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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33)방랑의길 (8) 거듭 깨지는 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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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3-08 11:50 조회2,0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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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거듭 깨지는 혼담

집이 원래 궁벽한 산촌인데다 빈한한 가세로는 명의나 영약(靈藥)을 쓸 처지도 못되어서 나는 예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땡 아버님이 단지(斷指)하시던 것을 생각하고 나도 단지나 하나 하여 일각이라도 아버지의 생명을 붙들어 보리라 하였으나, 내가 단지를 하는 것을 보시면 어머님이 마음 아파 하실 것이 두려워서 단지 대신에 내 젋적다리의 살을 한 점 베어서 피를 받아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고 살은 불에 구워서 약이라고 하여 아버지가 잡수시게 하였다.

그래도 시원한 효험이 없는 것은 피와 살의 분량이 적은 것인 듯하기로 나는 다시 칼을 들어서 먼젓 것보다 더 크게 살을 떼리라 하고 어썩 뜨기는 떴으나 떼어 내자니 몹시 아파서 베어만 놓고 떼지는 못하였다. 단지나 할고(割股)는 효자나 할 것이지 나 같은 불효로는 못할 노릇이라고 자탄하였다. 독신 상제로 조객을 대하자니 상청(喪廳)을 비울 수는 없고 다리는 아프고 설한풍은 살을 에이고 하여서 나는 다리 살을 벤 것을 후회하는 생각까지 났다.

유인무와 성태영에게 부고를 하였더니, 유인무는 서울에 없었다 하여 성태영이 혼자 나귀를 달려 5백 리 먼 길에 조상을 왔다.

나는 집상(執喪) 중에 아무 데도 출입을 아니 하고 준영 계부의 농사를 도와 드렸더니 계부는 매우 나를 기특하게 여기는 모양이어서 당신이 돈 2백 냥을 내어서 이웃 동네 어떤 상놈의 딸과 혼인을 하라고 내게 명령하셨다. 아버지도 없는 조카를 당신의 힘으로 장가들이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또 큰 영광으로 아시는 준영 계부는 내가 돈을 쓰고 하는 혼인이면 정승의 딸이라도 나는 아니한다고 거절하는 것을 보시고 대로하여 낫을 들고 내게 달려드시는 것을 어머니께서 가로막아서 나를 피하게 하여 주셨다.

임인년(壬寅年) 정월에 장연 먼 촌 일가댁에 세배를 갔더니 내게 할머니 되는 어른이 그 친정 당질녀로 17세 되는 처녀가 있으니 장가들 마음이 없는가고 물었다. 나는 세 가지 조건에만 맞으면 혼인한다고 하였다. 세 가지라는 것은 돈 말이 없을 것과 신부 될 사람이 학식이 있을 것과, 당자와 서로 대면하여서 말을 해볼 것이다.

어떤 날 할머니는 나를 끌고 그 처자의 집으로 갔다. 그 처자의 어머니는 딸 4형제를 둔 과댁으로서 위로 3형제는 다 시집을 가고 지금 나와 말이 되는 이는 여옥(如玉)이라는 끝에 딸이었다. 여옥은 국문을 깨치고 바느질을 잘 가르쳤다고 하였다. 집은 오막살이, 더할 수 없이 작은 집이었다.

나를 방에 들여 앉혀 놓고 세 사람이 부엌에서 한참이나 쑥덕거리더니, 다른 것은 다 하여도 당자 대면만은 어렵다고 하였다.

"나와 대면하기를 꺼리는 여자라면 내 아내가 될 자격이 없소"

하고 내가 강경하게 나간 결과로 처녀를 불러들였다.

나는 처녀를 향하여 인사말을 부쳤으나 그는 잠잠하였다. 나는 다시,

"당신이 나와 혼인할 마음이 있소?"

하고 물었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나는 또,

"내가 지금 상중이니 1년 후에 탈상을 하고야 성례를 할 터인데, 그 동안은 나를 선생이라고 부르고 내게 글을 배우겠소?"

하고 물었다. 그래도 처녀의 대답 소리가 내 귀에는 아니 들렸는데 할머니와 처녀의 어머니는 여옥이가 다 그런다고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이리하여서 그와 나와는 약혼이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내가 이러이러한 처자와 약혼하였다는 말을 하여도 준영 계부는 믿지 아니하고 어머니더러 가서 보고 오시라고 하시더니, 어머니께서 알아보고 오신 뒤에야 준영 계부가,

"세상에 어수룩한 사람도 있다"

고 빈정거렸다.

나는 여자 독본이라 할 만한 것을 한 권 만들어서 틈만 나면 내 아내 될 사람을 가르쳤다.

어느덧 1년도 지나서 계묘년(癸卯年) 2월에 아버님의 담제( 祭)도 끝나고 어머니께서는 어서 나를 성례시켜야 한다고 분주하실 때에 여옥의 병이 위급하다는 기별이 왔다. 내가 놀라서 달려갔을 때에는 아직도 여옥은 나를 반겨할 정신이 있었으나 워낙 중한 장감(長感)인 데다가 의약도 쓰지 못하여 내가 간 지 사흘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 나는 손수 그를 염습하여 남산에 안장하고 장모는 김동(金洞) 김윤오(金允五) 집에 인도하여 예수를 믿고 여생을 보내도록 하였다. 내 나이 30에 이 일을 당한 것이었다.

그해 2월에 장연읍 사직동으로 반이하였다. 오 진사(吳進士) 인형(寅炯)이 나로 하여금 집 걱정이 없이 공공 사업에 종사케 하기 위하여 내게 준 가대로서 20여 마지기 전답에 산과 과수까지 낀 것이었다. 해주에서 종형 태수(泰洙) 부처를 옮겨다가 집일을 보게 하고 나는 오 진사 집 사랑에 학교를 설립하고 오 진사의 딸 신애(信愛), 아들 기원(基元), 오봉형(吳鳳炯)의 아들 둘, 오면형(吳勉炯)의 아들과 딸, 오순형(吳舜炯)의 딸 형제와 그밖에 남녀 몇 아이를 모아서 생도를 삼았다.

방 중간을 병풍으로 막아 남녀의 자리를 구별하였다. 순형은 인형의 셋째 아우로서 사람이 근실하오 예수를 잘 믿고 교육에 열심하여서 나와 함께 학생을 가르치고 예수교를 전도하여 1년 이내에 교회도 흥왕하고 학교도 차차 확장되었다. 당시에 주색장으로 출입하던 백남훈(白南薰)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어 봉양학교(鳳陽學校)의 교원이 되게 하고, 나는 공립 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당시 황해도에서 학교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공립으로 해주와 장연에 각각 하나씩 있었을 뿐인데, 해주에 있는 것은 이름만 학교여서 여전히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있었고, 정말 칠판을 걸고 산술·지리·역사 등 신학문(新學問)을 가르친 것은 장연 학교 뿐이었다.

여름에 평양 예수교의 주최인 사범 강습소에 갔을 적에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는 숭실중학교의 학생이면서 교육가로, 애국자로 이름이 높았고 나와도 뜻이 맞았다. 최광옥은 내가 혼자라는 말을 듣고 안신호(安信浩)라는 신여성과 결혼하기를 권하였다. 그는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의 영매로 나이는 스무 살, 극히 활발하고 당시 신여성 중의 명성(明星)이라고 최광옥은 말하였다.

나는 안 도산의 장인 이석관(李錫寬)의 집에서 안신호와 처음 만났다. 주인 이씨와 최광옥과 함께였다. 회견이 끝나고 사관에 돌아왔더니, 최광옥이 뒤따라 와서 안신호의 승낙을 얻었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신호와 혼인이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이튿날 이석관과 최광옥이 달려와서 혼약이 깨어졌다고 내게 알렸다. 그 까닭이라는 것은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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