하께서는 상성(上聖)의 자질로서 대위(大位)에 영광스럽게 오르시어 고금(古今) 치란(治亂)의 자취와 민속(民俗)의 간난(艱難)한 일을 통찰(洞察)하지 않음이 없으시고 소간(宵旰)831) 으로 부지런히 도치(圖治)하셔서 우리 조선 억만 년 태평 성업의 기틀을 닦으시니, 진실로 삼한(三韓)에서 한 번 번성할 때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조정의 득실(得失)과 민간의 이병(利病)을, 대신(大臣)은 꾀하고 대간(臺諫)은 이를 논의하며, 기타의 시종(侍從)하는 직사(職事)들도 논사(論思)함에 있는데, 신은 용렬한 자질로써 경악(經幄)832) 을 시종함을 얻어서도 조금의 성효(成効)도 없어 성덕(聖德)에 보답함이 없음을 부끄러워합니다. 무릇 국가의 크고 작은 일은 미충(微衷)이라도 상량하여 확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만(萬)의 일(一)이라도 비익(裨益)됨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고 감히 편의(便宜) 24사(事)를 가지고 조목을 기록하여 바치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감(聖鑑)하여 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1. 춘추(春秋)의 대사(大射)입니다. 대개 금인(金人)833) 은 요(遼)나라의 풍속을 이어 받아 3월 3일과 9월 9일에 하늘에 절하고 버드나무를 쏩니다. 이것은 비록 중원(中原)의 제도는 아니더라도 또한 번국(藩國)의 성사(盛事)입니다. 우리 동방(東方)은 해동(海東)에 웅거(雄據)하여 삼국(三國)으로부터 전조(前朝)834) 에 이르기까지 교천(郊天)835) 향제(饗帝)836) 를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제 진실로 그 옛 것을 다 따르지 못하더라도 요(遼)·금(金)의 고사(故事)를 조금 모방하여 3월 3일과 9월 9일은 친히 교외(郊外)에 거둥하시어 대사례(大射禮)를 행하고, 해마다 상례로 삼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거의 우리의 무위(武威)를 크게 떨치고 사기(士氣)도 또한 증가하여 스스로 일국 일대(一國一代)의 풍속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1. 오경(五京)을 증치(增置)하는 것입니다. 대개 요(遼)·금(金)·발해(渤海)도 아울러 오경(五京)을 세웠고, 전조(前朝)도 사경(四京)을 세웠는데, 본조(本朝)에서는 단지 한성(漢城)·개성(開城)의 양경(兩京)만을 설치했을 뿐이니, 대동 산해(大東山海)의 험함과 주·부(州府)의 성함을 가지고서 단지 양경만을 두었으니 어찌 흠결(欠缺)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원나라 세조(世祖)는 우리에게 의법은 본속(本俗)을 따를 것을 허락하였고, 고황제(高皇帝)도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성교(聲敎)를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동교(東郊)의 땅은 진실로 복리(腹裏)에 비할 것이 아닌 때문입니다. 빌건대 경도(京都)인 한성부(漢城府)를 상경(上京)으로 삼고, 개성부(開城府)를 중경(中京)으로 삼고, 경주(慶州)를 동경(東京)으로 삼고, 전주(全州)를 남경(南京)으로 삼고,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삼고, 함흥(咸興)을 북경(北京)으로 삼아, 각각 토관(土官)을 설치하고 군병(軍兵)을 가정(加定)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거의 형세의 승(勝)함을 얻어 위급(危急)할 때에도 또한 족히 의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악진해독(嶽鎭海瀆)입니다. 대개 일대(一代)의 흥(興)함에는 반드시 일대(一代)의 제도가 있었으며, 본조(本朝)의 악진해독(嶽鎭海瀆), 명산 대천(名山大川)의 제사는 모두 삼국과 전조의 구제를 의방해서 한 것이므로 의논할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용흥강(龍興江)은 우리 태조(太祖)께서 흥운(興運)하신 땅이고, 묘향산(妙香山)에 이르러서는 단군(檀君)이 일어난 곳이며, 구월산(九月山)에는 단군사(檀君祠)가 있고, 태백산(太白山)은 신사(神祠)가 있는 곳이며, 금강산(金剛山)은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장백산(長白山)은 선춘령(先春嶺)의 남쪽 갑산(甲山)의 북쪽에 있어 실로 나라의 북악(北岳)이 됩니다. 임진(臨津)은 나라의 서쪽 관문이고, 용진(龍津)은 나라의 동쪽 관문이며, 낙동강(洛東江)은 경상도의 대천(大川)이고, 섬진(蟾津)은 전라도의 대천입니다. 박천강(博川江)은 곧 옛 대령강(大寧江)이며, 보리진(菩提津)·오대산(五臺山)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전(祀典)에 있지 아니 합니다. 또 동해·남해·서해의 신사(神祠)는 모두 개성(開城)을 기준하여 정하였기 때문에 또한 방위(方位)가 어긋납니다.

빌건대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고정(考定)을 상세히 더하게 하고, 삼각산(三角山)을 중악(中岳)으로 삼고, 금강산을 동악(東岳)으로 삼고, 구월산(九月山)을 서악(西岳)으로 삼고, 지리산(智異山)을 남악(南岳)으로 삼고, 장백산(長白山)을 북악(北岳)으로 삼고, 백악산(白岳山)을 중진(中鎭)으로 삼고, 태백산(太白山)을 동진(東鎭)으로 삼고, 송악산(松嶽山)을 서진(西鎭)으로 삼고, 금성산(錦城山)을 남진(南鎭)으로 삼고, 묘향산(妙香山)을 북진(北鎭)으로 삼을 것입니다. 또 동해신(東海神)을 강릉(江陵)에, 서해(西海)는 인천(仁川)에, 남해(南海)는 순천(順天)에, 북해(北海)837) 는 갑산(甲山)에 이제(移祭)하고, 용진(龍津)을 동독(東瀆)으로 삼고, 대동강(大同江)을 서독(仙)으로 삼을 것입니다. 한강(漢江)을 남독(南瀆)으로 삼고 두만강(豆滿江)을 북독(北瀆)으로 삼고, 또 목멱산(木覓山)·감악산(紺岳山)·오관산(五冠山)·계룡산(鷄龍山)·치악산(雉岳山)·오대산(五臺山)·의관령(義館嶺)·죽령산(竹嶺山)을 명산(名山)으로 삼고, 웅진(熊津)·임진(臨津)·보리진(菩提津)·용흥강(龍興江)·청천강(淸川江)·박천강(博川江)·낙동강(洛東江)·섬진(蟾津)으로 대천(大川)을 삼아 예(例)에 따라 치제(致祭)하여【양진(楊津) 두 곳, 덕진(德津) 두 곳, 가야진(伽耶津)·주흘산(主屹山)·우불산(亐佛山)·우이산(牛耳山)·비백산(鼻白山)·장산곶이[長山串]·아사진(阿斯津)·송곶이[松串]·비류산(沸流山)·구진 익수(九津溺水)는 개혁함이 옳습니다.】 일대의 사전(祀典)을 새롭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사전(祀典)에 실린 산천은 고금으로 모두 34인데, 옛 것을 따른 것이 17, 이제(移祭)한 것이 4, 새로 오른 것이 13, 영구히 고칠 만한 것도 또한 13입니다.

1. 번부악(蕃部樂)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대개 중국의 악(樂)은 아악(雅樂)·속악(俗樂)·여악(女樂)·이부(夷部)838) 등의 악이 있는데, 본조(本曹)에서 사용하는 것은 헌가(軒架)·고취(鼓吹)·동남(童男)·기녀(妓女)·가면 잡희(假面雜戲) 등의 제도(制度)가 있으니, 대저 악(樂)이란 형상[象]을 이루는 것입니다. 태조께서 천운을 타고 흥기하심으로부터 태종·세종께서 서로 이으시니 동린(東隣)의 헌침(獻琛)과 북국(北國)의 관색(款塞)으로 예(禮)를 제정하고 악(樂)을 만들어 아악(雅樂)·속악(俗樂)이 모두 바르게 되었으나 홀로 번악(蕃樂)은 아직 의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성상께서 용비(龍飛)하여 대위(大位)에 새로 등극하시어 일본(日本)·여진(女眞)의 사자가 와서 즉위를 하례하는 자가 항상 수백 인이 궐정(闕庭)에서 절하고 뵈오니, 해동(海東)의 문물(文物)이 이때보다 성함이 있지 않았습니다.

빌건대 일본의 가무(歌舞)로써 동부악(東部樂)을 삼고, 여진의 가무로써 북부악(北部樂)을 삼아서 일본악(日本樂)은 삼포(三浦)의 왜인에게 익히게 하고, 여진악(女眞樂)은 5진(五鎭)의 야인에게 익히게 하되, 그 의관 제도(衣冠制度)가 괴이(怪異)하고 기초(譏誚)의 형상이라 하지 말고, 동사(東使)에게 잔치하면 겸하여 북악을 쓰되 동악은 쓰지 않고, 북사(北使)에게 잔치하면 겸하여 동악을 쓰되 북악은 쓰지 않으며, 중국 사신[中國使]에게 잔치하면 아울러 동악·북악을 쓰고 나아가 조정에서도 이를 쓰고 종묘(宗廟)에도 주악하게 하여, 태평한 다스림을 분식(賁飾)하고 우리 조종(祖宗)의 업(業)을 빛나게 하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1. 관례(冠禮)를 의행(議行)함입니다. 대개 예전에 남자는 20세이면 관(冠)을 한 것은 성인(成人)의 도(道)를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송(宋)나라 말년에 진사(進士) 윤곡(尹穀)은 성중(城中)에 갇혀 있으면서 관례(冠禮)를 행하여 향인(鄕人)이 이를 기롱하자 대답하기를, ‘아이들[兒曹]로 하여금 관대(冠帶)하게 함은 선인(先人)을 지하에서 뵙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으니, 그 관례(冠禮)를 중하게 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동방(東方)은 고려[前朝] 명종(明宗) 때에 원자(元子)가 관례를 행하였고 그 뒤로는 듣지 못하였으니, 빌건대 예관(禮官)에 명하여 고례(古禮)를 전채(傳採)하고 겸하여 시왕(時王)의 제도를 상고하여 위로는 종실(宗室)로부터 아래로는 사대부(士大夫)의 자제(子弟)에 이르기까지 나이 13세이면 관례(冠禮)를 행하게 하여 입자(笠子)·두건(頭巾)·사모(紗帽)로써 삼가(三加)839) 를 하고, 혹은 사모(紗帽)·복두(幞頭)·양관(梁冠)을 사용하며, 그 미관자(未冠者)는 입학(入學)을 불허하게 하고, 혼가(婚嫁)·종사(從仕)에 능히 선왕(先王)의 제도를 회복하여 크게 외국의 누(陋)를 변하게 하소서.

1. 복색(服色)을 정하는 것입니다. 대개 복색의 제정은 상하(上下)를 분별하려는 소이(所以)이니 풍속을 한결같이 하는 것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나라 사람들은 흰 것[白]을 숭상하고, 명(明)나라 사람은 검은 것[黑]을 숭상하며, 일본에 이르러서는 푸른 것[靑]을 숭상하여 모두 일정한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 동방은 조관(朝冠)과 공복(公服)을 실상은 중국(中國)을 의방하였으되, 상시(常時)에는 백의(白衣)를 입기를 좋아하니 마음대로 잡색(雜色)을 쓰는 것은 심히 비리(鄙俚)합니다.

빌건대 공복(公服)의 제도에 따라 당상관(堂上官) 이상을 한 색으로 하고, 6품 이상을 한 색으로 하고, 유품원(流品員)·성중관(成衆官)·의관 자제(衣冠子弟)를 한 색으로 하고, 제위 군사(諸衛軍士)를 한 색으로 하고, 경중과 외방[京外]의 양인(良人)·이서(吏胥)를 한 색으로 하고, 공사 천구(公私賤口)·공장(工匠)을 한 색으로 하여, 이로써 품질(品秩)을 따라 점차로 입게 하든가, 혹은 한 색을 순용(純用)하게 해서 국속(國俗)을 정제(整齊)하시고 여복(女服)에 이르러서는 또한 모두 상정(詳定)하게 하소서.

1. 복요(服妖)를 금하는 것입니다. 대개 의상(衣裳)의 제도는 남녀(男女)와 귀천(貴賤)을 분별하려는 소이(所以)이니, 하민(下民)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나라 안의 여자들이 장의(長衣) 입기를 즐겨 남자와 같이 하나, 그러나 장의를 의상(衣裳)의 사이에 입어 3층(層)을 이루게 하고 점점 서로 본따서 온나라가 모두 그러하니, 의심컨대 이것은 곧 사문(史文)에 이른바 ‘복요(服妖)’라는 것입니다. 전일에 중국[中原]의 여자가 많이 좌임(左衽)840) 하는 옷을 입었는데, 보고 듣는 자가 모두 길조(吉兆)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제 여자가 남복(男服)을 입는 것도 또한 어찌 경사로운 징조라 하겠습니까? 더구나 후세(後世)에 있어서도 여자는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을 입는 것이 가장 고법(古法)에 가깝게 되는데, 만약 이와같이 마음대로 한다면 남녀의 의복은 스스로 제도를 같이하여 이르지 않은 바가 없을 것이니, 어찌 지금 바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빌건대 유사(攸司)에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금지하게 하고, 그래도 여전히 입는 자는 그 옷을 거두어 동서(東西) 활인원(活人院)에 나누어 두었다가 가난하고 병든 자의 옷으로 쓰소서.

1. 전대(前代)의 임금과 재상(宰相)을 제사하는 것입니다. 신(臣)이 그윽이 명나라 제사(諸司)의 직장(職掌)을 보니, 관원을 보내어 역대(歷代)의 군상(君相)을 제사하는데 대뢰(大牢)841) 로써 쓰니 심히 성거(盛擧)입니다. 본조는 역대의 군왕이 도읍하였던 곳에서 산제(散祭)하는 데도 혹은 당연히 제사지내야 할텐데 제사하지 않는 것이 있고 혹은 배향(配享)한 대신(大臣)이 없어 흠전(欠典)된 것 같으니, 바라건대 매년 봄·가을로 동교(東郊)에서 전 조선왕(前朝鮮王) 단군(檀君), 후 조선왕(後朝鮮王) 기자(箕子), 신라(新羅)의 시조(始祖)·태종왕(太宗王)·문무왕(文武王),【두 왕은 고구려·백제를 통합하였음.】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영양왕(嬰陽王),【수병(隋兵)을 대패(大敗)시킴.】 백제(百濟)의 시조, 고려(高麗)의 태조(太祖)·성종(成宗)·현종(顯宗)·충렬왕(忠烈王) 이상 12위(位)를 합제(合祭)하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김인문(金仁問)·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백제의 흑치상지(黑齒常之)와 근일에 정한 전조(前朝)의 배향 16신(配享十六臣)과 한희유(韓希愈)·나유(羅裕)【합단(哈丹)을 막는 데 공이 있었음.】·최영(崔瑩)·정지(鄭地)【왜구(倭寇)를 막는 데 공이 있었음.】 등을 배향(配享)하게 하소서.

1. 전대(前代)의 능묘(陵墓)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신(臣)이 《속육전(續六典)》을 보니, 고려(高麗)의 태조·현종(顯宗)·문종(文宗)·원종(元宗) 4능(陵)은 각각 수호(守護)하는 자 2호(戶)를 정하여 초채(樵採)를 금하게 하고, 태조의 능(陵)에는 1호를 더하게 하였으니 심히 성덕(盛德)입니다. 그러나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역대 군주(歷代君主)가 비록 모두 공덕(功德)이 백성에게 있지 않았더라도 또한 모두 일국(一國)의 인민이 함께 임금으로 모셨으니, 그 있는 데를 살피지 못한 자는 그만이지만, 그 능묘가 여고(如古)하되 호리(狐狸)로 하여금 능히 곁에 구멍을 뚫게 하고 초채(樵採)하는 자로 위를 다니게 하면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빌건대 유사(有司)로 하여금 전 조선(前朝鮮)·후 조선(後朝鮮)·삼국·전조(前朝)가 도읍했던 개성(開城)·강화(江華)·경주(慶州)·평양(平壤)·공주(公州)·부여(扶餘)와 김해(金海)·익산(益山) 등지의 능묘가 있는 곳을 자세하게 심방(尋訪)하게 하여 그 공덕이 있는 자는 수릉(守陵)에 3호(戶)를 두고, 별다른 공덕이 없는 자는 2호를 두되, 정비(正妃)의 능묘에도 역시 1호를 두어, 부세(賦稅)를 견감(蠲減)하고 요역(徭役)을 면제하며 그 초소(樵蘇)842) 함을 금하게 하고, 이어서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춘추(春秋)로 살펴보고 치제(致祭)하게 하소서.

1.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입니다. 대개 동방(東方)은 기자(箕子)가 수봉(受封)한 이후로부터 홍범(洪範)843) 의 유교(遺敎)가 오래도록 떨어지지 아니하여, 당(唐)나라에서는 ‘군자(君子)의 나라’라 하고, 송(宋)나라에서는 ‘예의(禮義)의 나라’라 칭하였으니, 문헌(文獻)의 아름다움은 중국[中華]을 모의(侔擬)하였으되, 문묘(文廟)에 배식(配食)한 자는 오직 신라의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고려의 안향(安珦) 3인뿐입니다.

신이 들으니, 학사(學士) 쌍기(雙冀)는 전조(前朝)에 있어서 처음으로 과거(科擧)를 설치하여 문풍(文風)을 진작(振作)하였고, 문헌공(文獻公) 최충(崔沖)은 또 구재(九齋)를 설치하여 재생(諸生)을 교육하였으며,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본조의 문충공 권근(權近)에 이르러서는 그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사람마다 모두 만세(萬世)의 수범(垂範)이 될 만하다고 하였으니, 빌건대 모두 선성(先聖)에 배향(配享)하여 후인(後人)을 권장하게 하소서. 만약 ‘동방의 현자(賢者)가 어찌 옛사람과 같을 수가 있느냐?’고 한다면, 공자·맹자의 뒤에도 또한 정주(程朱)844) 가 있었고, 또 어진 자 되기가 이같이 어려우면 후인이 어찌 성현(聖賢)을 배우겠습니까? 중국의 배향자(配享者)는 과연 모두 공자·맹자, 정주(程朱)와 같으며 동방의 선비는 모두 중국 사람만 같지 못하겠습니까? 대저 임금[人主]은 모름지기 일대 정사를 시행하여 권징(權懲)하는 뜻을 보인 뒤라야 사람이 보고 들으며 동(動)하고, 풍속(風俗)을 옮겨 고칠 것입니다.

1. 무성(武成)을 입묘(立廟)하는 것입니다. 대개 문무(文武)의 도(道)는 천경 지위(天經地緯)845) 와 같으니 편벽되게 폐할 수 없습니다. 당(唐)나라 숙종(肅宗)은 태공(太公)을 높여서 무성왕(武成王)을 삼아 입묘(立廟)하여 향사(享祀)하기를 문선왕(文宣王)846) 과 더불어 비등하게 하여 뒤에는 역대(歷代) 양장(良將) 64인을 배향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은 선성(先聖)의 제사를 위로는 국학(國學)으로부터 아래로는 주·군(州郡)에 이르렀으되, 무성왕(武成王)은 사우(祠宇)가 없고 단지 둑신(纛神)847) 4위(位)만을 제사지내니 어찌 궐전(闕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훈련관(訓鍊觀)은 곧 송나라의 무학(武學)이니, 빌건대 둑소(纛所)848) 를 훈련관에 병합하고 무성묘(武成廟)를 세워서 제례(祭禮)와 배식(配食)은 대략 문묘(文廟)의 제도에 따르고, 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의 유금필(庾黔弼)·강감찬(姜邯贊)·양규(楊規)·윤관(尹瓘)·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김경손(金慶孫)·박서(朴犀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方實)·최영(崔瑩)·정지(鄭地), 본조(本朝)의 하경복(河敬復)·최윤덕(崔閏德)을 배향하게 하소서.

1. 공신(功臣)을 배향(配享)하는 것입니다. 대개 본조의 전후 5공신(五功臣)은 모두 충의위(忠義衛)에 속(屬)하고, 삼조(三朝)에 원종(原從)한 사람도 또한 모두 유죄(宥罪)하여 뒤에 등록하였으니, 원(元)나라의 사겁설(四怯薛)과 송(宋)의 녹수룡(錄隨龍)과 더불어 은총(恩寵)을 더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들으니, 전조(前朝)의 배향 대신(配享大臣)은 공신이라 칭하여 매양 큰 은례(恩禮)로써 반드시 자손을 녹용(錄用)하였습니다. 본조(本朝)의 오묘(五廟)에도 모두 배위(配位)를 두었으니 모두 다 공은 왕실(王室)에 있고 은택(恩澤)은 생민(生民)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빌건대 5공신의 예(例)에 따르든가, 혹은 원종(原從) 제인(諸人)의 사호(賜號)에 따라 배향 공신(配享功臣)은 모두 유후(宥後)849) 하고 세록(世祿)850) 하게 하소서. 또 전조와 본조의 장상(將相)으로서 공덕이 백성에게 있는 자의 자손도 또한 수방(搜訪)하여, 특별히 은명(恩命)을 더하면, 전인(前人)은 명명(冥冥)한 속에서 감격하고 후인(後人)도 또한 능히 만세(萬世)에 권장할 것입니다.

1. 문익점(文益漸)·최무선(崔茂宣)의 사우(祠宇)를 세우는 것입니다. 대개 신이 들으니, 성인(聖人)이 제례(祭禮)를 제정할 제, 백성에게 본받게 〈착함〉을 베풀면 제사하였고, 능히 대환(大患)을 막으면 제사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에는 예전에 목면(木綿)의 종자(種子)가 없었는데, 전조의 문익점(文益漸)이 봉사(奉使)로 원(元)나라에 체류하여 비로소 얻어다 심어서 드디어 일국에 널리 퍼져서 지금은 귀천(貴賤)·남녀(男女) 할 것 없이 모두 면포(綿布)를 입게 되었습니다. 또 신라(新羅) 때부터 단지 포석(砲石)의 제조만 있고 역대(歷代)로 화약(火藥)의 법이 없었는데, 전조 말에 최무선(崔茂宣)이 처음으로 화포(火砲)의 법을 원(元)나라에서 배워 가지고 돌아와 그 기술을 전하니, 지금은 군진(軍鎭)에서 사용하여 이로움이 말할 수 없습니다. 최무선(崔茂宣)의 공은 만세(萬世)토록 백성의 해(害)를 제거하였으며, 문익점(文益漸)의 공은 만세토록 백성의 이(利)를 일으켰으니, 그 혜택을 생민(生民)에게 입힘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빌건대 2인의 관향(貫鄕)인 고을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봄·가을에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행하고, 그 자손은 공신으로 칭하여 유죄(宥罪)하고 녹용(錄用)하게 하소서.

1. 시신(侍臣)의 음자(蔭子)851) 입니다. 대개 본조에서 승음(承蔭)852) 하는 법(法)은 곧 당(唐)나라의 자음(資陰)과 송나라의 임자(任子)의 뜻이니, 그 사대부(士大夫)를 대우하는 은덕이 지극합니다. 그러나 그 법은 3품 이상의 관원 외에는 단지 일찍이 대간(臺諫)과 정조(政曹)를 경유한 자의 아들만을 승음(承蔭)하여 신참(新參)한 지 수일이면 곧 감찰(監察)에 제배(除拜)되어 음덕이 자손에게 미치나, 어떤 이는 수십 년을 시종(侍從)하였어도 음덕이 후손에게 미치지 못한 자가 있으니 참으로 가석(可惜)합니다. 더구나 《송사(宋史)》에서는 재집(宰執)·시종(侍從)·대간(臺諫)을 아울러 말하였으니, 빌건대 4품 이하, 6품 이상의 관각(館閣) 양제(兩制)에 시종한 제신(諸臣)의 아들은 특별히 승음(承蔭)을 허락하소서.

1. 문무(文武)의 과법(科法)입니다. 대개 지금 문과(文科)의 초장(初場)에서 강경(講經)할 때, 《사서(四書)》·《오경(五經)》 외에 《한문(韓文)》·《유문(柳文)》 등의 글 같은 것을 임의(任意)로 시강(試講)하니 참으로 정규(定規)가 없고, 중장(中場)은 아울러 고부(古賦)를 시험하니 본래 급무(急務)가 아닙니다. 또 진사(進士)를 이로써 뽑으며 종장(終場)은 제사(諸史)와 시무(時務)를 비록 참작하여 출제(出題)하나 역대의 일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권도(權道)의 말로 대답하기를, ‘한(漢)나라·당(唐)나라의 다스림을 어찌 족히 오늘날에 논할 수 있겠는가?’ 하고, 취하는 자도 또한 뜻[意]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사학(史學)이 불명(不明)하여 심히 불가합니다.

또 무과(武科) 시험에 《사서(四書)》·《오경(五經)》을 아울러 강하게 함도 미편(未便)하니, 빌건대 《무경칠서(武經七書)》853) 외에는 《장감(將鑑)》·《병감(兵鑑)》·《병요(兵要)》·《진설(陣說)》 만을 강(講)하고, 문과(文科)는 《사서》·《오경》 외에 《좌전(左傳)》·《사기(史記)》·《통감(通鑑)》·《송원절요(宋元節要)》·《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 만을 강하며, 중장을 표(表)·전(箋)을 시험하여 신자(臣子)로 임금 섬기는 글을 익히게 하고, 교조(敎詔)를 시험하여 군상(君上)이 영하(令下)하는 글을 익히게 하며, 종장(終場)에는 역대와 시무를 번갈아 출제하되, 만일 금년에 역대(歷代)를 시험하였으면 명년에는 시무(時務)를 시험하여, 이것으로 제도를 정하여 과거(科擧)의 법을 새롭게 하소서.

1. 아들을 보내어 입학(入學)하는 것입니다. 대개 자제(子弟)의 입학은 그 이로움이 여섯 가지 있으니, 어진 사우(師友)를 얻어 의난(疑難)을 질문함이 하나요, 어진 사대부에게 친자(親炙)854) 하여 그 기질(氣質)을 훈도(薰陶)함이 둘이며, 인심(人心)·풍속(風俗)과 피차의 형세를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음이 셋이오, 친히 문헌(文獻)의 아름다움과 예악(禮樂)·명물(名物)을 보고 점점 습속(習俗)의 누(陋)를 고침이 넷이요, 혹은 분전(墳典)855) 을 구구(購求)하여 궐유(闕遺)를 보충함이 다섯이요, 인하여 중국의 어음(語音)을 배움으로써 상역(象譯)856) 의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 여섯입니다.

이제 비록 주청(奏請)하더라도 윤허(允許)를 받기 어려울 것 같으니, 바라건대 입조(入朝)하는 행리(行吏) 때마다 집현전(集賢殿)·예문관(藝文館)·교서관(校書館)·성균관(成均館)·승문원(承文院) 가운데서 학문이 정숙(精熟)하고 문장이 민섬(敏贍)857) 하며 기국(器局)이 굉원(宏遠)한 자 각 1인을 선택하여 취차(就差)하여 들여 보내 유학(遊學)하게 한다면 거의 소견(所見)이 넓어지고 소득도 또한 많아져서 모두 국가의 유용(有用)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원전】 7 집 121 면

【분류】 *풍속-풍속(風俗) / *정론-정론(政論) / *역사-전사(前史) / *왕실-종사(宗社) / *군사-군정(軍政)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과학-지학(地學) / *예술-음악(音樂) / *외교-왜(倭) / *외교-야(野) / *외교-명(明) / *풍속-예속(禮俗) / *의생활(衣生活) / *사상-유학(儒學) / *인물(人物) / *인사(人事) / *농업-면작(綿作) / *교육(敎育) / *군사-군기(軍器) / *역사-고사(故事)



[註 831]소간(宵旰) : 소의 간식(宵衣旰食).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함.


[註 832]경악(經幄) : 경연.


註 833]금인(金人) : 금나라 사람.


[註 834]전조(前朝) : 고려조.


[註 835]교천(郊天) : 왕이 천신(天神)에게 제사지내던 일. 동지에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하고 하지에 북교의 땅에 제사하였음.


[註 836]향제(饗帝) : 선왕(先王)께 합제(合祭)하는 것.


[註 837]북해(北海) :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


[註 838]이부(夷部) : 오랑캐 음악.


[註 839]삼가(三加) : 관례 때 세 번 관(冠)을 갈아 씌우던 의식. 초가(初加)에는 입자(笠子)·단령(團領)·조아(條兒), 재가에는 사모(紗帽)·단령·각대(角帶), 삼가에는 복두(幞頭), 공복(公服)을 썼음.


[註 840]좌임(左衽) : 왼쪽으로 여미는 것.


[註 841]대뢰(大牢) : 나라 제사에 소·양·돼지를 아울러 제물로 바치는 일.


[註 842]초소(樵蘇) : 나무를 찍고 풀을 벰.


[註 843]홍범(洪範) : 중국 《서경(書經)》의 한 편. 기자(箕子)가 천지(天地)의 대법(大法)을 베풀어서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준 것.


[註 844]정주(程朱) :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註 845]천경 지위(天經地緯) : 만세에 변하지 않는 상리(常理).


[註 846]문선왕(文宣王) : 공자(孔子)의 존칭.


[註 847]둑신(纛神) : 군사에 관한 일을 주관하던 무(武)의 신(神).


[註 848]둑소(纛所) : 둑기(纛旗:대장기)를 세워 놓던 곳.


[註 849]유후(宥後) : 후대를 사유.


[註 850]세록(世祿) : 대대로 녹봉을 내림.


[註 851]음자(蔭子) : 음직(蔭職)을 받아 관직에 임명되던 문무관(文武官)의 후손.


[註 852]승음(承蔭) : 특별히 음관(蔭官)으로 임용(任用)함.


[註 853]《무경칠서(武經七書)》 : 중국의 7가지 병법에 관한 책. 《육도(六鞱)》, 《손자(孫子)》, 《오자(吳子)》, 《사마법(司馬法)》, 《황석공삼략(黃石公三略)》, 《위료자(尉繚子)》, 《이위공문대(李偉公問對)》를 말함.


[註 854]친자(親炙) : 친히 배우는 것.


[註 855]분전(墳典) : 3황(皇)·5제(帝)의 서(書). 곧 고전(古典)이란 뜻.


註 856]상역(象譯) : 번역.


[註 857]민섬(敏贍) : 빠르고 풍부한 것.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