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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영가지>와 고산정 기록에 대한 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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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6-03-12 23:34 조회1,3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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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전집> 부록 제1권 - 연보(年譜)

만력 15년(1587, 선조 20) 丁亥年. 선생(학봉 김성일) 50세


- 전략 -

○ 상락대(上洛臺)를 유람하였다. - 대는 안동부의 서쪽 낙동강 가에 있으니, 바로 김방경(金方慶)이 놀고 구경하던 곳이다. 옛일이 느꺼워서 읊조린 절구 한 수가 있다.

○ 고산정(孤山亭)을 유람하였다. - 정자는 상락대 북쪽 조금 위에 있는데, 역시 절구 한 수가 있다.

- 하략 -


■엠파스 백과사전 - 영가지(永嘉誌)

영가지 [永嘉誌] - 1608년(선조 41)에 권기(權紀)가 편찬한 경상도 안동의 읍지.

8권 4책. 목판본. 영가(永嘉)는 안동의 고려 때 이름이었다. 영가지는 편자가 1602년에 스승인 유성룡(柳成龍)의 뜻을 받아 편찬하기 시작했으나 유성룡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그후 〈함주지 咸州志〉 등 여러 읍지를 편찬한 정구(鄭逑)가 안동부사로 부임하면서 그의 후원으로 1608년에 권기를 비롯한 10인이 편찬을 완료했다. 이 책은 필사본으로 전해오다가 후손들에 의해 1899년에야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 하략 -


■<국역 영가지> 해제

- 전략 -

영가지는 바로 이렇게 우리 역사상 본격적으로 지방지가 편찬되기 시작한 17세기 초 곧, 1602년에 편찬되기 시작하여 1608년에 완성을 본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이른 사찬(私撰) 지방지(地方誌)의 하나이다.


■결론 - 두 기록의 비교 

학봉 선생에 의해 ‘고산정’이란 명칭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1587년이며, “고산(孤山)에 충렬공께서 지은 정자가 있다.”는 내용이 기록된 것은 1608년으로 21년의 차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학봉전집>에 “정자는 상락대 북쪽 조금 위에 있”으며, <영가지>와 <국역 영가지>에 “상고산(上孤山) 안동부(安東府)의 서쪽 회곡촌(檜谷村) 앞의 남양담(南陽潭) 위에 있다.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그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그 기초(基礎)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 두 기록을 비교하면 학봉 선생이 유람한 고산정(孤山亭)과 <영가지>에 기록된 ‘충렬공께서 지으신 정자’는 같은 정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가지>에 ‘고산정(孤山亭)’이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영가지>에 기록된 정자가 ‘고산정’이 아닐 수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보고서를 작성할 때 <영가지>의 기록을 참조했던 것입니다. 또한 <영가지>의 기록을 인용ㆍ참조한 것은 사찬(私撰)이기는 하나 안동을 대표하는 읍지로서 개인 문집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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