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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외갓댁 고모댁(20) 곽원진 신도비에 나타난 안동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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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6-01-20 22:28 조회1,5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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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원문은 발용 대부님과 주회 대부님께서 이미 올리신 바 있습니다.
근세(조선조 순종)에 찬술된 것인데 왜 오류가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래 한글 비문은 <네이버 포산곽씨>에 실린 <새 文憲公神道碑文>으로 근래에 다시 찬술되었나 봅니다.

곽원진신도비 郭元振神道碑

高麗 成均館 祭酒 進賢館 大提學 苞山君 溢文憲 石川 郭先生 神道裨銘并序

故麗朝名臣成均館祭酒進賢館大提學郭公衣履之藏在陽智縣今屬龍仁東南三十里大德山西麓面申之原舀之若堂若斧其初禮葬也隧道宜有刻而尙闕爲或者當時未遑耶年久而湮於草萊耶凡裔於公者皆恨之曰子姓之蕃庶殆滿萬計莫非公德蔭攸庇山無片石何以詔後曾祖諱基正吏部尙書苞山伯謚靖簡祖諱膺門下成事考密直副使諱敦孝聘安東金氏主簿之門生公公之名大而遠謹按麗史忠烈王朝以總即奉使如元忠宣王朝爲左代言大東韻玉曰集賢提學輿地勝覽曰成均館祭酒通憲大夫進賢館提學東史寶鑑曰進賢館大提學苞山君此其從政之大槩也名臣錄曰潛究性理演鮮六經其學術之精深可知矣忠肅王朝賜謚以文憲命㫌以忠孝其文行之超邁可知矣金潛谷類苑叢寶曰郭其喜施與年十六居太學有一士人貧甚父祖以上五世未葬來乞助公與之無吝不質名氏其器度之寬洪又如此顧何敢妄加一字自速溢美之譏哉公凡三娶咸受郡夫人封白川趙氏評理雲卿女墓失護仁同張氏別將元佑女墓合祔陽川許氏文華女墓失護二男長忠貫太中大夫尙書左丞娶安東金氏樂安君之謙次忠敬兵部尙書二女長適密直副使安東金蔵有四子曰士謙士廉士安士衡俱躋淸顯次適係勝即全州崔佺有子曰正臣中即將忠貫男郛推忠翊戴功臣壁上三諱三重大匡守司徒都僉議事苞山君謚忠簡以忠孝㫌閭娶順興安氏文順公遷女寔又成公裕之孫也擧四男居仁典理判書游義游禮并典工判書游信工部典書以下代不乏賢享院者十二府使都監司湖司諫宗元掌令宗藩執義潮哲佐即期壽僉正興懋生員瀚應敎天衢僉樞維藩僉奉叅士人后泰立殣者八司直舜成進士壽岑防禦使嶸郡守崘承旨邦有郁都事載祥士人仁孫康華榮勳者十四節度使自安習讀連城主簿好禮佐即仁居府使邦鍵宣傳官宗文郡守止善主簿應龍佐即崟通德即次城郡守司直信章知樞千重通德即後天敵愾有主簿鎭邦獻納聖龜遺逸有叅奉世平處士㟳文學有校理天豪察訪致堯生員鳳齡孝行蒙贈㫌者多不勝記是知培塿不生松柏汚泥不產珠璧玆蓋公裕昆之謨有以啓之也公之不朽自足以并耀三光於揄揚乎何有略掇其遺芬一二謹三齋七沐而係之銘曰忠爲根孝爲源行特於百國有乘野有史名互乎億馬鬣一坏瑞雲長冪龜頭三尺藍風不剝行者式而過曰彼大德山之阡是大賢人之宅

      後孫通訓大夫弘文館校理知 製誥 璨謹撰
           後孫              泳敏篆
      後學通政大夫原任 奎章閣直閣延安李義國書

位土朴谷里二三七垈一千三十坪
  丙舍八間
  田畓并二千六百十五坪
  山林二筆二萬三千五百二十坪
    柏峰七六三畓一千一百七十七坪

純宗丙寅嘉俳立

① 金熙 - 후김 金宣平 → 習敦 → 呂基 → 南秀 → 熙 → 資
현풍곽씨에서는 金熙之로 보는 듯합니다. 金熙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으나 좀더 확인해야 할 사항인 듯합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현풍곽씨 족보 기록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② 金之謙 - 樂安人
신도비 원문에 안동김씨로 적은 것은 오류.
낙안김씨 족보 기록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낙안김씨> - 출처 : 성씨 소개 중에서
신라 경순왕의 셋째 아들 영분공 김명종(金鳴鍾)의 후손에서 분적한 낙안김씨(落安金氏)는 시조 김수징(金粹澄)이 고려 명종 때 국난을 평정한 공으로 낙안군(落安君)에 봉해졌다. 그리 하여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낙안을 본관으로 삼아 경주김씨에서 분적하였다. 명문의 전통을 자랑하는 낙안김씨는 수징(粹澄)의 둘째아들 광습(光襲)이 명종과 신종 때에 금오위 대장군(종3품), 검교 대장 등을 지내고 좌승상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윤견(允堅)은 이부상서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윤견의 차남 지겸(之謙)은 충렬왕 때 문하평리를 지내고 낙안군(落安君)에 봉해졌으며, 삼남 남정(南正)은 충목왕 때 병부상서를 지내고 대제학(정2품)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다. 한편 남정(南正)의 아들 규(糾)는 예문관의 정3품 벼슬인 제학을 역임했고, 차남 수(隨)는 문하시중에 올라 낙천군(洛川君)에 봉해졌으며 문예(文藝)에 뛰어났다.

③ 선김 휘 方慶 → 愃 → 資
          휘 方慶 → 恂 → 永煦 → 蕆 → 士謙, 士廉, 士安, 士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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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文憲公神道碑文(문헌공신도비문)

출처 - 네이버 포산곽씨
http://cafe.naver.com/raychell.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04

옛 高麗朝(고려조) 名臣(명신) “成均館祭酒”(성균관제주) “進賢館大提學”(진현관대제학) 郭公(곽공)의 墓(묘)는 陽智懸(양지현)<지금의 龍仁(용인)에 속함>東南(동남)쪽 30里(리) 大德山(대덕산) 西(서)쪽 기슭 申(신)<西南西(서남서)>方(방)을 向(향)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담하여 빼어난 明堂(명당)과 같은 形狀(형상)이기도 하다. 처음 禮葬(예장)했을 때 마땅히 碑文(비문)이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없으니 혹 當時(당시)에 驚惶(경황)이 없어서 그랬는지. 歲月(세월)이 오래되어 雜草(잡초)에 묻혔는지. 公(공)의 後裔(후예)들이 이를 恨(한)스럽게 여겨 이르기를 “子孫(자손)이 蕃盛(번성)하여 萬計(만계)를 가득 채우는 것은 公(공)의 蔭德(음덕)임에도 不拘(불구)하고 山(산)에는 한 조각의 碑石(비석)도 없으니 어찌 後孫(후손)을 가르치겠는가”하고 마침내는 碑石(비석)을 세워 不肖(불초)한 내가 적고자 한다.

嗚呼(오호)라 墓文(묘문)은 阿諛(아유)함을 賤(천)하게 여기고 事實(사실)을 貴(귀)하게 여기는 것이라. 事實(사실)을 따르고자 하니 生卒(생졸)이 分明(분명)하지 않고 履歷(이력)은 詳細(상세)히 考察(고찰)하기에 不足(부족)하며 阿諂(아첨)을 쫓으면 없는 것을 억지로 끌어대야 하니. 내가 不肖(불초)하여 公(공)을 위해 이 붓을 드는 것이 眞實(진실)로 어려우나 그만두지 않을 진데 차라리 簡略(간략)하게 적고자 할 따름이다.

公(공)의 諱(휘)는 元振(원진)이시고 號(호)는 石川(석천)이시며 玄風(현풍)에서 나셨다. 玄風(현풍)의 옛 이름은 苞山(포산)이다. 上祖(상조) 苞山君(포산군)의 諱(휘)는 鏡(경)이시며 本來(본래) 中國(중국)분으로 中國勢力下(중국세력하)에 있던 高麗國(고려국)에 벼슬하러 나오셔서 “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平章事”(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내셨고 封邑(봉읍)을 “苞山”(포산)으로 받아 이를 本貫(본관)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公德(공덕)이 이어져 마침내 東方(동방)의 名望(명망)높은 家門(가문)이 되었다.

曾祖父(증조부)의 諱(휘)는 基正(기정)이시며. ‘吏部尙書’(이부상서)를 지내셨고 ‘苞山伯’(포산백)으로 受封(수봉)되셨으며. ‘諡號’(시호)는 “靖簡”(정간)이시다. 祖父(조부)의 諱(휘)는 膺(응)이시고 ‘門下贊成事’(문하찬성사)를 지내셨다. 考(고)의 諱(휘)는 敦孝(돈효)이시며 ‘密直副使’(밀직부사)를 지내셧고. 安東金氏(안동김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主簿(주부) 金熙之(김희지)의 집에서 公(공)을 낳으셨다. 公(공)은 그 名聲(명성)이 크게 뛰어나 삼가 高麗史(고려사)에 의거 살펴본다.

公(공)은 忠烈王(충열왕) 7年(년) 辛巳(신사) 1281年 12歲(세)의 少年(소년)으로 ‘明經文科’(명경문과)에 “壯元及第”(장원급제)하시었으며 同(동) 王朝 (왕조)에 ‘摠郞奉使’(총랑봉사)로 元(원)나라에 다녀오셨고 忠宣王朝(충선왕조)에 ‘左代言’(좌대언)이 되셨다. ‘大東韻玉’(대동운옥)에 “集賢提學”(집현제학)이라 하였고  ‘與地勝覽’(여지승람)에 “成均館祭酒通憲大夫進賢館提學”(성균관제주통헌대부진현관제학)이라 하였으며. ‘東史寶鑑’(동사보감)에 “進賢館大提學苞山君”(진현관대제학포산군)이라 하였으니 以上(이상)이 公(공)의 主要(주요) 官歷(관력)이시다.

‘名臣錄’(명신록)에 ‘性理學’(성리학)을 깊이 探究(탐구)하시고. 六徑(육경)을 깊이 演解(연해)하였다 하였으니 그 學問(학문)의 深奧精緻(심오정치)함을 알 수 있다. 忠肅王朝(충숙왕조)에 “文憲”(문헌)이라는 ‘諡號’(시호)를 下賜(하사)받으셨고 “忠孝”(충효)의 “旌門”(정문)도 받으셨으니. 그 學問(학문)과 行實(행실)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金潛谷(김잠곡)의 ‘類苑叢寶’(유원총보)에 “郭某(곽모)는 베풀기를 좋아하여 16歲(세)에 太學(태학)에 居(거)할 때 한 선비가 몹시 가난하여 그의 父祖(부조) 以上(이상) 五歲(세)를 葬事(장사)지내지 못하였으므로 와서 도움을 구하자 公(공)이 아낌없이 주면서도 姓名(성명)을 묻지 않았다” 하였다. 公(공)의 人品(인품)과 度量(도량)이 이와 같이 크고 寬厚(관후)하였으니 어찌 감히 한 글자라도 妄靈(망령)되이 加筆(가필)하여 지나치게 美化(미화)하였다는 非難(비난)을 自招(자초)할 수 있겠는가.

公(공)은 三娶(삼취)를 하시였는데 모두 “郡夫人”(군부인)에 封(봉)해졌다. 初配(초배)는 ‘白川趙氏’(백천조씨) 評理(평리) 趙雲卿(조운경)의 따님으로 그 墓(묘)는 失傳(실전)되었고 ‘仁同張氏’(인동장씨) 別將(별장) 張元佑(장원우)의 따님은 그 墓(묘)를 合窆(합폄)하였으며. ‘陽川許氏’(양천허씨) 許文華(허문화)의 따님도 그 墓(묘)를 지키지 못하였다.

아들 둘을 두셨는데 장자(長子) ‘忠寬’(충관)은 “太中大夫尙書左丞”(태중대부상서좌승)을 지냈고  ‘安東金氏’(안동김씨) 樂安君(낙안군) 金之謙(김지겸)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다. 次子(차자) ‘忠敬’(충경)은 “兵部尙書”(병부상서)를 지냈다. 딸 둘을 두셨는데 長女(장녀)는 ‘安東金氏’(안동김씨) 密直副使(밀직부사) 金蕆(김천)에게 시집가서 아들 士謙(사겸). 士廉(사염). 士安(사안). 士衡(사형), 넷을 두었는데 모두 淸官(청관) 顯職(현직)에 올랐다. 次女(차녀)는 全州(전주) 崔氏(최씨) ‘保勝郞’(보승랑) 崔佺(최전)에게 시집가서 아들 ‘正臣’(정신)을 두었는데 ‘中郞將’(중랑장)이 되었다.

忠貫(충관)의 아들 ‘郛’(부)는 忠肅王朝(충숙왕조)에 “推忠翊戴(추충익대) 佐理功臣(좌리공신) 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徒都僉議事”(벽상삼한삼중대광수사도도첨의사)를 지냈고 “苞山君”(포산군)으로 ‘襲封’(습봉)되었으며 ‘諡號’(시호)는 “忠簡”(충간)이시고. ‘忠孝’(충효)의 ‘旌門’(정문)을 下賜(하사)받았다. 順興安氏(순흥안씨) 文順公(문순공) 安遷(안천)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이 분이 文成公(문성공) 裕(유)의 孫女(손녀)이시다. 모두 네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長子(장자) ‘居仁’(거인)은 “典理判書”(전리판서)를 次子(차자) ‘游義’(유의). 三子(삼자) ‘遊禮’(유예)는 모두 “典工判書”(전공판서)를 季子(계자) ‘游信’(유신)은 “工部判書”(공부판서)를 各各(각각) 지냈다.

그 後孫(후손) 가운제에는 어진 분이 적지 않으니 ‘亨院’(형원)한 분이 府使(부사) 都(도), 監司(감사) 湖(호), 司諫(사간) 宗元(종원), 掌令(장령) 宗藩(종번), 執義(집의) 漢哲(한철), 佐郞(좌랑) 期壽(기수), 僉正(첨정) 興懋(흥무), 生員(생원) 瀚(한), 應敎(응교) 天衢(천구), 僉樞(첨추) 維藩(유번), 參奉(참봉) 山晉 (진)·,  士人(사인) 后泰(후태)등 열두분이고. ‘立殣’(입근)한 분<節義(절의)를 지켜 목숨을 버린 분>이 司直(사직) 受成(수성), 進士(진사) 壽岑(수잠), 防禦使(방어사) 嶸(영), 郡守(군수) 崙(윤), 承旨(승지) 邦郁(방욱), 都事(도사) 載祥(재상), 士人(사인) 仁孫(인손)· 康華(강화)등 여덟분이고. ‘策勳(책훈)된 분<功勳(공훈)이 史書(사서)에 기록된 분>이 節度使(절도사) 自安(자안), 習讀(습독) 連城(연성), 主簿(주부) 好禮(호례), 佐郞(좌랑) 仁居(인거), 府使(부사) 邦鍵(방건), 宣傳官(선전관) 宗文(종문), 郡守(군수) 止善(지선), 主簿(주부) 應龍(응용), 佐郞(좌랑) 崟(음), 通德郞(통덕랑) 次城(차성), 郡守(군수) 亻冏 (경), 司 直 (사 직 )  信章(신장), 知樞(지추) 千重(천중), 通德郞(통덕랑) 後天(후천)등 열네분이고. ‘敵愾’(적개)한 분<나라의 怨讐(원수)에 對抗(대항)한 분>으로는 主簿(주부) 鎭邦(진방), 獻納(헌납) 聖龜(성구)가 있고. ‘遺逸’(유일)한 분<벼슬을 버리고 隱居(은거)한 분>으로는 參奉(참봉) 世平(세평), 處士(처사) 山+票(진)등이 있고. ‘文學’(문학)<文章(문장)으로 有名(유명)한 분>으로는 校理(교리) 天豪(천호), 察訪(찰방) 致堯(치요), 生員(생원) 鳳齡(봉령)이 있다.

“孝行”(효행)으로 “旌門”(정문)을 下賜(하사)받은 분은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러한 事實(사실)로 미루어 보아 작은 언덕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지 않고 더러운 진흙탕에서는 아름다운 玉(옥)이 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公(공)이 본보기가 되어 後孫(후손)을 바르게 가르쳐 引導(인도)해준 때문이리라.

公(공)의 不朽(불후)함은 하늘의 三光(삼광)의 빛과 나란히 할만 할 진대. 어찌 그 남긴 香氣(향기)한 둘만 簡略(간략)학게 역어 놓겠는가. 삼가 세 번 齊戒(제계)하고 일곱 번 沐浴(목욕)하여 銘(명)을 지어 가로되 忠(충)과 孝(효)를 根源(근원)으로 한 公(공)의 行蹟(행적)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며 國史(국사)와 野史(야사)에서도 그 이름이 億萬年(억만년)에 걸쳐 길이 빛날 것이로다. 말갈기 같은 封墳(봉분)위에는 祥瑞(상서)로운 구름이 늘 뒤덮혀 있고 龜頭(귀두)는 세 자(尺)나 되어 藍風(남풍)이 깍아내지 못하네. 나그네가 절하고 지나가며 가로되 저 곳은 大德山(대덕산)의 줄기요 이곳은 大(대) 賢人(현인)의 집이라고 하도다.

  原碑文 : 純宗丙寅(순종병인) 嘉排立(가배립) 1926年
           後孫(후손) 通訓大夫弘文館校理(통훈대부홍문관교리)知 製誥(재고) 璨(찬) 謹撰(근찬)
  新碑文 : 東國大學校(동국대학교) 敎授(교수)
            文學博士(문학박사) 韓容洙(한용수) 謹撰(근찬)
           後孫후손) 22代 瑞欽 前面碑文謹書(전면비문근서)
           再建立 推進委員長(재건립 추진위원장) 炳起

文憲公 諱 元振祖 世系表
始祖    2世   3世   4世     5世    6世    7世     8世
諱· 鏡-- 憲 -- 琳 -- 演 -- 基正 -- 膺 -- 敦孝 --元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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