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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부설원기 비평(채하 류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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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6-02-21 23:00 조회1,7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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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부설원기 비평


채하 류주환(彩霞 柳朱桓 : 대승공 36세손)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신소재공학부 교수


<전략>


7. 류-차 관련

이 문제는 문화류씨의 선계문제와 직접 연관되는 것이기에 따로 자세하게 다루었다. 여기서는 설원기의 신뢰성에 관계되는 사실들만을 언급한다.

설원기는 류씨와 차씨가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는 것을 중요한 배경으로 삼고 있다. 설원기의 가장 중요한 줄거리가 "차원부는 적통(嫡統)인데 서얼출신들인 하륜 등이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원부가 상당한 집안 출신임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차원부는 확실히 연안차씨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차중규(차효전 10세), 차약송(12세), 차덕위(14세), 차송우(16세), 차득규(17세), 차안도(19세) 등의 인물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로 부족했는지 설원기는 류공권(류차달 7세)과 그의 손자 류경(9세)에 이르러 대단한 문벌을 이루고 있던 문화류씨에 붙였다. 설원기의 본문에서 본론의 시작에 주어지는 다음과 같은 차원부의 소개가 바로 그것이다. "사간원 좌정언 차원부는 문성인(文城人) 류차달의 첫째 아들 대광지백 효전의 후예이다."

아무래도, 우선 설원기를 떠받드는 연안차씨들이 대체 설원기의 이 선언적 구절의 어디를 보고 류차달이 차씨라고 주장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고려시대의 금석문에서까지 밝히고 있는 고려태조 삼한공신 류차달은 이름만 나오고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효전이라는 인물이 모든 정사(正史)에 반해서 대광지백이라는 호칭으로 등장한다. "고려사"를 집필했던 인물들도 참여하고 "고려사"에 누구보다 정통했을 박팽년이 본문을 썼다는 설원기의 기록으로서는 전혀 맞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구절이다.

필자는 현재 문화류씨와 연안차씨, 그리고 개성왕씨가 받아들이고 있는 원파보는 몇몇 역사적 인물을 끼워 넣어 조작해낸 계보라고 잠정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설원기와 마찬가지로 그 내용들이 역사와 합치되지 않거나 역사에서 증명할 수 없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원기에 나온 차원부의 소개 글을 위시한 류-차의 관계에 대한 묘사들도 모두 믿을 수 없다. 따라서 설원기에 적혀 있는 류-차 동원의 주장이나 차씨가 왕씨와 같은 계통이라고 하는 주장들은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 여기서의 관점은 과연 설원기의 그런 주장들이 설원기가 만들어낸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문헌에서 온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에 있다.

우선 설원기에서 주장되는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박팽년의 본문에서는 시조인 차효전이 류차달의 맏아들이며 공적을 세워 대광지백(大匡之伯)이 되고 식읍 1000호를 받고, 그 후손들 역시 문벌을 이루어왔다고 말하고 있다. 류씨와 차씨가 같은 뿌리라는 내용을 포함한 족보가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 있었는데 하륜이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주석에는 차씨 성을 하사한 이유, 차효전이 참언에 연루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류씨와 차씨의 큰 계통 혹은 신라 본계(本系) 등이 서희(徐熙)의 "가사(家史)" 혹은 서희의 "찬집여사(撰集餘史)"["찬집여사"가 제목인지 혹은 "여사"가 제목인지 분명치 않음], 정지상(鄭知常)의 "서경야사(西京野史)" 혹은 "서경잡기(西京雜記)"[이상 두 사람의 작품은 제목이 혼동되어 나옴], 김방경(金方慶)"초당일기(草堂日記)", 그리고 김사형(金士衡), 김균(金[묶을 균]) 등이 편찬하여 정종에게 보고한 계보에 나온다고 쓰여 있다. 설원기의 본문에서는 차씨 성을 갖게 된 얘기 외에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차효전에 부여된 호칭인지 관작인지 모호한 대광지백이란 단어는 성립할 수 없는 단어이다. 대광은 벼슬 이름이고 백은 관작제도인데, 그 둘이 혼합되어 있는 엉터리 단어이다. 하여간 식읍을 1000호를 받았다는 말은 그 공적이 찬란했고 그 벼슬이 실질적이었다는 말이 되는데 역시 차원부설원기 전체의 문제점과 동일하게 정사에서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일 따름이다. 더구나 참언 운운하며 그에 관한 기록들이 역사에서 사라졌음을 방어막으로 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아무런 증거가 없어 그 진위에 대해 더욱 의심이 가게 만든다.

응제시의 경우는 한 군데에서 선계의 내력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예장(1406-1456)이 지었다고 나오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신라 미추왕(味鄒王, ?-284, 신라 제13대 왕, 재위 262-284) 때의 '승상'이었다고 하는 차제능(車濟能)에서 시작해서 차승색(車承穡)과 차공숙(車恭淑)까지, 모두 해서 18명의 차씨 계보가 제시되어 있음. 이들 18명 중 14명이 '승상'이었다고 나옴.

- 승색과 공숙은 신라 헌덕왕(憲德王, ?-826, 신라 제41대 왕, 재위 809-826; 본명 김언승(金彦昇)) 때 그에게 살해당한 전왕(前王=애장왕)의 원수를 갚고자 하다가 탄로 나서 도망쳐서 이름을 각각 류백(柳栢)과 류숙(柳淑)으로 바꾸었음.

- 류차달에게는 '車達'의 호(號)가 주어졌다고 하며, 그 아들에게 조상의 위대함을 이어가도록 별도로 성씨를 하사했다 함. (경우는 거의 없지만 무리하면, 號는 '불렀다'라고 해서 이름까지 포함하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보지만, 원문에 增車達之號로 나와 대략 고려 말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이름(名)과 자(字) 이외로 부르는 호를 의미하는 것이 확실함.)

- 류차달의 처음 이름(初名)은 해(海)였음. "공숙-진부-무선-보림-해"로 이어졌음.

- 이예장은 자신을 차상도(차원부의 손자)의 처 김씨의 이성(異姓) 5촌 조카라고 밝힘.

이상의 응제시의 내용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 우선 차승색의 아버지로 나오는 차건신의 경우는 역사적인 인물인 듯하다. 그러나 이 사람이 실제 계보 상의 인물인지, 다른 사람들은 실제 벼슬이 어땠는지 등이 밝혀지지 않았다. 더구나 신라시대에 승상이라는 직책은 없었는데, 이것을 후대의 정승(정1품) 정도의 벼슬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생각한다 해도, 차씨가 대대로 최고위 벼슬을 거의 이어왔다는 말이 되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어디를 봐도 18명 중에 14명이 그런 벼슬을 했다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실상 저 두 책에서는 차씨라는 성이 신라시대에 있었는지조차 의문이 들 정도로 차씨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 마찬가지로 헌덕왕 때의 일이라는 승색과 공숙의 얘기 역시 정사에서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얘기이다. 헌덕왕 때의 기록이 "삼국사기"에 비교적 소상히 나와 있고 두 번의 반란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승상'이었다고 하는 승색 부자의 암살 기도는 상당히 큰 사건이었을 터인데,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 호는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고려사를 검토해 보아도 시호는 자주 주어졌지만 호는 고려 전기에 사용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나라에서 '차달'이라는 호를 내렸다는 기록은 후대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설원기의 구절은 아무리해도 이름을 준 것으로 해석할 수 없고, '차달'이 호인데 그것을 후손들이 이름으로 써 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하여간 설원기는 초명을 설정할 필요성이 있어 그것이 '해'였다고 주장하는데, 한둘이 아닌 여러 고려시대 기록이나 금석문에서조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사실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나타났다는 것은 후대의 창작임을 말해준다.

이상은 설원기의 기록들을 그 자체로 분석해 본 결과인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친 류차달 관련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더욱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곧 고려 개국공신으로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명기된 류차달 자신에 대해서도 그 정체와 활동을 확언하기가 어려운 측면도 있는 판국에 그 맏아들이 아버지의 관작이나 공로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확실한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을 주장하는 글은 전혀 믿을 수 없다. 아무리 여러 변수를 감안해서 넓게 생각해도 차효전이라는 인물은 류차달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객관적인 문헌의 존재

여기서 꼭 다루고 넘어가야 할 것이 객관적인 문헌에 대한 고찰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설원기에는 몇 가지 문헌들이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설원기의 주장에서처럼 차제능 이하 신라에서의 차씨들의 계보나 차승색(류색)에서 시작된 류씨와 차씨가 같은 뿌리라는 얘기 등이 서희(942-998), 정지상(?-1135), 그리고 김방경(1212-1300)의 고려시대 당시에도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고려의 문헌이 많이 사라져서 필자의 한도 내에서는 그들이 쓴 문헌들이 과연 실제로 존재했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어, 그런 문헌을 주장하는 것이 조작일 수도 있고, 그 정반대일 수도 있다는 판단 외에는 내릴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점 중 하나는 설원기에서는 오직 본문의 주석에서만 문헌들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직접적인 인용이 하나도 없어, 어느 문헌에서 어느 내용을 어떻게 정확하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한 파악이 불가능하여 그 비평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설원기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차식의 신도비명(류몽인, 1619)이나 문화류씨의 족보인 기사보(1689)에 이들 고려시대 문헌들이 언급되어 있지만 대개 그 저자들이 대개 그 책들을 직접 보았다는 확증은 없어 설원기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과연 그들이 실재했었는지도 의심이 가지만, 실재했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어떤 비중의 책들이며 어떤 확실함을 갖고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어떤 경우에도 현재로서는 그 존재를 부정한다 해도 차이를 주지 않을 정도이다. 또한 앞에서도 말했지만 설원기에서 서희의 책 제목은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이며 정지상의 책 제목은 "서경야사"와 "서경잡기"가 혼동되어 쓰이고 있음도 의심할 만하다.

그런데 설원기에 이들 이외에 또 하나 자료가 언급되는데, 그것은 김사형(1333-1407), 김균(1341-1398) 등이 편찬하여 정종에게 보고한 계보(G100)라는 것이다. 그런데 김균은 1398년 8월 10일에 죽었고, 왕자의 난은 8월 26일 일어났고, 정종은 9월에 왕에 올랐다. 따라서 김균은 정종에게 그런 것을 바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왕이 되기 전의 정종에게 계보를 바쳤다면 그건 더욱 이상한 상황이다. 문화류씨 기사보의 원파록(류처후 지음)에서도 김사형, 김균 등이 편찬하여 정종에게 보고한 계보가 있다는 설원기의 말을 단순 인용하면서 이것이 고려태조가 차씨에게서 분파했다는 충분한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류처후의 글을 면밀히 읽어보면 그도 그런 것을 보지 못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은 문서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김사형과 김균은 설원기의 마지막에 또 한번 언급이 되는데, 그들은 "때로 ... 차원부의 억울함을 (왕에게) 아뢰었다"고 나온다. 그런데 이 구절이 앞의 1413년의 시기 언급 이후에 나온 것이고 내용상 후대의 것으로 보이는데, 대체 1413년에만도 고인이었던 이들이 어떤 왕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다.

그리고 백보 양보해서, 아무리 고려시대에 현재의 설원기가 주장하는 내용들을 담은 어떤 글들이 존재했었다 해도 그 내용을 모두 사실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님은 이미 위에서 논증했다. "고려사" 같은 정사와, 다른 신빙성 있는 문헌에서 아무런 그에 찬성하는 증거도 대주지 않기 때문이다.


<후략>


《논문 전문보기 : http://kenji.cnu.ac.kr/ryu/roots/seolwon-critic.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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