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공파조 金哲 사적비 건수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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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4-18 17:40 조회2,064회 댓글0건본문
정의공파조 金哲 사적비 건수 (2002년 1월)
요즈음 지나간 대종회보를 읽고 있습니다.
지난 1월호에 실린 고려 정의대부 金哲 사적비 건수 내용을 소개합니다.
▣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75호 (2002년 1월호)
고려 정의대부 사적비 건수
정의공파 회장 允會 현종은
파조이신 고려 정의대부 천우위 대장군 봉안동군 조선개국원종공신 공예조판서 증규장각제학 휘哲의 묘소가 함경도 학성군 학남면 금산동 사을보산 인좌에 안장하였으나
지금은 남북이 갈라져 래왕이 불가하여 존성의 예를 다 할수 없는 모선의 정을 금치 못하여 종손 範植을 비롯 제종이 수차에 걸쳐 논의한바
파조의 존령을 설단으로 모시고 아울러 국내에 사적비를 수비하고 지난 2001년 11월 21일 백여 후손들이 참지한 가운데 단비 설립 고유를 올리고 아울러 사적비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다음에 그 비문을 싣는다.
고려 정의대부 천우위 대장군 봉안동군 조선개국원종공신 공예조판서 증규장각제학 陽坡 김공사적비명 병서
고훈에 말하기를 선조유미이불천이면 불명불인이라 하였다. 세간에는 밝은 지략과 높은 경륜으로 일세를 살고 후세에 업을 남긴 현달한 명인들도 시운의 불리와 세월의 인순천연으로 잠덕유광이 진?에 멸몰되니 뜻있는 후손들으 숭선지괴를 더욱 절감하게 한다.
여기 조선개국원종공신 양파김공의 유허와 유택은 새외천리의 변경이라 걷어치울 기약없는 철책으로 시향마저 올리지 못한 것이 반세기가 지났다.
아! 거룩하도다. 산은 태백의 줄기가 길게 뻗었고 물은 일월산에서 발원하여 임하호를 이룬 鄒魯(추로)의 원향 안동부 중평 마을 언덕에 선세의 사적을 새긴 우뚝한 비석을 세우나니 산천경관도 한층 더 아름답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哲이요, 호는 陽坡이며, 관은 안동이다. 신라 경순왕의 4자인 대안군 殷說의 계보로 叔承과 日兢을 지나 휘利請이니 안동태수로서 비로소 안동의 관을 받았으며 휘義和는 위위시 주부요 휘敏成은 문과에 올라 직사관 한림을 역임하였다.
휘孝印은 영렬공 금의를 사사하였고, 선필로 왕명비서가 청하의 보경사와 강진의 월남사에 있으며 금자광록대부로 삼한벽상공신이 되었다.
휘方慶은 고려의 고종, 원종, 충렬왕의 3조출사로 삼별초난을 바로잡고 재정일본으로 수공하여 출장입상의 훈업이 세상을 떨쳤으며 상락군개국공으로 충렬의 시호가 내렸으니 오금의 중시조요 공(=哲)의 고조이시다.
증조의 휘 侖은 중현대부 밀직사사이니 충렬공의 4자요 조의 휘永曜는 금오위 대장군이고 고는 휘杏(행)이니 검교 중추원사이며 비는 군부인 경주이씨이다.
공(=哲)은 1356년 공민왕 병신에 태어나시니 간엄청숙하고 호용절인이라 겸하여 통경에 능달하니 이는 승국훈신이요 충렬세가의 정훈을 힘입었기 때문이다.
고려말에 문과에 올라 중랑장을 거쳐 판병조사를 역임하고 정의대부 천우위 대장군이 되었으며 공양왕 폐위시에 공을 세워 안동군에 봉해지고 고려사에 기록되었다.
신돈의 ? 위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항상 걱정하며 이태조 잠저시부터 유신과 응순의 깊은 뜻을 품고 ? 위하였으나
인각에 누락되었다가 태조 정축에 개국원종공신록에 추록?은과 공예조판서에 등용되고 사전50결과 입비기공하고 부조배위는 봉작의 영을 자손에게는 음직의 은급이 내렸다.
다음해 戊寅(무인)에 왕자의 난으로 태조를 뫼시고 함흥에 호가하였다가 신사에 환도할 때 태종을 추종한 익재공신들이 권세를 잡고 있었기에 시상이 이롭지 못함을 헤아리고
화의군 김성부와 전서 심지백등 삼공이 훈노를 사양하고 어가에 배사한후 마운령을 넘어 복주에 들어가 산천영기가 서려있는 가거락지에 세업을 정하니 이곳이 영태봉이다.
김공과 심공 역시 탑평산과 운주산에 복거하여 망향의 회포를 원문상답하며 우의를 결속하니 시년 46세요 이로부터 자손이 번성하여 관북의 화족이 되었다.
1420년 세종 경자에 서거하니 향년 65세라. 학성군 학남면 금산동 사을보산 인좌에 안장했으며 순종 경술에 후손 容默과 宗默의 상주로 규장각 제학의 증직이 내렸다.
배는 월성군부인 경주최씨라. 3남을 두었는데
成景은 병마절도사요 成浩는 문과 공조참의이며 成咸은 현감이다.
성경의 자는 得海이니 병마판관 경원진 진무사요,
성호의 자는 億敏이니 영해부사로 분관 영해하였으며
성함의 자는 智理니 통정대부 진용교위를 역임하였다.
曾玄 이하는 기록을 줄이며 이후 누대를 거쳐 衣冠文物이 相承하고 安身水分으로 世業을 밝히면서 지방의 模楷(모해)가 되었다.
삼백 수십여 년이 지난 순조 년간에 16세손 範達공이 천기와 지리에 造詣(조예)가 깊어 ?暗?明의 원리를 예견하니 保子孫之計는 南에 있음을 깨닫고
대소 일족이 의논하여 地廣土沃(지광토옥)한 남향으로 率眷薦居(솔권천거) 함에 선고 3형제의 유해를 강릉과 봉화로 각각 이안하고 卜地傳孫(복지전손)하니 세 壬寅 春이라
이후 천리 遠隔(원격)에 尊省(존성)의 예를 다할 수 없어 봉화 西碧(서벽)에 세덕사를 세워 향사하였으나 庚寅 병?로 재액을 입으니 ?손들의 崇慕向念(숭모향념)이 感愴(감창)할 따름이다.
時移世變(시이세변)한 오늘날 후손은 경향에 각거하고 남북상잔 당시 월남한 종인 다수로 칠백여 가에 이른다.
乙卯 세말에 파종회장 允會 족종이 모선의 정을 금치 못하는 마음으로 방래하여 종손 範植을 비롯 제종이 수차에 걸쳐 논의함에 世遠地隔(세원지격)으로 향연이 폐해진 파조의 존령을 설단으로 모시고
아울러 동남방 數步許에 사적비를 수비코자 하면서 그 銘을 청하니 昌會 역시 傍裔(방예)의 한 사람으로 고사할 수 없어 보첩과 행략을 상고하여 위와 같이 서하고 삼가 銘을 드리니
忠烈古家 높은 훈업 勝國華閥 거룩하다
應順天理 깊은 뜻은 其命維新이 아닌가
龍飛咸州 하올적에 扈?三年 장할시고
移宮還都 때를 당해 拜辭駕前 時狀이라
自晦단천 數百餘祀 該地範模 되었었네
철령 넘어 關北千里 追遠의 정 할 길 없어
入域雲孫 齊誠으로 設壇竪碑 時享할세
有崇8尺 높은 비석 임하호와 함께하리
방후손 昌會 謹撰(근찬)
정의공파종회 謹竪(근수)
▣ 명가의 족보 (1989, 뿌리)
⊙ 金哲
호는 陽坡(양파), 고려말에 천우위대장군을 지내고, 安東君에 봉해졌으며, 1392년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등외)공신에 책록, 이어 공조 예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 金成景
호는 三林, 1373년(공민왕22) 進士가 되고, 그후 중랑장, 관군백호 명마절도사 등을 역임. 1408년(태종8) 安東君에 봉해졌다.
⊙ 金成浩
호는 三山, 조선조에 공조참의를 역임했다.
▣ 김창우 -
▣ 김영환 -
▣ 김항용 -
▣ 김은회 -
▣ 김발용 -
▣ 김태서 -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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