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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일기 43---북경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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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1-04 19:59 조회1,794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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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 (월) 여행 1일차

<황제의 도시 북경으로!>

하얼빈은 오후4시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저녁6시 이미 깜깜한 밤이 되었다. 하얼빈 숙소를 나섰다. 3주간의 여행을 해야 하므로 짐을 최대한 간편하게 싸서 1인당 하나씩의 배낭을 짊어지도록 했다. 7:16분발 북경행 기차에 올랐다.



12월 13일 (화) 여행 2일차

<천안문광장, 자금성>

(12시간 걸려) 아침7시 북경역에 도착했다. 지하철을 타고 천안문광장에 갔다(북경에는 3개노선의 지하철 운행중). 날씨가 매우 차가워서 있는 옷을 다 꺼내 입었는데도 광장바람이 매우 거세었다.  천안문광장 한복판에 서서 뒤로 모택동기념관, 왼편으로 인민대회당, 오른편으로 국가박물관 건물을 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천안문으로 들어가 자금성(공식명칭 : 고궁박물원)을 관람했다. 현재의 북경 자금성은 1400년대 초 명 성조(3대) 영락제 시절에 조성된 궁궐이다. 명청시대에 사행길에 오르신 우리 가문의 김환, 김성, 김수동, 김주, 김첨, 김시헌, 김시양, 김회, 김자점, 김광국 등 수많은 선조님의 사행길이 닿은 곳이다.

<경산공원, 북해공원>

북문으로 나가서 경산공원에 들어섰다. 경산은 자금성 북문인 신무문 밖에 있는 표고 43미터의 낮은 산으로 옛날에는 황제와 황후의 산책로였다고 한다.  원나라때 궁중의 땔감인 석탄을 쌓아 놓았다 하여 매산(煤山)이라고도 하고, 또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뜻에서 만수산(萬壽山) 또는 만세산(萬歲山)이라도도 했다고 한다. 이 만세산에 광한전이 있었는데, 고려 공민왕때 원나라 태자가 고려사신 이공수를 광한전에 불러 보았다 하고, 고려 원종은 이 북경에 몸소 와서 만수산 옥전에서 황제(쿠빌라이)와 작별하였고, 또 고려사신 신사전은 만수산 옥전을 두루 구경했다고 했으니, 우리 가문의 충렬공을 비롯한 여러 선조들의 발길도 여기에 이르렀으리라...

명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자살나무를 찾아보았다. 그는 청나라 누루하치 군대가 아닌 반란군 이자성의 군대에 쫓기어 신하 한명만이 따라온 가운데 나무가지 하나에 목을 메었고. 어느 왕조나 마지막 황제는 비운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이후 수백년간 써내린 ‘崇禎기원후 三甲子’,,, 등등의 ‘崇禎’자 들어가는 연호의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조선중후기 우리 사신들이 북경에 도착하면 가장 가보고 싶고 가보아야 했던 곳이 바로 이 숭정제 자살현장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지식인의 조건으로 숭명배청주의가 근본이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 조정에서 이를 알고 조선 사신들의 경산나들이를 철저히 막았다고 한다.

<원 대도 터>

1200년대 중후반 원 세조 홀필열(쿠빌라이) 시절에 조성된 궁궐은 현재의 자금성이 아니고, 자금성 뒷산인 경산공원, 이웃하고 있는 북해공원부터 시작되어 북쪽으로 종루, 고루 넘어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 대도(칸빌리그) 구역이다.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자세히 서술한 곳이며, 우리 가문의 충렬공을 비롯하여 아들들(김흔, 김순), 손자들(김승용,김승택,김영돈, 김영후), 그리고 김제안 등 여러 선조들께서 다녀간 곳도 바로 이곳이다. 경산공원 뒤쪽으로 쿠빌라이가 직접 경작했다는 밭 터 표지가 있어 찾아갔으나 출입금지였다. 학교 운동장으로 조성 공사중이라고 했다. 북해공원에 들어가 거닐었다. 공사중인 곳이 많아 어수선하고 먼지바람이 불어댔다.

<번화가 왕푸징>

북경역 부근에 있는 유스호스텔에 짐을 풀어 놓고, 보행거리 왕푸징에 가서 번화가 밤거리를 거닐어 보았다. 유스호스텔에 돌아와 1층 여행사에 내일 만리장성 가는 표를 예약해 두었다.



12월 14일 (수) 여행 3일차

<만리장성 팔달령>

아침 7시반에 출발한 여행사 봉고차는 옛 북경대학을 지나고, 원나라 시대 고루와 종루를 거쳐, 두 시간을 더 가서야 만리장성 팔달령 구역에 들어섰다. 기온은 매우 차갑고, 바람이 어찌나 거세게 불어대는지 걷기가 곤란했다. 궤도차를 타고 올라갔다. 장성에 올라서자 바람이 더욱 세어서 팔만 벌려도 바람에 떠밀려 올라가졌다. 딸아이를 자주 살펴보아야 했다. 바람에 날아갈 듯했다. 추위에 손가락 움직이기 곤란했으나 그래도 열심히 눌러댔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했으니...

<명 13릉>

오후에는 명 13릉이라는 곳에 갔다. 명 황제 16명중에서 3대 영락제부터 13명의 황제의 릉이 모여있는 곳이다. 1대 홍무제(주원장)릉은 남경에, 2대, 7대 릉은 다른 곳에 있다고 했다.

<유리창, 북경어언대학 근처>

날이 금새 어두워졌다. 시내로 돌아와 택시를 잡아타고 북경의 골동품 거리 유리창 에 갔다. 이 유리창은 사행길 따라간 이들이 틈만 나면 찾아들어 소일했던 곳이다. 서책을 살 수 있을뿐만 아니라 중국의 식자들과 사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덕무, 홍대용, 김정희, 박지원 등은 매일처럼 이곳을 드나들며 필담으로 시를 짓고 학문을 나누었다고 한다. 초저녁인데도 가게들이 거의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한산한 거리를 걸어 보았다. 전체적인 규모도 생각보다는 작고 거의 현대화된 모습에 실망감만 가득했다.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학생 유학생들이 밀집되어 있는 북경어언대학 부근(오도구) 지구촌학원 옆 한국식당에 가서 삼겹살을 잔뜩 시켜놓고 며칠만에 포식을 했다. 북경어언대학 외국 유학생 3,000명중 한국 유학생이 반을 넘는다고 했다. 주변에는 코리아타운 모양으로 한국식당 들이 줄지어 있다.



12월 15일 (목) 여행 4일차

<천안문광장 오성홍기 게양식>

아침7시 동행자 K와 둘이서 택시를 잡아타고 천안문 광장에 갔다. 중국국기인 오성홍기 게양식을 보기 위해서. 매서운 아침추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조선시대 사행길 숙박소인 옥하관 자리>

천안문 광장을 다시한번 둘러본 다음, 지하철을 타고 수도호텔(수도대주점)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천안문광장 정문인 전문으로 이어지는 대로변에 있었다. 조선시대 사행들이 묵던 조선관인 옥하관 자리였고 1800년대에는 러시아영사관으로 쓰이다가 없어지고 현재는 호텔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명청시대 중국 사행길에 오르신 우리가문의 수많은 선조들께서 묵어가신 곳으로 특히 화산군(휘 주) 선조께서는 종계변무의 임무를 완수하시고 객사하신 곳이다. 현재는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대로변에는 수백년은 되었음직한 고목들이 길을 따라 건재하고 주변에는 러시아풍 건물들이 들어차 있다.

<이화원과 북경대학, 청화대학>

유스호스텔로 돌아가 가족을 데리고 이화원 구경을 갔다. 북경의 용산전자상가 라고 할수 있는 중관춘을 거쳐 청나라 조정의 여름 휴양지인 이화원에 도착했다. 얼음이 얼어 유람선을 탈수 없었지만 경관만은 대단했다. 청나라 말기 40년간 섭정하면서 권력을 휘둘렀다던 서태후 로 유명한 자희황후의 흔적도 많이 보였다. 서태후는 1908년에는 2살짜리 부의를 청나라 마지막 황제로 세웠으나 3년후 1911년에 손문 등이 신해혁명을 일으키며 청나라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이후 마지막 황제 부의는 1931년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면서 꼭두각시 황제가 되기도 하고, 러시아에 인질 비슷하게 끌려가기도 하고, 1949년 중국이 들어서면서는 10여 년의 긴 수용소 생활을 거쳐 1962년부터 북경에서 살다가 1960년대 말 비운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돌아나오는 길에 중국 최고의 대학인 북경대학 정문과 청화대학 정문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우리 말고도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북경어언대학 근처에 모여있는 한국식당 거리로 갔다. 마침 찾아든 식당이 개업식당이어서 공짜로 삼겹살 등 잔치음식으로 포식을 했다.



12월 16일 (금) 여행 5일차

<천단공원, 유리창>

아침7시 동행자 K와 둘이서 시내 구경을 나갔다. 서울의 원구단과 비슷한 천단공원을 구경하고, 유리창을 또 찾아가서 제법 큰 고서점에 들어가 1,2층을 모두 뒤져 보았으나 눈에 띄는 책이 없었다.

<왕푸징, 동천주당>

유스호스텔로 돌아와 체크아웃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시내 번화가인 왕푸징으로 나갔다. 코끼리 관광열차를 타고 왕푸징을 한바퀴 돌고나서(동탕, 로사기념관, 공왕푸, 송경령옛집), 동천주당을 찾아갔다. 입장불가로 내부는 볼수 없었다. 이곳은 소현세자, 봉림대군이 1644년 가을 70여일간 북경에 끌려와 있는 동안 자주찾던 곳으로 이들을 수행했던 우리 가문의 김번 선조님의 발길도 이어졌으리라 생각하며 둘러보았다.

<구 관상대>

서안가는 기차 시간이 많이 남았으므로 구 관상대를 찾아갔다. 이곳 관상대는 1200년대 말 원세조 홀필열(쿠빌라이)이 북경성 동남 모서리에 구축한 그대로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천문관측 시설은 국가기밀중의 기밀이어서 일반인 및 외국사신은 절대 출입불가지역 이었다 한다. 장영실도 세종의 명에 의해서 이곳에 선진지 견학을 와서 관람은 했으나 적거나 그리지 못하게 해서 눈으로만 보아 두었다가 귀국해서 수많은 과학기기를 만들어 내야 했다고 한다. 열하일기를 써 남긴 연암 박지원도 이곳 관상대에 오르려고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실패하고 주변에서 올려다 보다가 만 곳이었다. 이제는 시절이 바뀌어 우리는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물론 입장료는 내고) 관상대에 올라 뉘엿뉘엿하는 석양을 배경으로 천문기기를 일별하였다. 1층 전시관에도 천문관측시설이 꽤 전시되어 있는데 사진촬영은 할 수 없었다. 장영실, 이천 등과 함께 우리가문의 김돈 선조께서 참여하시어 만든 해시계인 앙부일귀와 비슷한 것들이 여기저기 많이 보였다.

<황하 유역 古都중의 고도 서안으로!>

서안행 기차를 타야 했으므로 북경역으로 갔다. 그런데 아뿔싸! 출발역이 북경역이 아니고 북경西역이었다. 시간은 거의 다 되었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서둘러 표를 물리고 서역으로 가기 위해서 택시를 타야 했으나 퇴근시간과 겹쳐서 택시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등허리로 식은 땀을 흘리며 1시간 가까이 헤매다가 가까스로 택시를 잡아타고 서역에 도착하여 밤 9시 서안행 기차에 올라탔다. ‘西’자 하나 소홀히 본 탓으로 시간과 돈 손해는 물론 식은 땀 꽤나 흘려야 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우리 문중 선조님들의 역사 행적을 떠올리며 다니는 중국여행기,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중국 사신으로 성절사로 다녀오신 감사공 김소(金素) 선조님도 계십니다.

솔내영환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영환
작성일

  그리운 얼굴!
곧 보게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