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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05 (의성 사촌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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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4-14 23:37 조회1,9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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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05 (의성 사촌 의병)





안동김씨 족보 순절록에

도평의공(九鼎구정) 17대손인 金壽莢(김수협)은 義城 구봉산에서, 金壽聃(김수담)은 의성 황학산에서 義兵(의병)으로 倡義(창의)하여 1896년(고종33) 2월29일 순절하였고



안렴사공(士廉사렴) 14대손인 金俊(김준)은 大邱(대구)에서 의병대장으로 倡義(창의)하여 1910년(순종4) 6월15일 순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백범 金九 선생 외에

일제시대 항일독립운동을 하신 분으로



류관순, 조인원(조병옥 박사 부친)과 함께 천안 병천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제학공파)金九應

철원 출신 (?부사공파) 金喆會

충북 청원 강내 궁현리의 (익원공파)金在衡 등이 있고





괴산군지 등에

충북 괴산 소수면 수리 출신의 金相翊(김상익)과 그의 4남 金聲應(김성응), 그리고 金鏞應(김용응)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 의성군지 (1987)



바. 金士元(1539-1601)



< 전 략 >



云山 象鍾(김상종)은 서산 김흥락의 문인으로 의도가 준정하고 우량이 굉심했으며, 1896년 丙申년에 창의하여 의성 의병장으로 추대되고, 금성면 산운과 옥산면 황산에서 왜군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린 바 있다. 후에 파병조칙에 의거 융복을 거두고 61세로 서거했으며 독립유공자로 추서를 받았다.



左山 壽旭(김수욱)은 招募長(초모장), 권대직은 중군, 壽聃(김수담)은 先鋒長(선봉장), 壽莢(김수협)은 管餉長(관향장)으로 의성 의병을 주도한 바 있다.









제5절 한말 의병활동



구한말의 의병은 1895년 민비시해와 단발령 실시로 일어난 것이 제1기이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일어난 것이 제2기,

1907년 고종황제의 양위와 군대해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제3기의 의병운동으로 대별할 수가 있다.



의성의 의병활동은 구한말 의병활동의 제1기에 속하는 민비시해와 단발령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운동인데, 이 두가지 사건이 다같이 일본의 대한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반감은 열기가 자못 높았으므로 두드러진 군내의 활약상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모에 대한 원한을 갚고자 일어난 지방 유생들의 항일정신은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결연한 투쟁으로 나타났다. 점곡지방에서 일어난 운동이다.





의병장은 金象鍾(김상종), 초모장에 金壽旭(김수욱), 중군에 권대직, 선봉장에 金壽聃(김수담), 관향장에 金壽莢(김수협) 등이었다.



당시 이들은 모두가 전통적인 유가사상을 이어 받아서 경전을 공부하다가 을미면 (서기 1895)에 민비가 왜적에게 시해되자 이 소식을 늦게나마 전해듣고 분연히 궐기한 것이다.



이들은 우국일념으로 뭉쳐서 궐기하였을뿐 전혀 전투경험이 없고 장비마저 너무나 한심하여 정예화된 적군 앞에서 참패하고 점곡 일대에서 퇴각하여 옥산과 점곡을 접해 있는 황산으로 후퇴하였다.





이 곳은 점곡면 소재지에서 6km 가량 떨어진 동남쪽에 위치하는데 약 80도의 경사와 절벽을 이루는 곳으로 남천이 우측을 끼고 흐른다. 동편 산등은 완만하게 타고 오르면 차차 가파른 산세가 나타나면서 이끼낀 산성이 산 정상을 끼고 3km 가량 뻐쳤다. 경사 70도를 이루면서 석축산성이 경고하게 쌓여 있다.



비교적 지세를 유리하게 점유하여 항전을 기다렸으나 1896년 3월 29일 왜군과 접전했으나 그들의 구비된 화력 앞에서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패했으며, 金壽聃 金壽莢 등이 이곳에서 비분의 전사를 당하게 되었다.



비록 그들의 항전은 패전에 이르렀으나 본래부터 승산을 계획하고 나선 일이 아닌 순수 우국일념의 거사였다는 점에서 더욱 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 김태서 -

▣ 김영환 -

▣ 김정중 - 귀중한 자료 소개 감사드립니다

▣ 김항용 -

▣ 김태헌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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