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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35)민족에 내놓은 몸(1) - 을사보호조약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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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3-14 09:08 조회1,6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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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에 내놓은 몸(1) - 을사보호조약 이후

을사신조약(乙巳新條約)이 체결되어서 대한의 독립권이 깨어지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에 사방에서 지사와 산림학자들이 일어나서 경기, 충청, 경상, 강원 제도에 의병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허위(許蔿), 이강년(李康年), 최익현(崔益鉉), 민긍호(閔肯鎬), 유인석(柳麟錫), 이진룡(李震龍), 우동선(禹東善) 등은 다 의병 대장으로 각각 일방의 웅이었다. 그들은 오직 하늘을 찌르는 의분이 있을 뿐이요, 군사의 지식이 없기 때문에 도처에서 패전하였다.

이때에 나는 진남포 엡웯 청년회의 총무로서 대표의 임무를 띠고 경성 대회에 출석케 되었다. 대회는 상동(尙洞) 교회에서 열렸는데 표면은 교회 사업을 의논한다 하나 속살은 순전한 애국 운동의 회의였다. 의병을 일으킨 이들이 구사상의 애국 운동이라면 우리 예수교인은 신사상의 애국 운동이라 할 것이다.

그 때에 상동에 모인 인물은 전덕기(全德基), 정순만(鄭淳萬), 이 준(李儁), 이동녕(李東寧), 최재학(崔在學), 계명륙(桂明陸), 김인즙(金仁 ), 옥관빈(玉觀彬), 이승길(李承吉), 차병수(車炳修), 신상민(申尙敏), 김태연(金泰淵), 표영각(表永珏), 조성환(曺成煥), 서상팔(徐相八), 이항직(李恒稙), 이희간(李喜侃), 기산도(奇山濤), 김병헌(金炳憲 - 今名 王三德), 유두환(柳斗煥), 김기홍(金基弘), 그리고 나 김 구(金龜)였다.

우리가 회의한 결과로 작성한 것은 도끼를 메고 상소하는 것이었다. 1회, 2회로 4,5명씩 연명으로 상소하여 죽든지 잡혀 갇히든지 몇 번이고 반복하자는 것이었다.

제1회 상소하는 글을 이 준이가 짓고 최재학이가 소주가 되고, 그밖에 네 사람이 더 서명하여 신민 대표로 다섯 명이 연명하였다. 상소를 하러 가기 전에 정순만의 인도로 우리 일동은 상동 교회에 모여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가지 말고 죽기까지 일심하자고 맹약하는 기도를 올리고 일제히 대한문(大漢門) 앞으로 몰려갔다. 문 밖에 이르러 상소에 서명한 다섯 사람은 형식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소를 한다는 결의를 하였으나 기실 상소는 별감의 손을 통하여 벌써 대황제께 입람이 된 때였다.

홀연 왜(倭) 순사대가 달려와서 우리에게 해산을 명하였다. 우리는 내정 간섭이라 하여 잉ㄹ변 반항하며 일변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강탈하여 우리 2천만 신민으로 노예를 삼는 조약을 억지로 맺으니, 우리는 죽기로 싸우자고 격렬한 연설을 하였다. 마침내 왜 순사대는 상소에 이름을 둔 다섯 지사를 경무청으로 잡아가고 말았다.

우리는 다섯 지사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 종로로 몰려와서 가두 연설을 시작하였다. 거기도 왜 순사가 와서 발검(拔劍 : 칼을 뽑아든 것 - 편집자 주)으로 군중을 해산하려 하므로 연설하던 청년 하나가 단신으로 달려들어 왜 순사 하나를 발길로 차서 거꾸러뜨렸더니 왜 순사들은 총을 쏘았다. 우리는 어물전 도가(魚物廛都家) 불탄 자리에 쌓인 와력(瓦礫 : 원문에는 '와륵'으로 표기돼 있다. 기와와 진흙 자갈 따위 - 편집자 주*)을 던져서 왜 순사대와 접전을 하였다.

왜 순사대는 중과부적하여 중국인 점포에 들어가 숨어서 총을 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점포를 향하여 빗발같이 와력을 던졌다. 이때에 왜 보병 한 중대가 달려와서 군중을 해산하고 한인을 잡히는 대로 포박하여 수십 명이나 잡아갔다.

이날 민영환(閔泳煥)이 자살하였다 하므로 나는 몇 동지와 함께 민 댁에 가서 조상하고 돌아서 큰길에 나서니 웬 40세나 되어 보이는 사람 하나가 맨 상투바람으로 피묻은 흰 무명 저고리를 입고 여러 사람에게 옹위되어서 인력거에 앉아 큰 소리를 내어 울며 끌려가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본즉 참찬 이상설(參贊 李相卨)이 자살하려다가 미수한 것이라고 하였다.

당초 상동 회의에서는 몇 번이고 상소를 반복하려 하였으나 으레 사형에 처할 줄 알았던 최재학 이하는 흐지부지 효유 방송(曉諭放送 : 달래서 풀어주는 것-편집자 주*)이나 할 모양이어서 큰 문제도 되지 않는 것 같았고 또 정세를 돌아보니 상소 같은 것으로 무슨 효과가 생길 것 같지도 아니하여서 우리 동지들은 방침을 고쳐서 각각 전국에 흩어져 교육 사업에 힘을 쓰기로 하였다.

지식이 멸여하고 애국심이 박약한 이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가 곧 제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전에는 아무 것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황해도로 내려와서 문화 초리면 종산 종산 서명의숙(文化 草里面 鍾山 西明義塾)에서 교원이 되었다가 이듬해 김용제(金庸濟) 등 지기의 초청으로 안악(安岳)으로 이사하여 그곳 양산학교(楊山學校)의 교원이 되었다.

종산에서 안악으로 떠나온 것이 기유년(己酉年) 정월 18일이라 갓난 첫딸이 찬바람을 쏘여서 안악에 오는 길로 죽었다. 안악에는 김용제, 김용진(金庸震) 등 종형제와 그들의 자질 김홍량(金鴻亮)과 최명식(崔明植) 같은 지사들이 있어서 신교육에 열심하였다.

이때에는 안악뿐이 아니라 각처에 학교가 많이 일어났으나 신지식을 가진 교원이 부족한 때라, 당시 교육가로 이름이 높은 최광옥을 평양으로부터 연빙하여 안악 양산 학교에 하계 사범 강습회를 여니 사숙 훈장들까지 강습생으로 오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있었다.

멀리 경기도, 충청도에서까지 와서 강습생이 4백여 명에 달하였다. 강사로서는 김홍량, 이시복(李始馥), 이상진(李相晉), 한필호(韓弼浩), 이보경[李寶鏡 : 지금 광수(光洙)], 김낙영(金洛泳), 최재원(崔在源) 등이요, 여자 강사로서는 김낙희(金樂姬), 방신영(方信泳) 등이 있었고, 강구봉(姜九峰), 박혜명(朴慧明) 같은 중도 강습생 중에 끼여 있었다.

박혜명은 전에 말한 일이 있는 마곡사 시대의 사형(寺兄)으로 연전 서울서 작별한 뒤에는 소식을 몰랐다가 이번 강습회에서 서로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는 구월산 패엽사(九月山 貝葉寺)의 주지였다. 나는 그를 양산 학교의 사무실로 인도하여 내 형이라고 소개하고 내 친구들이 그를 내 친형으로 대우하기를 청하였다.

혜명에게 들은즉, 내 은사 보경당, 하은당은 석유 한 초롱을 사다가 그 호부(好否)를 시험하노라고 불붙은 막대기를 석유통에 넣었다가 그것이 폭발하여 포봉당까지 세 분이 일시에 죽었고, 그 남긴 재산을 맡기기 위하여 금강산에 내가 있는 곳을 두루 찾았으나 종적을 몰라서 할 수 없이 유산 전부를 사중(寺中)에 붙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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