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32)방랑의길(7) 아버지가 돌아 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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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2-23 16:08 조회1,499회 댓글0건본문
(7) 아버지가 돌아 가심
이천경은 흔연히 나를 맞아서 한 달이나 잘 먹이고 잘 이야기하다가 또 편지 한 장과 노자를 주어서 나를 전라도 무주읍에서 삼포를 하는 이시발(李時發)에게 보내었다. 이시발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또 이시발의 편지를 받아 가지고 지례군(知禮郡) 천곡(川谷) 성태영(成泰英)을 찾아갔다.
성태영의 조부가 원주 목사를 지냈으므로 성 원주 댁이라고 불렀다. 대문을 들어서니 수청방, 상노방에 하인이 수십 명이요, 사랑에 앉은 사람들은 다 귀족의 풍이 있었다. 주인 성태영이 내가 전하는 이시발의 편지를 보더니 나를 크게 환영하여 상좌에 앉히니 하인들의 대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성태영의 자는 능하(能河)요, 호는 일주(一舟)였다. 성태영은 나를 이끌고 혹은 산에 올라 나물을 캐며, 혹은 물에 나아가 고기를 보는 취미 있는 소일을 하고, 혹은 등하에 고금사를 문답하여 어언 일삭이 되었는데, 하루는 유인무가 성태영의 집에 왔다.
반가이 만나서 성태영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같은 무주읍내에 있는 유인무의 집으로 같이 가서 그로부터는 거기서 숙식을 하였다. 유인무는 내가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불편하리라 하여 이름은 거북 구(龜)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蓮上), 호를 연하(蓮下)라고 지어 주었다. 그리고 나를 부를 때에는 연하라는 호를 썼다.
유인무는 큰 딸은 시집을 가고 집에는 아들 형제가 있는데, 맏이의 이름은 한경(漢卿)이었고, 무주 군수 이 탁(李倬)도 그와 연척인 듯하였다.
유인무는 그동안 나를 이리저리로 돌린 연유를 설명하였다. 이천경이나 이시발이나 성태영이나 다 유인무와는 동지여서 새로운 인물을 얻으면 내가 당한 모양으로 이 집에서 한 달, 저 집에서 얼마, 이 모양으로 동지들의 집으로 돌려서 그 인물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종합하여 그 인물이 벼슬하기에 합당하면 벼슬을 시키고 장사나 농사에 합당하면 그것을 시키도록 약속이 되어 있던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시험의 결과로 아직 학식이 천박하니 공부를 더 시키도록 하고, 또 상놈인 내 문벌을 높이기 위하여 내 부모에게 연산 이천경의 가대(家垈)를 주어 거기 사시게 하고 인근 몇 양반과 결탁하여 우리 집을 양반 축에 넣자는 것이었다.
유인무는 이런 설명을 하고,
"아직 우리나라에서 문벌이 양반이 아니고는 일을 할 수가 없어"
하고 한탄하였다.
나는 유인무의 깊은 뜻에 감사하면서 고향으로 가서 2월까지에 부모님을 모시고 여산 이천경의 가대로 이사하기로 작정하였다. 유인무는 내게 편지 한 장을 주어서 강화 버드러지(長串) 주 진사(朱進士) 윤호(潤鎬)에게로 보내었다. 나는 김주경 집 소식을 염문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주 진사는 내게 백동전으로 4천 냥을 내어 주어 노자를 삼으라고 하였다. 대체 유인무의 동지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고, 그들은 편지 한 장으로 만사에 서로 어김이 없었다. 주 진사 집은 바닷가여서 동짓달인데도 아직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생선이 흔하여서 수일간 잘 대접을 받았다. 나는 백동전 4천 냥을 전대에 넣어서 칭칭 몸에 둘러감고 서울을 향하여 강화를 떠났다.
서울에 와서 유인무의 집에 묵다가 어느 날 밤에 아버지께서 '황천(黃泉)'이라고 쓰라시는 꿈을 꾸고 유인무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지난 봄에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계시다가 조금 나으신 것을 뵙고 떠나서 서울에 와서 탕약 보제를 지어 우편으로 보내어 드리고, 이내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러한 흉몽을 꾸니 하루도 지체할 수가 없어서 그 이튿날로 해주 길을 떠났다.
나흘 만에 해주읍 비동 고 선생을 뵈오니 지나간 4,5년 간에 하그리 노쇠하신 줄은 몰라도 돋보기가 아니고는 글을 못보시는 모양이셨다.
나와 약혼하였던 선생의 장손녀는 청계동 김사집이란 어떤 농가집 며느리로 시집을 보내었다 하고, 나더러 아재라고 부르던 작은 손녀가 벌써 10여 세가 된 것이 나를 알아보고 여전히 아재라고 부르는 것이 감개무량하였다. 내가 왜를 죽인 일을 고 선생께서 유 의암에게 말씀하여 유 의암이 그의 저(著)인 '소의신편(昭義新遍)'의 속편에 나를 의기 남아라고 써넣었다는 말씀도 하였다.
의암이 의병에 실패하고 평산으로 왔을 때에 고 선생은 내가 서간도(西間島)에 다녀왔을 때에 보고했던 것을 말씀하여 의암이 그리로 가서 근거를 정하고 양병하기로 하였다는 말씀도 하셨다. 의암이 거기서 공자상을 모시고 무사를 모아서 훈련하니 나도 그리로 감이 어떠냐 하셨으나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이란 고 선생 일류의 사상은 벌써 나를 움직일 힘이 없었다.
나는 내 신사상(新思想)을 힘써 말하였으나 고 선생의 귀에는 그것이 들어가지 아니하는 모양이어서,
"자네도 개화꾼이 되었네그려"
하실 뿐이었다.
나는 서양의 문명의 힘이 어떻게 위대한 것을 말하고 이것은 도저히 상투와 공자왈, 맹자왈만으로는 저항할 수 없으니, 우리나라에서도 그 문명을 수입하여 신교육(新敎育)을 실시하고 모든 제도를 서양식으로 개혁함이 아니고는 국맥(國脈)을 보존할 수 없는 연유를 설명하였으나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이적(夷狄)의 도는 좇을 수 없다 하여 내 말을 물리치시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선생은 이미 나와는 딴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 선생 댁에는 당성냥 하나도 외국 물건이라고는 쓰지 않는 것이 매우 고상하게 보였다. 고 선생을 모시고 하룻밤을 수고 이튿날 떠난 것이 선생과 나와의 영결이 되고 말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 선생은 그 후 충청도 제천의 어느 일가 집에서 객사하셨다고 한다.
슬프고 슬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에 나의 용심과 처사에 하나라도 옳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온전히 청계동에서 받은 선생의 심혈을 쏟아서 구전심수(口傳心授)하신 교훈의 힘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 자애가 깊으신 존안을 뵈올 수 없으니 아아 슬프고 아프다.
나는 고 선생을 하직하고 떠나서 당일로 텃골 본집에 다다르니 황혼이었다. 안마당에 들어서니 어머니께서 부엌에서 나오시며,
"아아, 네가 오는구나. 아버지 병세가 위중하시다. 아까 아버지가 이 애가 왔으면 돌어오지 않고 왜 뜰에 서서 있느냐 하시기로 헛소리로만 여겼더니 네가 정말 오는구나"
하셨다.
내가 급히 들어가 뵈오니 아버지께서 반가와하시기는 하나 병세는 과연 위중하였다. 나는 정성껏 시탕(侍湯)을 하였으나, 약효를 보지 못한 지 열 나흘만에 아버지는 내 무릎을 베고 돌아 가셨다. 내 손을 꼭 쥐셨던 아버지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리시더니 곧 운명하셨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나는 나의 평생의 지기인 유인무, 성태영 등의 호의대로 부모님을 연산으로 모시고 갓 만년에나 강씨, 이씨에게 상놈 대우를 받던 뼈에 사무치는 한을 면하시게 할까 속으로 기대하였더니 이제 아주 다시 못 돌아오실 길을 떠나시니 천고의 유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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