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안동김씨 정려 (익원공파 적-壽卿수경-沂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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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4-16 16:47 조회2,162회 댓글0건본문
강릉 안동김씨 정려 (익원공파 적-壽卿수경-沂기)
요즈음 지나간 대종회보를 읽어보고 있습니다.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66호 (1999년 10월)에 실린 익원공파인 金 (김적) 후손들의 집성촌인 강릉에 있는 [안동김씨 정려]에 대한 기사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 종중소식- 강릉종친회 이사회의 개최
지난 5월 1일 대종회 정기총회시 백범 선생의 기념관 건립추진 안내를 듣고 강릉종친회에서는 7월 19일 이사회를 개최하여 이에 취지를 설명하고 협찬을 구한바 너나없이 한 장의 벽돌이라도 보태자며 자진 성금한 것이 백여만원이 모금되었으며
오는 12월 25일은 강릉종친회 정기총회 날이어서 이날도 이 이상의 모금이 되리라고 믿어 강릉종친회 회장을 비롯 집행부에서는 희망이 가득하다 한다.
여기 강릉종친회는 익원공의 증손 목사공 휘 (적)의 후손들의 집성촌이다. 그중에도 목사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증호조판서 영안군 휘壽卿의 손들이며,
영안군의 3자 주부공 휘沂(기)께서 이곳으로 낙향하시어 증손 대에서부터 3대에 걸쳐 3孝2烈이 배출된 예본가문들이다. 3효2열의 정려는 강릉시내 사임당 사당 가는 길 초에 위치하고 있다.
제공 강릉종친회장 榮燉(영돈)
▣ 문화유적총람 (문화재연구소)
【유적명칭】안동 김씨 정려(安東金氏旌閭)
【관리번호】210-102-225-040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충효비(정려)
【소 재 지】강원도 강릉시 교2동
【시 대】<시대 미상>
【관 리 자】
【유적내용】
안동 김씨 김몽상의 효자비와 그의 처 강릉 김씨의 열녀비,
김몽상의 아들 김석진의 효자비와 그의 처 강릉 최씨의 열녀비,
그리고 김석진의 아들 김구의 효자비가 보존되어 있어
소위 "삼세 삼효 이열(三世三孝二烈)"의 효열각이다.
김몽상은 충열공 김방경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겼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는 죽으로 연명하면서 3년을 시묘하였다.
두 번째는 김몽상의 처 강릉 김씨의 열녀비로, 김씨는 부모를 지성으로 섬겼으며, 남편의 병이 위독해 지자 손가락을 잘라 생혈을 마시게 하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남편의 상을 당하여는 예를 다하여 3년상을 치루었으며, 그 후 23년 동안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여 머리와 얼굴을 단장하지 아니하고 대문 밖을 나가지 아니하였고, 병이 들어 위독해지도록 약을 한첩도 먹지 않고 죽었다.
세 번째는 김석진의 효자비로, 김석진은 천성이 온화하고 공손하여 부모에 대한 효경이 뛰어 났다. 부모의 병환에 상분(嘗糞)으로 간병하였으며,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지 않았고, 죽을 먹으며 행실을 삼가하였다. 모친이 병석에 있는 20여년 동안 한결같이 이렇게 하였다.
네 번째는 김석진의 처 강릉 최씨의 열녀비로, 최씨는 천성이 현숙하고 부덕을 갖추었으며, 시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남편이 병으로 위독하자 그는 하늘에 빌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케 하였다.
다섯 번째는 김구의 효자비로, 어려서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죽으로 연명하면서 3년을 시묘하였다. 후일 부친상을 당해서도 이와같이 함은 물론 거상이 끝난 후에도 쌀밥을 먹지 아니하였고, 비단옷도 고치치 아니하였다.
이와 같은 3효 2열의 행동이 조정에 알려져 순조 7년(1807) 정려가 내려졌다.
현재 비각의 전면에는 "안동 김씨 삼세(安東金氏三世)", "삼효 이열지려(三孝二烈之閭)"의 현판이 게판되어 있고,
비각 내에는 "효열각 행적기(孝烈閣行蹟記)"와 "안동 김씨 효열각 중수기(安東金氏孝烈閣重修記)"가 게판되어 있다.
【참고문헌】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강릉의 역사와 문화유적>>;<<임영의 맥>>
【비 고】
▣ 디지털한국학
김수경(金壽卿)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양한재(養閑齋). 반정을 전후하여 한때 수정(壽正)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다시 수경으로 고쳤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적(#적21), 영의정 수동(壽童)의 동생이다.
1482년(성종 13) 성균관유생으로서 원각사(圓覺寺)의 중들과 충돌한 죄로 장형을 받았고, 1495년(연산군 1) 돌아간 선왕의 명복을빌기 위한 불사(佛事)를 반대하다가 장배(杖配)당하기도 했다.
후에 풀려나와 1498년 사평(司評)이 되었다가 공조좌랑으로 옮겼으며, 1506년 병조참지에 올랐다.
그해 박원종(朴元宗) 등에 의해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형인 수동의 뒤를 따라 반정군에 가담하여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영안군(永安君)에 책봉되었으나,
연산군 말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단상(短喪)으로 끝내고 이조판서 임사홍(任士洪)에게 구걸하여 벼슬을 얻은 데다 상중에도 조금도 근신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 홍문관부제학 이윤(李胤)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뒤 마전군수(麻田郡守) 등의 외직을 거쳤고, 1519년(중종 14) 영흥부사가 되었으나 그해 조광조(趙光祖) 등이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할 때 녹훈이 지나쳤다고 지적되어 훈적(勳籍)에서 삭제되고 녹권이 박탈되었다가 기묘사화 후에 복직되었다.
그뒤 장단·연안의 부사를 거쳐 1523년 이천부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燃藜室記述. 〈鄭萬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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