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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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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6-02-03 00:20 조회2,1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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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전투

 

임진왜란 당시의 진주성 전투란 임진년과 계사년의 두 차례 전투를 말한다. 이 두 차례의 진주전투는 임진년의 경우는 임진왜란 육전에서 우리 나라가 최초로 승리를 거둔 것으로, 임진왜란 중의 3대첩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계사년의 경우는 비록 패배를 당하였지만, 일본군의 잔인함과 우리 겨레의 항전 정신을 보여준 전투였다. 이러한 두 차례의 전투는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과 군량 보급에 차질을 가져오게 하여 임진왜란의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올 수 있게 한 전쟁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양국간의 치열한 전투가 두 차례나 같은 지역에서 있었다.

 

1) 임진년(1592) 전투

임진년 5월 하순에 초유사의 임무를 띠고 학봉 김성일이 진주에 도착하였을 때 진주 고을은 텅 빈 상태였다. 일본 수군이 남해안의 고성 등지를 유린하고 '진주를 점령하려 한다'는 선전을 하면서 사천쪽으로 서진하자, 우수사 원균이 노량으로 도망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놀란 진주 목사 이경과 판관 김시민이 지리산으로 피난을 갖기 때문이었다.  김성일이 진주 목사를 다시 불러내어 진주성을 지키게 하였으나, 목사 이경이 산중에서 병사하였으므로 김시민으로 하여금 목사를 대리하게 하였다.

한편 김성일은 전 군수 김대명을 소모관으로 임명하여 모병을 하게 하고, 손승선  정유경 등에게 김시민을 도와 진주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러는 동안 사천까지 진출하였던 일본 수군은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함대에 의하여 5월 29일 사천 선창에서 격파됨으로써 진주의 위기가 해소되었다.

일본군은 김해를 거점으로 삼아 5월 하순에 창원으로 진출하여 전라도로 진출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남해안을 따라 수륙병진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7월 한산도 해전에서 패하자, 해상활동을 중지하고 7월 하순에 육로로 서진하여 진주를 위협하였다.

이에 김시민은 각지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곽재우 등의 지원을 받아 진주성의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일본군은 남강 남안까지 진출하였으나, 남강을 도하하여 진주성을 공격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하여 사천으로 물어나 그들의 거점을 확보하려 하였다.

김시민은 김성일로부터 사천의 적을 격멸하라는 명을 받고 군사 1천 명을 동원하여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사천성을 수복하고, 고성쪽으로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고성과 진해현을 탈환하였다. 이때 함안 군수 유숭인 등이 창원을 수복하였다. 김시민은 진주로 돌아가 8월 9일 진주 목사가 되었다.

8월 11일 조정은 경상도를 좌도와 우도로 분리하고 김성일을 좌감사에 임명한다는 임명장이 김성일에게 전달되었다. 김성일은 좌도 감사가 되어 임무를 수행하다가 우도 지역 민들의 요청으로 9월 16일 복귀하였다.

9월 중순 우감사로 전임되어 거창에 도착한 김성일은 지례지역에서 김면 군을 지원하고 있던 김시민을 진주로 복귀시켜 진주를 지키도록 조치했다. 이 무렵 일본군은 수군의 패배로 해안 거점의 확보가 어렵게 되자, 육로로 서진하여 해안 거점과 전라도의 진입로를 확보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8월 중순부터 한성 주둔의 병력 일부를 김해로 남하시켜 진주성 공격을 준비하였다.

우키다(宇喜多秀家)는 가토오(加藤光泰) 등 3인과 나가오카(長岡忠興) 등이 지휘하는 병력을 김해로 이동시켰으며, 이들은 9월 초순에 진주성 공격 계획을 수립하였다.

9월 24일 2만여 명의 일본군이 김해성을 출발하여 진주성으로 향하였다. 이때 창원성을 지키고 있던 경상 우병사 유숭인은 창원성을 지키지 못하고 진주쪽으로 후퇴하였다. 25일 창원성에 입성한 일본군은 26일 함안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우병사 김성일은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진주 인근의 군사를 진주에 집결하도록 하여 김시민의 지휘하에 방어태세를 강화하였으며, 전라 감사와 전라 좌우의병장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진주성에는 목사 김시민, 판관 성수경, 곤양 군수 이광악 등이 3,800여 명의 군사로 결전태세를 가다듬었다. 성의 외곽에는 의령 의병장 곽재우가 급파한 심대승 군과 고성 의병장 최강·이달 군, 전라 좌의병장 임계영 군과 우의병장 최경회 군이 지원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9월 26일 일본군은 함안에서 병력을 2개 군으로 나누어 진용을 정비한 뒤, 10월 3일 선발대 1만여 명이 4일 진주 동쪽 외곽의 마현에 도착하였다. 이때 유숭인도 창원에서 이동하여 진주성의 동문 밖에 진을 쳤으며, 사천 현감 정득열 등도 도착하여 유숭인 군에 합류하게 된다. 이들은 진주성의 동문 밖에서 일본 선발대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일본군의 주력은 6일 아침부터 남강을 도하하여 진주성을 동·서·북면에서 포위하였다. 일본군은 성을 포위하였으나, 의병 부대들이 여러 곳에서 수성군에 호응하여 그들의 배후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으므로 섣불리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8일 아침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사다리와 나뭇단을 성벽에 기대어 놓고 그것을 밟고 기어 올라 성벽을 넘으려고 하였으며, 바퀴가 달린 3층 누각을 만들어 접근시켜 놓고 그 속에서 성안을 내려다 보면서 조총을 쏘았다.

이에 성안의 군민들은 김시민의 지휘하에 하나가 되어 총통과 활을 쏘아 적병이 성벽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고, 성벽에 기어오른 적에게는 돌을 던지거나 물을 꺼얹어 물리쳤다. 일본군은 8일의 공격이 실패하자, 9일 낮에는 소부대로 나누어 진주성 외곽에서 그들 배후를 위협하는 지원 부대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의병 부대들에 의해 손실을 입었다.

9일 일본군은 성 안의 방어 병력을 성 밖으로 유인해 내려는 술책을 썼다. 일본군은 밤중에 그들 진영에 불을 밝혀 놓고 병기와 물자들을 실은 수레를 철수시켜 퇴각하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유인술책을 간파한 김시민은 성의 방어태세를 견고히 하고 성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일본군은 그들의 술책이 수포로 돌아가자 10일 새벽에 동문과 북문으로 그들 전병력을 투입하여 총공격을 실시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동문 방어를 지휘하던 김시민이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러나 곤양 군수 이광악이 목사를 대신하여 끝내 성을 지켰다.   

 

2) 계사년(1593) 전투

일본군은 전라도로 침입하기 위하여 임진년 10월 진주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한 이래, 진주성 패전을 그들의 침략 계획에 큰 차질을 초래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보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본의 토요토미는 한성 이북의 병력이 한성으로 퇴각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계사년 2월 27일부로 한성의 총대장 우키다에게 진주성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후 한성 철수가 완료될 무렵인 5월 20일에 다시 진주성 공격을 위한 방략을 하달하였다.

토요토미의 진주성 공격 명령이 6월 상순에 조선 주둔 일본군 진영에 하달되자, 공격부대들은 창원·김해 부근에 집결하여 진주성 공격 준비를 하였다. 이때 고니시는 '조선군이 진주성에서 저항하지 말고 성을 비워 인명을 구하도록 하라'고 심유경에게 통고하였다. 이에 명군측에서 경략 송응창 등이 일본군 진영에 서신을 보내어 진주성 공격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하였으나 실효가 없었다.

일본군의 공격 계획이 알려지자 진주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은 명군을 접대하기 위하여 상주에 머무르고 있다가 진주성으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창의사 김천일, 경상 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 사천 현감 장윤, 의병장 고종후 등이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하였으며, 인근 고을의 부사·현령 등도 합류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주성에는 3,500여 명의 군사와 6만여 명의 주민들이 입성하여 창의사 김천일과 경상 우병사 최경회를 도절제사로 추대하고, 충청병사 황진을 순성장으로 삼아 진주성을 사수하기로 결의하였다.

일본군은 6월 15일 창원에서 진주공격에 나서 함안에 주둔중이던 전라 감사 권율 등의 군사를 격파하고 16일에 함안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함안에서 병력을 분산하여 1대는 18일 정암진에서 곽재우 군을 격파한 뒤 의령으로 진출하고, 다른 1대는 반성을 경유하여 진주성으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선진부대가 20일 마현으로 진출하였으며, 이튿날 본대가 도착하였다. 이에 22일 1대 가토오 군은 성의 북쪽을, 2대 고니시는 서쪽을, 3대 우키다는 동쪽을 가각 담당하여 예비대를 제외한 7만명으로 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22일 첫 공격은 실패하였다. 이튿날 일본군은 조총으로 집중사격하며 다시 공격 기세를 올렸다.

이러한 일본군의 위세에 놀란 명군은 거창·남원 등지에 주둔하고 있으면서도 진주성을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 진주성의 군민들은 성을 완전히 포위당하여 외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수성 결의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일본군은 25일부터 토산을 쌓아 망루에서 내려다 보면서 성안으로 조총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성안에서도 황진의 지휘 아래 토산을 쌓아 대응하여 일본군의 화공을 무력화시켰다.

 27일부터 일본군은 귀갑차라는 새로운 공성 무기를 동원하여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진주성 군민들의 화공을 받아 소각되었다. 그러자 일본군은 어둠을 틈타 투항을 권유하는 전단을 뿌리고 방비가 소홀한 서문쪽을 집중공격하여 성벽의 일부를 파괴하였다.

28일 서문쪽으로 일본군의 공격이 집중되었는데, 이날 지휘하던 황진이 적의 유탄에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진주성 군민들의 사기가 저하된 가운데 29일 일본군이 귀갑차를 앞세우고 성안으로 돌진하였다. 이에 진주성 군과 민들은 남강을 뒤로 한 채 촉석루쪽으로 밀려 최후의 결전을 벌였으며, 무기를 버리고 자결의 길을 택하였다. 진주성을 총지휘하던 김천일은 아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으며, 3천여 군사와 6만여 주민들은 진주성의 함락과 함께 전멸되었다.

일본군은 29일 진주성에 입성하여 진주성을 철저하게 유린한 뒤 한 부대는 단성·산청으로, 다른 부대는 섬진강을 따라 구례·곡성까지 진출하여 약탈을 자행하다가 7월 9일 진주로 복귀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다시 군별로 지정된 왜성으로 돌아가 남해안 지역에 성을 쌓고 분산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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