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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역사 속의 옛길(죽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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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2-04-18 03:09 조회1,6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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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역사 속의 옛길



풍기읍을 벗어나면 바투 소백산(해발 1440m)이다. 격암 남사고(南師古)가 그야말로 “사람이 살 만한



산”이라 하여 넙죽 절하고 갔다는 바로 그 소백산. 백두대간이 태백산 어름에서 문득 서해를 향해 말머리



를 돌려 내륙으로 달리다가 한껏 가쁜 숨을 몰아 쉬는 곳이 바로 소백의 연봉들이다.



일찍이 영남 좌도의 크고 작은 고을들은 모두 그 소백산에 기대어 죽령으로 한양 길을 열었다. 신라 아달



라왕 5년(158년)에 죽죽(642년 대야성에서 백제의 윤충에 게 죽은 죽죽과는 동명이인)이 처음 고갯길을



닦은 이래 오늘도 변함없이 길노릇에 여념이 없으니 고개 나이 무려 1천8백 살이 넘었다. 죽령은 한때 백



제의 손길이 닿기도 했다 하고, 한때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땅이었다가 종당에는 진흥왕의 영토가 된 삼



국 결사쟁패의 접경이었다. 또한 죽령과 조령 이남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고향이었으니 거기 가서 견훤



의 흉을 보다가는 찬물 한 사발도 못 얻어 마신다. 고려시대를 지날 무렵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우



왕 8년(1382년)과 9년에 각각 왜구가 죽령을 넘어왔다는 기록이 『고려사』 에 남았다. 임진왜란에 관한



이야기로는 인조대의 청백리 김시양(金時讓ㆍ 1581~1643)이 지은 『하담파적록』에 실린 다음의 대목



이 그 중 흥미롭다.





동양위 신익성(申翊聖)은 상촌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 지어 문장으로 자허(自



許)하였다. 신미년에 그의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의) 『상촌집』을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그 속의 『동정



록』에, “임진년에 적이 조령, 죽령 두 재로부터 올라왔다.”고 하였다. (중략) 내가 동양위에게 말하기를,



“임진 년에 왜적이 조령과 추풍령을 거쳐 올라왔고, 죽령만은 적의 발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른 일이 없



었는데 『동정록』에는 죽령으로 올라왔다고 말하였으며, (중략)” 하였더니 동양위는 얼굴빛이 변하여



돌아갔다. (『대동야승』 제7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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