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27)방랑의 길-2- 감옥 친구들을 찾아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6-01-29 09:46 조회1,812회 댓글2건본문
2. 감옥 친구들을 찾아
내가 영희궁을 찾아간 것은 황혼이었다. 진 오위장은 마루 끝에 나와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아이구머니, 이게 누구요?"
하고 버선발로 마당에 뛰어내려와서 내게 매어달렸다. 그리고 내 손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서 내가 나온 곡절을 듣고는 일변 식구들을 불러서 내게 인사를 시키고, 일변 사람을 보내어 예전 공범들을 청해왔다. 그들은 내 행색이 수상하다 하여 '나는 갓을 사오리다', '나는 망건을 사오겠소', '나는 두루마기를 내리다' 하여 한 사람이 한 가지씩 추렴을 모아서 나는 3,4년 만에 의관을 하고 나니 저절로 눈물이 떨어졌다. 이렇게 나는 날마다 진 오위장 일파와 모여 놀며 며칠을 유련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조덕근을 두 번이나 찾아갔으나, 이 핑계 저 핑계하고 나를 따로 만나주지 아니하였다. 중되인인 나를 아는 체하는 것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진 오위장 집에서 잘 먹고, 잘 놀고 수일을 쉬어서 여러 사람이 모아주는 노잣돈을 한 짐 잔뜩 걸머지고 삼남 구경을 떠나노라고 동작이 나루를 건넜다. 그 때에 내 심회가 심히 울적하여 승방뜰이라는 데서부터 술 먹기를 시작하여 매일 장취로 비틀거리며 걷는 길이 수원, 오산(烏山)장에 다다랐을 때에 벌써 한 짐 돈을 다 써 버리고 말았다.
나는 오산장에서 서쪽으로 가서 있는 김 삼척(金三陟)의 집을 찾기로 하였다. 주인은 삼척 영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아들이 6형제가 있는데 그 중에 맏아들인 김동훈이 인천항에서 장사를 하다가 실패한 관계로 인천옥에서 월여나 고생을 할 때에 나와 절친하게 되었었다. 그가 옥에서 나올 때 내 손을 잡고 꼭 후일에 서로 만나기를 약속한 것이었다. 나는 김 삼척 집에서 대환영을 받아서 그 아들 6형제로 더불어 밤낮으로 술을 먹고 소리를 하고 며칠을 놀다가 노자까지 얻어 가지고 또 길을 떠났다.
강경에 공종렬(孔鍾烈)을 찾으니, 그도 인천옥에서 사귄 사람으로서 그 어머니도 옥에 면회하러 왔을 때에 알았으므로 많은 우대를 받고 공종렬의 소개로 그의 매부 진 선전(陳宣傳)을 전라도 무주에 찾은 후, 나는 이왕 삼남에 왔던 길이니, 남원에 김형진을 찾아보리라 하고 이동(耳洞)을 찾아갔다. 동네 사람 말이 김형진의 집이 과연 대대로 이 동네에 살았으나 연전에 김형진이 동학에 들어서 가족을 끌고 도망한 후로는 소식이 없다고 한다. 나는 대단히 섭섭하였다.
전주 남문 안에서 약국을 하는 최군선(崔君善)이가 자기의 매부라는 말을 김형진한테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찾아갔으나, 최는 대단히 냉랭하게 그가 처남인 것은 사실이나 무거운 짐을 그에게 지우고 벌써 죽었다고 원망조로 말할 뿐이었다. 나는 비감을 누를 수 없어서 부중으로 헤매었다.
마침 그날이 전주 장날이어서 사람이 많았다. 나는 어떤 백목전 앞에 서서 백목을 파는 청년 하나를 보았다. 그의 모습이 김형진과 흡사하기로 그가 흥정을 하여 가지고 나오기를 기다려서 붙잡고,
"당신 김서방 아니오?"
하고 물은즉 그가 그렇다고 하기로 나는 다시,
"노형이 김형진 씨 계씨 아니시오?"
하였더니, 그는 무슨 의심이 났는지 머뭇머뭇하고 대답을 못한다. 나는,
"나는 황해도 해주 사는 김창수요. 노형 백씨 생전에 혹시 내 말을 못 들으셨소?"
하였더니, 그제서야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형이 생전에 노상 내 말을 하였을 뿐 아니라 임종시에도 나를 못보고 죽는 것이 한이라고 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그 청년을 따라서 금구 원평(金溝 院坪)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조그마한 농가였다. 그가 그 어머니와 형수에게 내가 왔다는 말을 고하니, 집안에서는 곡성이 진동하였다. 김형진이 죽은 지 열아흐레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궤연( 筵)에 곡하고 늙은 어머니와 젊은 과수에게 인사를 하였다. 고인에게는 맹문(孟文)이라는 8,9세 되는 아들이 있고, 그의 아우에게는 맹열(孟悅)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나는 이 집에서 가버린 벗을 생각하고 수일을 더 쉬고 목포로 갔다. 그것도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목포는 아직 신개항지(新開港地)여서 관청의 건축도 채 아니 된 엉성한 곳이었다. 여기서 우연히 양봉구를 만났다. 나와 같이 탈옥한 넷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나는 조덕근이가 다시 잡혀서 눈 하나가 빠지고 다리가 부러졌다는 말과 그 때에 당직이던 김가가 아편인으로 옥에서 죽었단 말을 들었다. 내게 관한 소문은 못들었다고 하였다. 양봉구는 약간의 노자를 내게 주고, 이곳은 개항장이 되어서 팔도 사람이 다 모여드는 데니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 하여 어서 떠나라고 권하였다.
나는 목포를 떠나서 광주를 지나 함평에 이름난 육모정(六毛亭) 이 진사(李進士) 집에 과객으로 하룻밤을 잤다. 이 진사는 부유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육모정에는 언제나 빈객이 많았고, 손님들께 조석을 대접할 때에는 이 진사도 손님들과 함께 상을 받았다. 식상은 주인이나 손님이나 일체 평등이요, 조금도 차별이 없었고 하인들이 손님들께 대하는 태도는 그 주인께 대하는 것과 꼭 같이 하였다. 이것은 주인 이 진사의 인격의 표현이어서 참으로 놀라운 규모요, 가풍이었다.
육모정은 이 진사의 정자여니와 그 속에는 침실, 식당, 응접실, 독서실, 휴양실 등이 구비되었다. 그 때에 글을 읽던 두 학동이 지금의 이재혁(李載爀), 이재승(李載昇) 형제다.
나는 하룻밤을 쉬어 떠나려 하였으나 이 진사는 굳이 만류하여 얼마든지 더 묵어서 가라는 말에는 은근한 진정이 풍겨 있었다. 나는 주인의 정성에 감동되어 육모정에서 보름을 묵었다.
내가 내일은 이 진사 집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나를 자기 집으로 청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다소 연장자(年長者)인 장년의 한 선비로 내가 육모정에 묵는 동안 날마다 와서 담화하던 사람이다.
나는 그의 청을 물리칠 수가 없어서 저녁밥을 먹으러 그의 집으로 갔다. 집은 참말 게딱지와 같고 방은 단 한 칸뿐이었다. 그 부인이 개다리 소반에 주인과 겸상으로 저녁상을 들여왔다. 주발 뚜껑을 열고 보니 밥은 아니요, 무엇인지 모를 것이었다.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으니, 맛이 쓰기가 곰의 쓸개와 같았다.
이것은 쌀겨와 팥으로 만든 겨범벅이었다. 주인은 내가 이 진사 집에서 매일 흰밥에 좋은 반찬을 먹는 것을 보았지마는 조금도 안 되었다는 말도 없고, 미안하다는 빛도 없이 흔연히 저도 먹고 내게도 권하였다. 나는 그의 높은 뜻과 깊은 정에 감격하여 조금도 아니 남기고 다 먹었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 |
김윤식 |
---|---|
작성일 |
대부님, 새해 강건하시고 댁내 두루 평안하시길 빕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 |
김항용 |
---|---|
작성일 |
새 해 더욱 건강하시고 댁내 모두 평안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