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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댁, 고모댁 (18)양간공(김승택)사위 광산김씨 김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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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1-05 15:54 조회1,7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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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간공(김승택)

1.김묘(상락군)-김구용,김제안, 김구덕

2.김면(안렴사공)-김구정(도평의공)

3.女 임경복-풍천임씨

4.女 김광재-광산김씨

5.女 유지정

 

 

김광재

 

양간공(김승택)의 첫째 사위 광산김씨 김광재의 아버지 快軒 文正公 金台鉉은초취부인 金儀의 따님에게서 金光軾을 낳았고

후취부인은  고려태조의 왕자 효은태자의 후손인王旦(일부 자료에는 丁旦이라고 했는데 이는 王자를 쓸 수 없어서 피휘한 것임)의

따님을 취하여 光轍, 光載, 광로, 를 두었다.

 

양간공의 사위인 김광재는 호는 松堂, 시호는 文簡公이며, 전리판서를 지냈다.

김광재는 거문고와 글씨에 능했으며 효자로서도 유명하다.

김광재의 아들 김興祖는 판군기감사를 지냈는데 외사촌(어머니의 친정조카)인 김제안등과 신돈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였고,

둘째는 무과에 급제하여 병사를 지낸 김順祖이며, 딸은 도평의사사를 지낸 朴門壽이다

김광재(金光載)
1289(충렬왕 15)∼1363(공민왕 12).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여(子輿), 호는 송당(松堂). 중찬(中贊) 태현(台鉉)의 아들이다.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 성균학관이 되고,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던 공로로 사복시승(司僕寺丞)에 승진, 이어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
1339년(충혜왕 복위 1) 조적(曺頔)이 난을 일으켰다가 복주된 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호종하였으며, 돌아와서 군부총랑(軍簿摠郎)이 되고, 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올랐다.
이듬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이군준(李君俊)과 함께 진사를 시취하였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 대신들이 아부하지 않는다고 모함,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전임되었으며, 이어 밀직부사·제조전선(提調銓選)을 지내고 지사사(知司事)에 승진하였다.
1349년 충정왕이 즉위하자 서연(書筵)의 설치와 함께 그 사부(師傅)가 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에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어 인사권을 맡았으나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정사에 간섭이 심하여 물러났는데, 뒤에 덕녕공주가 수차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1350년(충정왕 2)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는데, 이때 정방(政房)에서 문선(文選)과 무선(武選)을 총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이를 시정하도록 하였으며,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겸직하였다.
1351년 공민왕 즉위 후 12년간이나 은거하며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어머니가 죽자 여막에서 상을 마쳤으므로 왕이 가상히 여겨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 정표(旌表)하고 그 마을의 호(戶)일부에 부역과 조세를 면제하여 이를 봉사하게 하였다.
효제(孝悌)에 힘써 생산에는 관심이 없었고, 항상 금(琴)과 서(書)를 가까이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태현(金台鉉)
1261(원종 2)∼1330(충숙왕 1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불기(不器).
태조가 고려를 건국할 때 공을 세운 삼중대광사공(三重大匡司空) 길(吉)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원종 때 어사를 지낸 수(須)이고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주정(周鼎)의 조카이다.
10세 때에 아버지 수가 삼별초난의 토벌에 나섰다가 전사하였다. 고아가 되었으나, 학문에 힘써 1275년(충렬왕 1) 상서우승(尙書右丞) 이인성(李仁成)을 시관으로 한 국자감시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곧 이어 전시(殿試)에도 합격하여 좌우위참군 직문한서(左右衛參軍直文翰署)를 제수받고, 좌창별감 판응방사(左倉別監判鷹坊事)가 되었다.
얼마 뒤 판도총랑(版圖摠郎)이 되어 전주(銓注)를 맡았고, 우승지를 거쳐 밀직부사로 승진하면서 성절사(聖節使)의 임무를 띠고 원나라에 다녀왔다.
1303년에는 밀직사사로서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인 비서윤(祕書尹) 김우(金祐)와 함께 박리(朴理) 등 33인을 진사로 선발하였다. 충렬왕 말기에는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고, 지첨의사사(知僉議司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신하들이 분당하여 충렬왕과 충선왕을 이간시켜 국정이 매우 어지러웠으나,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난국을 수습하였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양광수길도계점사 행수주목사(楊廣水吉道計點使行水州牧使)가 되어 모범적으로 도내의 민호를 점검하였다.
그뒤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로서 파직되어 한거하다가, 1321년(충숙왕 8)에 첨의평리(僉議評理)로 복직하고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원나라에 의하여 충선왕은 토번(吐蕃)으로 귀양가고 충숙왕은 원나라에 억류되었으나, 그의 노력으로 국사가 잘 유지되었다.
그러나 충숙왕이 원나라의 억류에서 풀려나 관제를 개편할 때 파직되었다가, 이어 참의정승(參議政丞)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330년에 충혜왕의 청원으로 원나라가 국왕의 인(印)을 빼앗고 그로 하여금 임시로 국정을 맡게 하였는데, 충숙왕과 반대당의 무리들이 그를 불러 성인(省印:당시 고려국왕이 겸직하는 征東行中書省左丞相의 印)을 거두어가고 그와 윤석(尹碩)·원충(元忠) 등을 하옥시켰다. 그는 곧 옥에서 풀려났으나 이 일로 인해 가족을 이끌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고려내의 이러한 변화를 전해 들은 충혜왕이 사람을 보내어 다시 성인을 회수하게 하고 그를 불러 국정을 맡게 하였으나, 곧 죽고 말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언동이 예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사람을 접대할 때에는 온화하였고, 어머니를 모심에는 효를 극진히 하였다 한다.
일찍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문을 모아 《동국문감 東國文鑑》을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흥조(金興祖)
?∼1368(공민왕 1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문하시중 태현(台鉉)의 손자이며, 첨의평리(僉議評理) 광재(光載)의 아들이다. 재주가 뛰어나고 지조가 있어 군기감을 거쳐 수원·해주의 수령을 지냈다.
1361년 10월 10만의 홍건적이 쳐들어와 개성을 위협하자 수원부사로서 왕을 모시고 복주(福州:지금의 안동)까지 호종한 공으로 신축호종공신(辛丑扈從功臣)2등에 서훈되었다.
그러나 1368년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정(金精)·조사공(趙思恭)·유사의(兪思義)·김제안(金齊顔)·김구보(金龜寶)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살해하기로 한 모의가 누설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가 장류되는 도중 신돈이 보낸 자객에 의해 교살되었다.

 

김광철(金光轍)1
?∼1349(충정왕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광산. 호는 둔재(鈍齋).
아버지는 중찬(中贊) 태현(台鉉)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1344년(충목왕 즉위년) 6월에 서연(書筵)이 베풀어지자 지신사(知申事)로 시독(侍讀)하였고, 1347년 2월에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판사가 되어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였다.
그뒤 화평군(化平君)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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