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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래 구상(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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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진(在哲) 작성일06-02-14 12:45 조회1,539회 댓글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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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未來 構想


(1) 

  天安市에서는 天安을 찾아 온 國內外의 관광객을 위하여 3월부터 11월까지 每週 日曜日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소요시간 7시간에 걸쳐 天安 주변의 우정 박물관, 태조산 조각 공원, 각원사, 유관순 열사 유적지, 유관순 열사 생가, 조병옥 박사 생가, 독립 기념관, 천안 삼거리 공원 등에  無料 관광을 실시하고 있다. 筆者는 이 無料 관광을 통하여 유관순 열사가 高興 柳氏 임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연상되는 점이 있어 述懷한다.


  1968년 11월 3일에 安東 金氏 大宗會 創立 總會를 契機로 忠烈公 營建 事業의 일원으로 天安郡 並川面에 忠烈公 祠堂 建立을 爲하여 政府 當局에 資金 支援을 建議 한 바 있다. 大宗會 初代 副會長 이신 相瑄씨와 나와 둘이서 大宗會 發展에 대하여 對談하던 中에 相瑄씨께서 한신 말씀이 “天安郡 並川面에 우리 門中 所有의 林野가 많이 있어 忠烈公 祠堂 建立에 必要한 敷地를 提供 하겠으니, 그에 수반한 建立 費用으로 金 4億원을 支援 要請하였으니 期待해 보자”고 말씀 하셨으며 萬一 이 事業이 成事가 되면, 忠節의 意志를 담은 忠臣 牙山의 李舜臣 將軍 顯忠祠, 並川의 柳寬順 烈士 生家 및 趙炳玉 博士 生家 등 天安을 中心으로 우리나라 忠臣들의 巡廻 관광지의 면모가 갖추어 질 것이란 意見도 並言 하셨다. 이 계획이 비록 空想에 그쳤지만 萬一 成事 되었다면 忠烈公 할아버님의 忠節意志를 鼓舞 讚揚할 뿐만 아니라 우리 舊 安東 金氏의 位相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旅行 中 同席한 70代 後半 쯤 되는 安山에서 왔다는 사람과 修人事 성씨를 물으니 全州 崔氏라고 하였으며, 나는 安東 김가요 하니 “三太師 집의 兩班 家門이십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全州 崔氏 系譜를 잘 모르는데 그 사람은 安東 金氏 내역을 잘 아는 것 같은 표현을 하였다.

  舊 安東 金氏, 新 安東 金氏를 구별하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識者則은 舊 安東 金氏는 新羅 56代 敬順王의 後裔이며 開國公爵 忠烈公 金方慶 中始祖를 비롯하여 三韓 甲族의 名門家로 알고 있다. 또, 新 安東 金氏는 朝鮮朝 中期의 四齊家 (延安 李氏, 光山 金氏, 全州 李氏 , 安東 金氏)집이라고 하여 우리나라 으뜸가는 兩班집이라고 높이 評價하며  朝鮮朝 末期의 60年 勢道政治 家門으로 알고 있고, 보통 安東 金氏 하면 三太師 집의 뿌리로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상 약술한 바를 살펴보면 忠烈公 祠堂 建立은 重大한 事業이라 생각되며  언젠가는 이 事業이 成就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 事業을 成就 하려면 事業 着工 時期에 따라서 예산이 달라지겠지만, 只今으로 추산하여 보면 最少 限度額 100億원 정도의 예산이 必要 하리라고 보는데 과연 施行 할 수 있는 事業인가 아니면 空想에 그칠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절대 不可能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마음가짐이 시작이요 시작이 반이 되는 것이다. 우리 宗人 全體가 한마음으로 結集하여 반드시 成事하여야 한다고 간직하고 子子孫孫에 전한다면, 언젠가는 우리 後裔에서 文化公報部 局長級이상 또는 國會 文化部所管 分科委員長이상 국회위원이 배출되면 이 事業의 成事는 可能 할 것으로 생각되어 期待하여 볼만도 하다.

 

 


(2)

 우리 貫祖 (安東金氏始祖) 設壇 갖추기


우리 시조는 보첩에서나 대외적으로 平章事公 叔承公으로 명백하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시조의 묘는 실존한 것으로 알고 있고 오늘날까지 방치상태에 있는 것이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동김씨의 정체성을 널리 알리며 자손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는 하루속히 設壇을 갖추어 제전행사를 하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병행하여 우리 족보에 등재되어 있는 日兢公, 利請公, 義和公, 敏成公, 孝印公 의 設壇도 갖추어 시행해 봉행하여야 합니다. 設壇의 위치로는 천안군 병천면이 적합하리라고 생각됩니다.

 


(3)

  우리 安東 金氏는 過去의 保守的인 思考에서 脫皮하여 進步와 改革의 精神으로 邁進하여야 한다. 保守的인 思考方式으로는 發展할 수 없으며 後退할 따름이다.


  우리 門中뿐만 아니라 어느 門中이든 과거의 禮風을 이어받아 ‘우리는 老論 집이니, 우리는 少論집이니’ 하여 朝鮮朝 景宗 元年에 世子 冊封을 내세운 四色 黨派싸움의 根源을 이어받아 그 風習을 固守 하려는 家門이 있는가 하면, 우리 家門은 朱子家禮니 우리 家門은 栗谷家禮의 傳統家門이니 하여 自己가 禮儀凡節을 第一 잘 지키는 사람인 양 自尊心을 가지고 他의 模範을 보여 指導하려고 하는 例가 許多하다.


  筆者도 여기에 속하는 便이나, 나로서는 생각나는 대로 하나하나 現實에 附合시켜 改善해 나가고 있다.  되도록이면 祖上님들이 지켜온 禮法을 이어받아 施行하면서 時享이나 忌祭祀를 받들 때는 祖上님의 靈魂이 實際로 降臨하시어 歆饗하신다는 마음가짐으로 祭奠에 臨하고 있기에 過去의 祭奠形式을 脫皮하여 中國料理나 洋食과 같은 다양하고 맛있는 飮食과 國內에서 生産되는 맛좋은 술 또는 國外製産 高級 洋酒 등을 갖추어 可能한 限度 내에서 奠儀에 臨하고 있다. 그 이유는 自身들은 새로운 양식의 맛있는 料理飮食을 먹으면서 祖上님의 祭奠에는 옛날부터 받들어온 祭需로만 갖추는 것은 祖上님께 罪責感을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祭祀 때 바치는 祭需를 雉奠이라고 하였다. 祭需에 必히 꿩고기를 사용하여야 하지만 꿩을 求하기가 쉽지 않아 닭을 代身 하였다고 여겨진다. 그의 俗言으로 꿩 대신 닭이란 말을 흔히 사용하게 된 것이다. 우리 祖上님들 祭奠에 雉奠한 例는 보지 못하였다. 따라서 禮儀를 갖추자면 雉奠은 祭奠의 必要品으로 생각된다.

 

 


(4)

  國內에서도 書誌學者가 數百名에 이를 것이지만, 지금까지 발굴치 못했던 世宗大王 親筆 글씨를 元老 書誌學者 천해봉(당시 79세. 성균관 대학 명예 교수)씨가 처음 발굴해 공개했다고 SBS가 지난 2005년 10월 1일 보도했다.  世宗大王 어필은 글씨를 베껴 찍은 판각본만 일부 남아 있을 뿐 직접 쓴 친필은 발굴하지 못하여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 조상님들의 친필 휘호나 업적등도 우리가 발굴 해 내지 못하였기에 알지 못하였지 우리 보첩에 의심나는 부분이나 알고자 하는 부분을 연구 또는 탐구 하면 많은 자료를 발굴하리라 생각된다.


  우리 안사연에서는 수십 건에 달하는 祖上님들의 업적을 발굴하여 大宗會 事務室에 기증 보관하고 있다. 필자의 예를 들면, 경상북도 영일군 송라면 寶鏡寺 內에 있는 圓眞國師 碑文을 쓰신 尙書公 孝印(충렬공 부친)公의 친필 휘호를 찾고자 노력하여 세 번째에 가서 碑文을 발견하고 다섯 번째에 가서 碑文 上端 일부만을 拓本하여 공개한 바 있다. 또한 忠烈公의 셋째 아드님이신 文英公 恂자 조상님이 대구시 팔공산 동화사에 弘眞國師 碑文을 王命에 의해 쓰셨다는 점을 문헌에서 발견하여 그 碑石을 찾으려고 세 번이나 가 봤으나 碑石은 발견하지 못하고,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曹溪寺 內의 法報 新聞社 主筆을 尋訪하여 協助를 구한 바 그 主筆의 주선으로 동국대학교 중앙 도서관을 紹介하여 文獻을 찾으려고 수십 번 방문하여 文英公의 친필 휘호 일부분을 발견 공개한 바 있다. 또한 按廉使公 7代孫인 文端公 花山君 澍자 방조님의 文章 친필 휘호를 서울대학교 중앙 도서관에서 발굴․공개하고 花山君 祠堂에 備置하였으며, 그 외 중대한 史料 15점을 按廉使公 齋室 永慕齋에 備置 展示하였으며, 우리 족보에 등재되지 않은 大小史料를 多數 발굴하여 공개 하였다. 이렇듯 자신에게 주워진 使命感이라 생각하고 부단히 노력하면 可能한 일도 많을 것이다.


  여기에 어려운 점은 내가 알고자 하는 점에 그에 기록된 文獻이 있는가 하는 것과 문헌이 있다하여도 그 책을 찾아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여 볼 때 우리 문중에 안사연을 제외하고는 조상님의 일을 탐구하는 기구가 어디 있는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의범절이나 앞세워 자존심을 높이려는 것보다  조상님의 얼을 고무 찬양하며 올바른 역사관을 탐구하여 후손에게 이어주는 것이 우리 시대의 중대한 과제라 생각한다.


  안사연에서 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나 안사연 회원들은 여느 단체의 보조 없이 회원들의 자비로 운영되고 있고 또 자기의 직업과 시간을 아껴가며 물심양면으로 조상님의 업적 탐구에 헌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니 종인 여러분께서는 우리 족보에 의심나는 점이나 알고자 하는 점에 대하여 기탄없이 문의 또는 연구 의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로서는 안사연의 조직이 좌절될까 두려워하며 종인 여러분께서는 밀어주고 도와주고 찬양 해주시어 이 조직이 영원히 발전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협조하여 소기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도록 성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가 도서관에 가려면 왕복 버스와 전철을 6차례나 갈아 타야하고 3km 以上을 徒步하여야 하며 1個月이면 10차례 以上을 往來하여 왔으나 83세의 老軀로 더 以上 持續하기에 力不足하여 안사연의 조직에서 탈퇴함을 아쉬워하면서... 

 

                                                     按廉使公 19代孫 容辰 올림.

댓글목록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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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님 글을 오랫만에 대합니다. 이렇게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대단히 감사 하고 감명깊게읽었읍니다 구구절절 좋으신 말씀 오래도록 기억 하껬읍니다 환절기에 건강 하세요.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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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님께서 그동안 연구하여 오신 문중 역사물, 탐구업적, 애정, 안사연에 대한 애정과 각종 연구물----
많은 상징적의미와 감동을 저희들에게 안겨주고 계십니다.
지난 해 5월, 구로동에서 있었던 <대종회장님과의 만남>의 행사장에서 대부님의 고별 학술발표회와 함께 청려장을 전해 올릴 때는 정말 가슴이 찡했습니다. 83세의 노구에도 과연 나는 저런 정열과 끊임없는 애정, 발전적 사고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대부님을 뵈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척 아쉽고 허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런 글을 대하니 깊은 감동과 함께 저의 등불로 우뚝 서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대부님 늘 건강하시옵고 손자님께 부탁하여 이곳에 많은 글 자주 올려 주십시요. 대부님의 글을 뵈오니 처졌던 고개와 어깨가 불쑥 일어납니다.
아래의 학술 자료들은 본 홈 자료실에 올려 두고 여러분들이 늘 보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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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늘 강건하시길 기원합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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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문중사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열정과 그동안 이룩하신 업적은  安 金 史에 영원히 남을것입니다
부디 오래토록 건강하셔서 후배들의 등불이 되어 지도 바랍니다
존경합니다

김은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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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늘 문중사를  연구하시는  모습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더욱더 건강하시여 많은 업적 남기어 주세요.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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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올듯말듯 봄소식은 마음만 흔들어놓습니다.
어려운 마음 한자락 내려 놓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바라건데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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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늘 곁에서 지켜주셔셔 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앞으로도 강녕하시어 북두성 같이 살펴주십시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