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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34) 방랑의 길(9) 결혼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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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3-13 11:48 조회1,5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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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결혼을 하다

안 도산이 미국으로 가는 길에 상해 어느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양주삼(梁柱三)에게 신호와의 혼인 말을 하고, 양주삼이 졸업하기를 기다려서 결정하라는 말을 신호에게도 편지로 한 일이 있었는데, 이제 나와 약혼이 된 뒤에 양주삼에게서 이제는 학교를 졸업하였으니 허혼하라는 편지가 왔다.

이 편지를 받고 밤새도록 고통한 신호는 두 손에 떡이라,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기도 어려워 양주삼과 김 구를 둘 다 거절하고 한 동네에 자라난 김성택(金聖澤) - 뒤에 목사가 되었다 - 와 혼인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가내하거니와 퍽 마음에 섭섭하였다. 그러자 얼마 아니하여 신호가 몸소 나를 찾아와서 미안한 말을 하고 나를 오라비라 부르겠다고 말하고 나는 그의 쾌쾌한 결단성을 도리어 흠모하였다.

한 번은 군수 윤구영(尹龜榮)이 나를 불러 해주에 가서 농상공부(農商工部)에서 보내는 뽕나무 묘목을 찾아오는 일을 맡겼다. 수리(首吏) 정창극(鄭昌極)이가 나를 군수에게 추천한 것이었다. 나는 2백 냥 노자를 타 가지고 걸어서 해주로 갔다. 말이나 교군이나 타라는 것이지마는 아니 탔다.

해주에는 농상공부 주사(主事)가 특파되어 와서 묘목을 각 군에 배부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전국에 양잠을 장려하노라고 일본으로부터 뽕나무 묘목을 실어 들여온 것이다.

묘목은 다 마른 것이었다. 나는 마른 묘목을 무엇하느냐고 아니 받는다고 하였더니 농상공부 주사는 대로하여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느냐고 나를 꾸짖었다. 나도 마주 대로하여 나라에서 보내시는 묘목을 마르게 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하고 관찰부(觀察府)에 이 사유를 보고한다고 하였더니 주사는 겁이 나는 모양이어서 날더러 생생한 것으로 마음대로 골라가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이리하여 산 묘목 수천 본을 골라서 말에 싣고 돌아왔다. 노자는 모두 일흔 냥을 쓰고 1백 서른 냥을 정창극에게 돌렸다. 나는 짚세기 한 켤레에 얼마, 냉면 한 그릇에 얼마, 이 모양으로 돈 쓴 데를 자세히 적어서 남은 돈과 함께 주었다. 정창극은 그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여,

"사람들이 다 선생 같으면 나라 일이 걱정이 없겠소. 다른 사람이 갔더면 적어도 2백 냥은 더 청구했을 것이오"

하였다.

정창극은 실로 진실한 아전이었다. 당시 상하를 물론하고 관리라는 관리는 모두 나라와 백성의 것을 도적하는 탐관으로 되었건마는 정창극만은 일 푼도 받을 것 이외의 것을 받음이 없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군수도 감히 탐학을 못하였다.

얼마 후에 농상공부로부터 나를 종상위원(種桑委員)으로 임명한다는 사령서가 왔다. 이것은 큰 벼슬이어서 관속들이며 천민들은 내가 지나가는 앞에서는 담뱃대를 감추고 허리를 굽히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태 동안이나 살던 사직동 집을 떠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그것은 오 진사와 내 종형이 죽은 때문이었다. 오 진사는 고기잡이 배를 부리기 이태에 가산을 패하고 세상을 떠나니 나는 사직동 가대를 그의 유족에게 돌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또 종형은 본래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으나, 나를 따라 장연에 와서 예수를 믿은 뒤로는 국문을 능통하여 종교 서적을 보고 강단에서 설교까지 하게 되었었는데, 불행히 예배 보는 중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나는 종형수에게 개가하기를 허하여 그 친정으로 돌려 보내고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읍내로 떠났다. 내가 사직동에 있는 동안에 유인무와 주인호가 다녀갔다. 그들은 예전 북간도 관리사(北間島 管理使) 서상무(徐相茂)와 합력하여 북간도에 한 근거지를 건설할 차로 국내에서 동지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는 지기들이라 하여 밤을 삶고 닭을 잡아서 정성으로 그들을 대접하셨다. 우리는 밤과 닭고기를 먹으면서 연일 밤이 늦도록 국사를 이야기하였다.

유, 주 두 사람에게 듣건대 김주경은 몸을 숨긴 후로 붓장사를 하여서 수만 금을 모았다가 금천에서 객사하였는데, 그 유산은 주경이 묵던 주막집 주인이 먹어 버리고 주경의 유족에게는 한 푼도 아니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김주경이가 그렇게 돈을 모은 것은 필시 무슨 경륜이 있었으리라고 말하였다. 주경의 아우 진경도 전라도에서 객사하여서 그 집이 말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심히 슬퍼하였다.

여러 번 약혼이 되고는 깨어지던 나는 마침내 신천(信川) 사평동(謝平洞) 최준례(崔遵禮)와 말썽 많은 혼인을 하였다. 준례는 본래 서울 태생으로 그의 어머니 김씨 부인이 젊은 과부로서 길러낸 두 딸 중의 끝엣 딸이었다. 김씨 부인은 그 때 구리개에 임시로 내었던 제중원(濟衆院 ;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에 고용되어서 두 딸을 길러 맏딸은 의사 신창희에게 시집보내고 신창희가 신천에서 개업하매 여덟 살 된 준례를 데리고 신천에 와서 사위의 집에 우접(寓接)하여 있었다.

나는 양성칙(梁聖則) 영수(領袖)의 중매로 준례와 약혼하였는데, 이 때문에 교회에 큰 문제가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준례의 어머니가 준례를 강성모(姜聖謨)라는 사람에게 허혼을 하였는데 준례는 어머니의 말을 아니 듣고 내게 허혼한 것이었다. 당시 18세인 준례는 혼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미국 선교사 한위렴(韓衛廉), 군예빈(君芮彬) 두 분까지 나서서 준례더러 강성모에게 시집가라고 권하였으나 준례는 단연히 거절하였다. 내게 대하여도 이 혼인을 말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나는 본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부모의 허혼을 반대한다 하여 기어이 준례와 혼인하기로 작정하고 신창희로 하여금 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오게 하여 굳게 약혼을 한 뒤에 서울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로 공부를 보내어 버렸다.

나와 준례는 교회에 반항한다는 죄로 책벌을 받았으나 얼마 후에 군예빈 목사가 우리의 혼례서를 만들어 주고 두 사람의 책벌을 풀었으니 이리하여 나는 비로소 혼인한 사람이 되었다.

<방랑의 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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