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원정에서 명성을 떨친 명장 김방경 장군- 최규성<상명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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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6-02-27 06:58 조회1,527회 댓글2건본문
일본 원정에서 명성을 떨친 명장 김방경 장군
김방경은 안동사람으로 경순왕의 후손인데 여몽전쟁에서 공훈을 세워 이름이 났고, 삼별초의 난과 여몽연합군 의 일본정벌에서 큰 공훈을 세워 재상의 직위에 오르고 공신에 봉해짐으로서 명성이 해외까지 드날리어 안동 김 씨 가문을 명문으로 만드는데 크게 이바지를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김효인이란 분으로 성품이 엄정하고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학문에 조예가 있었고 특히 글씨를 잘 써 이름이 났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 병부상서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김방경은 충직하고 믿음이 두터웠으며 항상 태도가 엄정하고 의연하여 말 수가 적었다고 그의 열전에는 전하고 있다. 특히 자식 같은 연배의 사람들을 대할 때도 항상 예로서 대하였고, 역대의 고사를 잘 알아 일을 결단함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고려사의 열전에 전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단속함이 근검하여 낮에는 절대 들어 눕 지 않았고 늙음에 이르러서도 두발이 희어지지를 않았으며 덥고 추운 것을 잘 견디어 병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 다.
출생 초기에 김방경을 할아버지 민성이란 분이 집으로 데려다 길렀는데, 조금만 화가 나도 반드시 거리에 들어 누어 딩굴고 우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마들이 길을 지나가면서도 조심스럽게 김방경을 피해가 서 주위 사람들이 아주 기이하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김방경은 고종 때 음서로 산원 겸 식록 록사란 하급관리로 벼슬길에 오른 이후 매사에 조심하고 맡은 바 임무에 충실히 임해 주위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특히 당시 시중(侍中)으로 있던 최종준이 김방경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비록 벼슬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한 예로서 대우하며. 조정에 큰일이 있을 경우 항상 그와 상의하면서 웬만 한 일은 모두 다 그에게 맡기었다.
김방경의 벼슬이 올라 감찰어사가 되어 우창감이란 국가의 재정을 요리하는 요직을 겸직하게 되었다. 이 때 권세 하는 자들로부터 여러 번 청탁이 있었으나 일체를 거절하여 누구의 청탁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 었다. 심지어는 집정자 임연이 직접 청탁을 하였을 때도 “나도 불법으로 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같이 할 수가 있 습니다만, 이미 국고를 충실하게 비축하려는 마음을 굳게 정했기 때문에 도저히 모든 사람의 뜻을 맞출 수가 없 습니다.”라고 완강히 거절하였다. 김방경이 이 정도로 충직하게 자신의 임무에 임하였기 때문에 청탁을 했던 임 연이 오히려 부끄러워하였다고 고려사에는 전하고 있다.
뒤에 김방경이 상장군이 되었을 때 중방의 한 장교가 법을 범하여 매를 처서 나무랐는데, 아첨하는 자가 그 일을 과장하여 권신 임연에게 호소하자 임연은 복수심에서 김방경의 죄를 억지로 물어 강등시켜 남경의 수졸을 삼는 수모를 주었다.
그러나 김방경 장군이 일찍이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서북지역 여러 성에 넓게 은덕을 베풀었던 까닭에 서북지역 제성의 장군들이 다투어 글을 올려 김방경 장군의 죄를 사하여주고 다시 서북면으로 와서 진무를 하게 해줄 것 을 청하였다. 이에 김방경 장군은 남경으로 쫓겨 간지 삼일 만에 다시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나가서 진무하게 하 였다. 그리고 얼마 있다 개경으로 들어와 형부상서 추밀원 부사가 되었다.
원종 10년인 1269년 6월 22일에 임연이 원종을 폐위하고 대신에 안경공 창을 왕으로 세웠다. 이에 앞서 수개월 동안 원에 머물러 있던 원종의 태자 심이 원을 떠나 고려로 돌아오다가 개경 근처에서 이 소식을 듣고 원으로 다 시 돌아갔다. 그리고는 원종이 왕위를 선위한 사실을 고하는 서신을 가지고 원에 사신으로 갔던 곽여필을 붙잡 아 사실 여부를 확인한 다음 연경으로 가서 원 세조에게 원종의 강제폐위 사실을 고하였다.
원 세조는 이 보고를 듣고 알탈아불화를 고려로 보내어 원종을 폐위한 것을 추궁하는 한편, 다시 복위토록 할 것 을 종용하고 돌아갔다. 이 때 김방경도 사신이 되어 원에 보고하는 표문을 가지고 함께 원으로 들어가 있었다. 태자 심이 원 세조에게 군사를 청함에 따라 원 세조가 몽가독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고려로 가게 하였는데 원의 중서성에서 건의하길 “지금 몽가독이 만일 오랫동안 서경에 주둔하여 대군을 기다리면, 임연이 이미 황제 의 명을 어긴바 있어 임연이 반드시 군량을 보내지 않으려 할 것이니 그 때는 어찌하시겠는가? 그러니 태자께서 는 마땅히 임연의 일당이 아닌 사람을 뽑아서 함께 가도록 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이 마당에 그런 사람을 어디서 구한다는 말인가 하고 걱정만 하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여몽간에 발생한 어려운 국제문제를 풀기 위해 원나라에 들어와 있던 고려의 명재상 이장용이 김방경을 추천하여 함께 귀 국하도록 청하였다. 이장용이 그를 추천한 이유는 “김방경은 북계를 두 번이나 진수하여 은택을 두루 끼치었으 니 이 사람이 아니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태자 심은 이장용의 권유를 흔쾌히 받아들여 김방경과 함께 귀국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태자 일행이 고려로 떠나기 전에 김방경이 태자에게 건의해 말하길 “몽고군이 서경에 이르러 만약 대동강을 건 너게 되면, 왕경이 소란하게 되어 장차 어떤 불칙한 변이 일어날지 모르니 반드시 몽골군으로 하여금 대동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자 주위에 있으면서 고국의 일을 걱정하던 이장용을 비롯한 중신들이 김방견의 건의가 타당하다고 찬동 함으로 태자심은 김방경의 제안을 원 세조에 건의하여 몽골장군에게 지시를 내리도록 하였다. 이에 원 세조는 고 려 태자를 옹위하고 고려로 떠나는 몽가독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 중 누구라도 짐의 말을 듣지 않고 대동강 을 넘는 자는 엄한 죄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천명하며, 고려에 들어가서는 대동강을 건너가지 못하도록 당부하 였다. 이것은 몽골군이 고려로 가서 임연 정권을 위협하는데 그치고 양국간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는 당부 였다. 만약 몽골군이 대동강을 건너는 경우 지나치게 임연의 무신정권을 자극하여 임연이 원종을 죽이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거나, 아니면 여몽간의 전쟁이 재발되게 될 것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당부를 하였던 것이다.
어찌했던 태자 심을 모시고 김방경과 몽가독 등이 몽고의 동경에 이르렀을 때 원의 이러한 신속한 대응 소식을 접하고 두려움을 느낀 임연이 이미 원종을 복위케 함으로서 원종이 장차 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어 동경에서 머물며 원종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원종 11(1270)년 정월 세자와 김방경 일행이 고려로 들어와 서경에 머무르자 부로들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대접하면서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만약 공이 있었던들 최탄의 무리가 어떻게 국가를 배반하고 나라의 땅을 오랑 케에게 바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몹시 안타까워하였다.
조국을 배반하여 원 주구가 된 최탄 등은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몽가독을 뇌물로 움직여 사냥을 한다는 핑 계로 삼아 몽골 군사를 동원하여 개경을 처서 고려를 병탄하려는 비밀 계획을 세웠다. 다행이도 최탄의 부장으 로 있던 영원별장 오계주의 아들 오득공이 이 사실을 알고 급히 김방경에 그 사실을 밀고함으로서 전쟁을 사전 에 막을 수가 있었다.
이에 김방경은 몽가독을 만나 원세조가 떠나기 전에 당부한바 있던 대동강을 넘는 자를 엄벌에 처하겠다는 엄명 을 상기시키면서 고려침공의 무당함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김방경은 의연하게“내가 여기 있는데 장군이 어찌 강을 건널 수 있으리요? 만약 대동강을 꼭 건너고자 한다면 반드시 황제에게 고하여 명령을 받아 행해야 할 것이 다.”라고 말하였다. 몽가독은 김방경의 충직함을 꺾기 힘들 것으로 생각하고 고려정벌 계획을 백지화시킴으로 서 김방경은 또 한번 고려를 전쟁의 위기에서부터 구해 낼 수가 있었다.
이해 6월에 배중손 등의 지휘 하에 삼별초군이 반기를 들고 난을 일으키자 원종은 김방경을 발탁하여 추토사로 삼아 몽골군 원수 아해와 함께 진도로 나가 삼별초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여몽연합군이 진도에 이르러 삼별초 군과 싸우기 여러 날이 되었는데 원의 앞잡이 홍찬 등이 김방경을 모함하여 김방경이 삼별초군과 비밀히 내통하 여 열심히 싸우지 않는다고 아해에게 고발하였다. 이에 아해는 김방경을 잡아가둔 다음 군사 50인으로 김방경을 서울로 압송하게 하니 주위에서 보는 자들이 모두 원통해 하고 가슴아파했다.
뒤에 홍찬의 밀고가 무고임이 밝혀지자 아해를 비롯한 몽골의 장수 모두가 민망해 하였고, 독전관으로 파견되었 던 몽고의 달로화적은 김방경 장군 없이는 진도 함락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원종에게 간청하여 김방경을 복직시 켜 진도로 다시 파견해주도록 하였다. 이에 김방경이 상장군이 되어 진도로 갔지만 그사이 삼별초군의 기세가 너 무 높아져 몽골의 군대가 곤경에 빠져 진퇴가 어려운 형편이 되어 삼별초군을 진압하는 전쟁은 오래갈 수밖에 없 었다.
원종이 몽골 원수 아해가 바다를 두려워하여 제대로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였던 사실을 보고 받고 그 사실을 원 에 알리자 원은 아해를 불러들이고 대신 흔도를 보내 몽골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마침내 여몽연합군이 악전고투 끝에 진도를 함락시키고 붙잡혀 있던 강도의 사녀들과 쌀 3천석 등 노획한 물품 을 개경으로 실어 보내고 개선하니 원종은 김방경을 교외까지 나가 맞아 노고를 위로하며 수태위 중서시랑평장 사의 높은 벼슬을 내리었다.
탐라로 옮겨 들어간 삼별초군은 탐라에다 내성과 외성을 쌓고 탐라의 지형의 험함을 의지하여 세력이 더욱 강성 해졌다. 이에 원종은 원종 14(1273)년 2월에 김방경을 행영중군병마원수를 제수하고 몽골의 원수 흔도 등과 연합 군을 형성하여 탐라로 가서 삼별초군을 진압하게 하였다.
탐라에 상륙한 여몽 연합군이 외성과 내성을 차례로 함락하니 김통정장군은 삼별초 무리 70여인을 이끌고 산으 로 들어가 최후를 맞았고, 남아 있던 이순공 장군 등 삼별초군은 모두 항복하였다. 김방경이 제장을 지휘하여 입 성하자 삼별초군의 아녀자들이 두려워하여 호곡을 하니 김방경은 “다만 주모자만 처벌할 뿐 아녀자들은 절대 로 해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었다. 그리고는 김윤숙 등 삼별초의 장군 6인을 거리에서 참수하고 주모자 편에 들었던 35인의 장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불문에 부쳤다. 이것을 보면 김방경이 비록 왕명을 받들어 몽골군와 연합하여 삼별초군을 토벌하였을망정 그들의 애국 충심을 마음속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관용을 베풀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원종 15(1574)년 정월에 원세조가 일본을 치고자하여 홍다구와 김방경에게 명하여 함선300척을 짓도록 하였다. 함선을 남송식으로 짓는 경우 공비가 과다하게 들어가게 될 뿐만 아니라 원세조가 요구한 기한 안에는 도저히 완 성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고려전체가 근심으로 전전긍긍하였다. 이에 김방경이 함선을 고려식으로 짓도록 원 세 조에 건의하여 허락을 얻어냄으로서 마침내 배짓는 사람들 3만 5천명을 징집하여 부안의 변산과 장흥의 천관산 에 설치한 조선소로 집결토록 하여 독촉한 결과 5개월 여 만에 대선 300척과 소선 600척을 지음으로서 약속한 기일 안에 마칠 수가 있었다.
원종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충렬왕이 즉위한지 4개월 만인 1274년 10월에 원 세조는 제1차 일본정벌을 단행하였 다.
고려는 원세조의 일본원정을 막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원 세조는 일본원정이 단 행되기에 앞서 원종 7년에 흑적과 은홍을 파견하여 고려로 하여금 향도가 되어 일본으로 가서 원세조의 글을 전 해 통하도록 하였으나 사신일행은 대마도까지 갔다가 되돌아옴으로서 실패한바 있었다. 그리고 원종 12년에도 조량필과 홍다구를 고려로 보내 이들을 안내하여 일본으로 가서 항복과 조공을 요구하는 원의 뜻을 전하도로 하 였다. 조량필 일행이 큐슈의 태재부까지 갔으나 태재부의 관리가 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함으로서 막부대장군에 원의 요구서를 직접전하는 데 실패하고 되돌아 왔다.
고려는 28년간의 몽고와의 전쟁으로 인해 국가경제가 파탄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일본원정을 막고자 노력하였지만 일본이 원의 항복요구를 거절함으로서 어쩔 수 없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 때 원 세조는 무력으로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고자 홀돈을 도원수로 하여 우부원수 홍다구, 좌부원수 유복 형 등으로 하여금 몽고군과 한족군 연합 2만 5천으로 출정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도 김방경을 원수로 하여 임개, 손새정 등으로 하여금 고려군 8천인을 거느리고 원정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고려는 여기에 뱃길 안내자 및 사공 과 수군 육천 칠백명을 함께 참가케 함으로서 총 4만 명의 병사로 여몽연합군을 구성하여, 전함 9백 척에다 싣고 합포를 떠나 일본으로 향하였다. 이후 여몽연합군은 대마도를 단숨에 함락한 후 일지도를 공격하였다. 일지도의 왜군들이 싸우기에 유리한 언덕에 미리 둔진하고 여몽연합군을 맞아 싸우거늘 김방경이 고려군을 지휘하여 진격 해 나가 왜병의 머리 천 여급을 베어 패퇴시킨데 이어 퇴각하는 왜군 대병을 추격하여 해가 질 때까지 격살해나 가니 산과 들이 죽은 왜병의 시체로 뒤덮였다.
이 싸움을 본 몽골 원수 홀돈은 “몽골군이 전쟁에서 싸움하는 것이 뛰어났지만 어찌 김방경 원수가 지휘하는 고 려군의 싸움에 비할 수가 있으리오?” 하고 김방경 원수의 뛰어난 용병술과 함께 용맹스럽게 싸운 고려군의 위용 에 대해 크게 칭찬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김방경이 이긴 틈을 타고 급히 칠 것을 건의하였으나 혼 돈이 “피곤한 군대를 몰아 날로 불어만 가는 왜적과 싸우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 되지 못하니 회군하는 것만 같 지 못하다.”하고 회군을 명함으로서 일본을 토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좌군부원수 유복형이 전투중 유시에 맞아서 먼저 배에 오름으로서 할 수 없이 군사를 승선시켜 귀환하는 데 한 밤 중에 태풍이 크게 일어나 전함들이 암벽에 부딪쳐 절반이 파손되고 익사한자도 1만 3천 여 명이나 됨으로 인 해 더 이상 진격하여 일본 본토로 나가지 못하고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여몽연합군이 합포에 귀환한 후 일본원정에서 노획한 병장기와 물품들을 원 세조와 충렬왕에게 바치니 사신을 파견하여 노고를 위로하였다.
충렬왕은 김방경을 개경으로 소환하여 상주국 판어사대사 직을 더하여 주는 한편 원 세조에 “김방경은 진도와 탐라를 공파하였고 일본을 정벌할 때에도 전함을 속히 짓고 해상에서 활략하여 공훈을 크게 세웠으니 호두금패 를 내리어 뒷사람에 귀감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건의하였다. 원은 이 건의 받아들여 김방경을 원으로 불러들여 호두금패를 내리는 자리에서는 원에 항복한 남송의 복왕(福王)보다도 윗자리에 앉게 할 정도로 우대하 였다.
그러나 김방경의 공훈을 시기한 무리가 김방경을 무고하여 “김방경의 부자와 사위 등 400여인이 충렬왕과 공주 를 비롯하여 몽골이 파견한 달로화적을 죽이고 강화도로 들어가 반란을 꾀하기 위해 일본정벌에서 돌아온 후에 도 병기를 사저에 감추어 두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밀히 전함까지 만들어 진도에 감추어 두고 있다.”고 혼돈에 게 밀고 하였다.
이 밀고를 접한 혼돈은 그 사실을 충렬왕에게 고하고 김방경을 잡아들여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모진 고문을 하였 다. 특히 홍다구가 고려에 대해 오랫동안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방경을 혹독하게 고문하여 자복 을 받아내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였으나 끝내 자복을 받아낼 수가 없었다. 이에 홍다구는 충렬왕을 속여 김방경 이 만약 자복만 하면 고려에는 죄를 묻지 않고 다만 김방경만 유배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하겠다고 설유하였 다. 설유에 넘어간 충렬왕은 김방경을 달래어 반역을 꾀하려 했다고 자복을 하면 그대도 살고 나라도 편안할 수 있다고 하며 자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모진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된 김방경은 충렬왕에 대해“신이 군졸로부터 일어나서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 으니 간과 뇌를 땅에 바르더라도 보국함에 부족하거늘 어찌 몸을 아껴 사직을 저버리리오?”하고 자신의 뜻을 전 한 다음, 홍다구를 보고 말하기를 “죽이려면 속히 죽여라 나는 불의로서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결연한 태도를 보였다.
. 김방경의 자복을 얻어내는데 실패한 홍다구는 김방경이 병장기를 비밀이 간직한 것으로 논죄하여 대청도로 유배 하고, 아들 흔은 백령도로 유배하고는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다 무죄 방면하였다. 김방경이 유배를 떠날 때 수많 은 사람들이 길을 막고 울면서 전송하였다.
그 뒤 김방경의 무고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일체 관직이 복직되었지만 김방경은 충렬왕에게 관직에서 물러나기 를 거듭 간청하였다. 그러나 충렬왕은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원이 일본원정을 다시 시도하자 김방경은 비 록 늙었으나 일본 정벌에 동원되는 고려군을 지휘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원에 청하여 원세조로 하여금 김방 경을 ‘중선대부 관령 고려국 도원수’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원의 세조는 일본원정을 단념하지 않고 다시 본격적인 일본정벌을 단행하기 위해 고려에다 정동행성을 설치하 고 정벌준비를 마친 다음 1281년 7월에 15만의 여원 연합군을 형성하여 제2차 일본 원정을 단행하였다.. 충렬왕 도 정가신과 함께 합포로 내려와 원정군을 사열하고 위로하였다.
김방경이 혼돈과 홍다구 박구 김주정과 함께 합포를 출발하여 대마도와 일지도 등을 연다라 점령하고 큐슈의 하 카다까지 진격하였다. 대마도와 일지도의 싸움에서는 김방경장군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주동이 되어 혁혁한 전공 을 세웠었다. 일본에 상륙한 고려군은 싸우는 전투마다 승리하였으나 홍다구가 지휘하던 몽골군은 지기만하여 사기가 떨어진데다가 연합군에 질병까지 돌아 3천여 인이 병으로 죽어나갔다.
거기에다가 설문호가 이끈 강남군과 동로군이 6월 15일에 하카다에서 함께 조우하기로 한 약속한 기일보다 무 려 두 달 반이나 늦게 도착함으로서 연합군의 일본 본토 진공 작전에 차질이 생기었다. 뒤 늦게 범문호가 이끈 강 남군 십여만을 태운 9천척의 전함이 합세하여 승기를 잡는 듯 하였으나 1281년 8월 초 하루날 밤에 심한 태풍을 만나 전함의 대부분은 부서지고 강남군 10 여만이 거의 다 빠져죽으니 그 시체가 조수를 따라 포구로 들어와 메 우니 시체를 밟고 다녀야할 판이 되었다. 몽골 측은 10여만의 희생을 당하였으나 고려군선은 견고하고 수부들이 배를 잘 다루어 적은수의 배만 깨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고려군 역시 7000여명을 잃음으로서 여몽연합군은 드 디어 흩어진 잔군을 거두어 8월 중순에 합포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서 여몽연합군의 일본 본토 진입은 또다시 실패하게 되었다.
충렬왕 9년에 김방경이 글을 올려 물러가기를 비니 충렬왕은 ‘추충 정난 정원 공신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 전리사 사’를 제수한 위에 태자의 스승을 삼은 다음 치사 즉 명퇴하기를 허락하였다. 김방경은 치사하여 은퇴한 후 충렬 왕 26년에 병으로 죽으니 이때 나이 89세였다.
최규성<상명대 박물관장>
댓글목록
김은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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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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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잘 읽었습니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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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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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봄을 시샘하는 변덕스러운 날입니다.
이럴때 일수록 감기조심 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