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 (23)기구한 젊은 때(12) - 두 번의 아슬아슬한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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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1-12 11:05 조회1,514회 댓글0건본문
밤이 초경이 되어서 밖에서 여러 사람이 떠들석하고 가까이 오는 인기척이 나더니 옥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옳지, 인제 때가 왔구나'
하고 올 것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한 방에 있는 죄수들은 제가 죽으러 나가기나 하는 것처럼 모두 낯색이 변하고 덜덜 떨고들 있었다. 이때에 문밖에서,
"창수, 어느 방에 있소?"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 방이오"
하는 내 대답은 듣는 것 같지도 않고, 방문도 열기 전부터 어떤 소리가,
"아이구, 이제는 창수 살았소! 아이구, 감리 영감과 전 서원과 각청 직원이 아침부터 밥 한 술 못먹고 끌탕만 하고 있었소. 창수를 어찌 차마 우리 손으로 죽이느냐고. 그랬더니 지금 대군주 폐하께옵서 대청에서 감리 영감을 불러 곕시고, 김창수 사형은 정지하랍신 친칙을 받잡고 밤이라도 옥에 내러가 김창수에게 전지(傳旨)하여 주랍신 분부를 듣고 왔소. 오늘 얼마나 상심하였소?"
하고 관속들은 친동기가 죽기를 면하기나 한 것처럼 기뻐하였다. 이것이 병신년 윤 8월 26일이었다. 뒤에 알고 보니 내가 사형을 면하고 살아난 데는 두 번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러하였다.
법부대신이 내 이름과 함께 몇 사형 죄인의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삼감의 칙재를 받았다. 상감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 때에 입직하였던 승지 중에 하나가 내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 )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어전에 나아가 임금께 뵈인즉, 상감께서는 즉시 어전 회의를 여시와 내 사형을 정지하기로 결정하시고 곧 인천 감리 이재정을 전화로 부르신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 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나는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이 되었을 것이니, 이것이 첫째로 이상한 인연이었다.
둘째로는 전화가 인천에 통하게 된 것이 바로 내게 관한 전화가 오기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아니 되었던들 아무리 우으로서 나를 살리려 하셨더라도 그 은명(恩命)이 오기 전에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감리서 주사가 뒤이어 찾아와서 하는 말에 의하면 내가 사형을 당하기로 작정되었던 날 인천항 내 서른 두 물상 객주들이 통문(通文)을 돌려서 매호에 한 사람 이상 우각동에 김창수 처형 구경을 가되 각기 엽전 한 냥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모아서 김창수의 몸값을 삼자, 만일 그것만으로 안 되거든 부족액은 서른 두 객주가 담당하자고 작정하였더라고 한다. 감리서 주사는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고 끝으로,
"아무러나 김 석사, 이제는 천행으로 살아났소. 며칠 안으로 궐내에서 은명이 계실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계시오"
하고 갔다.
이제는 다들 내가 분명히 사형을 면한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상설(霜雪)이 날리다가 갑자기 춘풍이 부는 것과 같다. 옥문이 열리는 소리에 벌벌 떨고 있던 죄수들은 내게 전하는 이러한 소식들을 듣고 좋아서 죽을 지경인 모양이었다. 신골 방망이로 착고를 두드리며 온갖 노래를 다 부르고 청바지 저고리 짜리들이 얼씨구나 좋을씨구 춤을 춘다, 익살을 부린다, 마치 푸른 옷을 입은 배우들의 연극장을 지어낸 듯하였다.
죄수들은 내가 그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태연자약한 것은 이렇게 무사하게 될 줄을 미리 알았던 것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하고, 나를 이인(異人)이라 하여 앞날 일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들 떠들었다. 더구나 어머님은 갑꼬지(갑곶) 바다에서 내가 '안 죽습니다' 하던 말을 기억하시고 내가 무엇을 아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시는 모양이요, 아버님도 그런 생각을 가지시는 것 같았다.
대군주(大君主)의 칙령으로 김창수의 사형이 정지되었다는 소문이 전파되자 전일에 영결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조상이 아니요, 치하하러 왔다. 하도 면회인이 많으므로 나는 옥문 안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몇 날 동안 응접을 하였다. 전에는 다만 나의 젊은 의기를 애석히 여기는 것뿐이었거니와, 칙명으로 사형이 정지되는 것을 보고는 미구에 우으로서 소명(召命)이 내려서 내가 영귀(榮貴)하게 되리라고 짐작하고 벌써부터 내게 아첨하는 사람조차 생기게 되었다. 이런 일은 일반 사람들만 아니라 관리 중에도 있었다.
하루는 감리서 주사가 의복 한 벌을 가지고 와서 내게 주고 말하기를, 이것은 병마우후 김주경(兵馬虞侯 金周卿)이라는 강화 사람이 감리 사또에게 청하여 전하는 것인즉, 이 옷을 갈아입고 있다가 그 김주경이 오거든 만나라고 하였다.
이윽고 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나이는 사십이나 되어 보이고, 면목이 단단하게 생겼다. 만나서 별말이 없고 다만,
"고생이나 잘 하시오. 나는 김주경이오"
하고는 돌아갔다.
어머니께서 저녁밥을 가지고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김 우후가 아버님을 찾아서 부모님 양주의 옷감과 용처(用處)에 보태라고 돈 2백 냥을 두고 가며 열흘 후에 또 오마고 하였다 한다. 이 말 끝에 어머니는,
"네가 보니 그 양반이 어떻더냐. 밖에서 듣기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구나"
하시기로 나는,
"사람을 한 번 보고 어찌 잘 알 수 있습니까마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은 고맙습니다"
하였다.
김주경에게 내 일을 알린 것은 인천옥에 사령 반수로 있는 최덕만(崔德萬)이었다. 최덕만은 본래 김의 집 비부였었다. 김주경의 자는 경득이니, 강화의 아전의 자식이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뒤에 대원군이 강화에 3천 명의 무사를 양성하고 섬 주위를 두루 포루(砲樓)를 쌓아 국방 영문을 세울 때에 포량고지기 - 군량을 둔 창고를 지키는 소임 - 가 된 것이 그의 출세의 시초였다. 그는 성품이 호방하여 초립동이 시절에도 글읽기를 싫어하고 투전을 일삼았다.
한 번은 그 부모가 그를 징계하기 위하여 며칠 동안 광 속에 가두었더니, 들어갈 때에 그는 투전목 하나를 감추어 가지고 들어가서 거기 갇혀 있는 동안에 투전에 대한 여러 가지 묘법을 터득하여 가지고 나와서 투전목을 여러 만 개 만들되 투전짝마다 저는 알 수 있는 표를 하였다.
이 투전목을 강화도 안에 있는 여러 포구에 분배하여 뱃사람들에게 팔게 하고 자기는 이 배 저 배로 돌아다니면서 투전을 하였다. 어느 배에서나 쓰는 투전목은 다 김주경이가 만든 것이라, 그는 투전짝의 표를 보아 알기 때문에 얼마 아니 하여서 수십 만 냥의 돈을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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