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공(김순) 墓誌銘과 墓碣銘에 대하여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6-03-15 00:10 조회1,940회 댓글0건본문
문영공(김순) 墓誌銘과 墓碣銘에 대하여
1)
1306년 9월, <고려국대장이안기>(高麗國大藏移安記)를 민지(1248-1326)가 撰하고, 김순(1258-1321)이 書하였다.
비의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鐵山(紹)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劉喜海의 海東金石存攷(고)에는 "大德10年9月閔漬撰 金恂書 在江原道淮陽府金剛山"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에도 기록되어 있다.
<고려국대장이안기>
선수 조열대부 한림학사(宣授 朝列大夫 翰林學士) 겸본국 광정대부 자의도첨의사사사 연영전대학사 동제수사 판문한서사(兼本國 匡靖大夫 咨議都僉議使司 延英殿大學士 同提修史 判文翰署事) 민지(閔漬) 지음.
-----
대덕(大德) 10년 병오년(충렬왕 32, 1306) 9월 일 적음.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판비서시사 문한학사(奉翊大夫 密直司副使 判秘書寺事 文翰學士) 김순(金恂)이 씀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국학대사성 숭문관학사(奉翊大夫 密直司副使 國學大司成 崇文館學士) 윤보(尹珤)가 전액(篆額)을 씀
고려국 금강산 성불난야 호송대장경 백실사문(高麗國 金剛山 成佛蘭若 護送大藏經 白室沙門) 석(釋) 일목(一牧)이 돌을 세움
선수 강서도 원주로 의춘현 대앙산 당대주지(宣授 江潟 袁州路 宜春縣 大仰山 當代住持) 전법허곡대선사(傳法虛谷大禪師) 희릉(希陵)
2)
1314년 2월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 사대장경기>도 민지가 撰하고, 김순이 書하였다.
비의 내용은 첨의찬성사 元瓘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사명산의 천동선찰(*강절행성 경원로 ?현의 사명산에 위치한 천동사를 말한다)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한림원직학사 조열대부본국중대광 수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판선부사 치사 민(閔)□□ 지음.
중대광 상락군 김순(金恂)이 글씨와 제액(題額)을 씀.
-----
연우(延祐) 원년(충숙왕 1, 1314 ) 2월 일
공덕주(功德主)는 대광 첨의찬성사 판총부사 치사(大匡 僉議贊成事 判總部事 致仕) 원관(元瓘)이고, 성해자조명종대사(性海慈照明宗大師) 화엄종주(華嚴宗主)로 항주로 고려혜인교사(杭州路 高麗惠因敎寺) 주지인 승려 혜복(慧福)이 비를 세움.
3)
1321년 8.21일 문영공(김순) 64세로 몰하였다. 10.14일 민지(閔漬)가 <김순 묘지명>을 撰하였다.
---지치(至治) 원년 신유년(충숙왕 8, 1321, 64세)에 재상을 임명하면서 어진 이를 뽑도록 하였는데 공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8월에 보문각대제학 상호군(寶文閣大提學 上護軍)을 더하였다. 그 달 21일에 병이 들어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4세이다.---
---영돈 등이 덕수현 마산(德水縣 馬山)에 무덤을 정하고 장례를 치르려고 하면서, 내(=민지)가 선공(=김순)의 친구라고 하여 공의 행장을 갖추어서 매우 간절하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내가 비록 병들었지만 차마 굳게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하고 글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묘지명>
---至治元年辛酉命相以賢擢公爲判三司事八月加寶文閣大提學上護軍至是月二十一日寢疾卒于第享年六十四---
---永暾等旣卜兆于德水縣馬山將葬也以予爲先公親舊具公之行狀乞銘甚切予雖病不忍堅拒受而銘之銘曰---
-----
원[大元] 지치(至治) 원년 신유년(충숙왕 8, 1321) 10월 14일
선수 조열대부 한림직학사 삼중대광 검교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여흥군(宣授 朝烈大夫 翰林直學士 三重大匡 檢校僉議政丞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驪興君) 민지(閔漬)가 짓다.
민지(閔漬)
1248(고종 35)∼1326(충숙왕 13).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默軒). 평장사 영모(令謨)의 5대손이며, 상정(祥正)의 아버지이다.
1266년(원종 7)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후(祗候)가 되고, 1279년(충렬왕 5) 전중시사(殿中侍史)를 거쳐 예빈윤(禮賓尹)이 되었다. 충선왕이 세자 때인 1290년 정가신(鄭可臣)과 함께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한림직학사 조열대부(翰林直學士朝列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
1321년(충숙왕 8) 다시 수정승(守政丞)이 되고 여흥군(驪興君)에 봉하여졌다.
---
그는 정가신이 지은 《천추금경록 千秋今鏡錄》 7권을 권보(權溥)와 교열, 증수하여 《세대편년절요 世代編年節要》라 이름하였고, 또 《본국편년강목 本國編年綱目》 42권을 편찬하였으나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
저서로는 《묵헌집》이 있다. 시호는 문인(文仁)이다.
4) 1942년 <김순 묘지명> 발견
김순묘지명(金恂墓誌銘)은 1942년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임계면(臨溪面) 가정리(佳井里) 마산(馬山) 동쪽 기슭에서 발견되었다.
<안동김씨보감>(1957년 간)에 묘지석 실물 사진이 실려 있다. 묘지석 실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고 하고 서체는 해서(楷書)라고 하는데, 아직 미확인이다.
<안동김씨 파보>
문영공 (휘순) 묘지석 발견 및 이장 경위
오호라 공의 묘소는 실전되어 未知何代而歲 壬午년(1942년) 봄에 개풍군 임계년 가정리 마산 동록 장씨 성을 가진 무덤 부근에서 誌石을 발견하여 奉審後欲爲[人+乃]舊守護卽 張姓之?惡非常勢
부득이 익년 癸未(1943년) 봄에 시흥군 안양시 관양1동 후록 양좌지원에 옮겨 모시었다. 이때 배위 제평군부인 양천허씨 영단을 설단하였다. 이 산은 익원공 16대손 讚源 소유 선산 내의 한 葬地로 헌납한 것이다.
이제 비석을 세우고 用閔公所撰誌文記之 盖閔公 史家臣匠 且當時托契深厚記實楷白 以後歲傳聞搜記 不敢窺其萬一者也 但恨綠於剝落 間有缺者 不敢恣意補識 然一 猶知其全鼎 ?瑕不害於[王+業]玉云[弓빼고彌]
공몰후 625년(1946년) 갑신 10월 일
문영공 21대손 若浩 謹識
문영공 21대손 舜默 謹書幷篆
문영공 22대손 達演 幷識
追記 : 그후 讚源씨 후손이 이 산을 타인에게 매도할 때에 문영공 묘 영역 300여평을 우리파 문중에 희사하여 제,안,익 3파 공동명의로 등기를 필하였다.
5) 1946년 건립한 <김순 묘갈>
1946년 문영공 묘 앞에 세운 묘갈은 몇해전(1942년) 발견된 묘지명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이는데,
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 부분이 왜 들어 있는지? 무슨 뜻인지? 알수없다.
문영공(김순)이 경순왕(김부)의 十五代孫 이라 적었다.
<현 묘갈>
重大匡判三司寶文閣大提學上護軍金公墓碣銘 (幷序)
---公諱恂字歸厚系出新羅王金傅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公爲金傅十五代孫而安東府卽其桑梓之鄕也---
중대광 판삼사 보문각 대제학 상호군 김공 묘갈명 (병서)
---공의 이름은 순(恂)이고, 자는 귀후(歸厚)이며, 가계가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 敬順王)에서 나왔다. 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공은 김부의 15대손으로 안동부(安東府)가 곧 그 고향이다.---
6) 1979년 대동보에 게재된 <김순 묘지명>
1979년 안동김씨 대동보를 간행시 문영공 묘지명을 실으면서
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 부분은 □□□□□□□□□□□□□□□□□□□ 로 처리하고,
十五代孫 은 十世孫 으로 정정했는데,
원래 묘지명에 따른 것인지? 임의로 처리된 것인지? 안타까울 뿐이다.
<묘지> 〔출전:『安東金氏大同譜』(1979)〕
重大匡判三司寶文閣大提學上護軍金恂 墓誌銘 (幷序)
---公諱恂字歸厚系出新羅王金傅□□□□□□□□□□□□□□□□□□□公爲金傅十世孫而安東府卽其桑梓之鄕也---
중대광 판삼사 보문각 대제학 상호군 김순 묘지명 (병서)
---공의 이름은 순(恂)이고, 자는 귀후(歸厚)이며, 가계가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 敬順王)에서 나왔다. □□□□□□□□□□□□□□□□□□□공은 김부의 10세손으로 안동부(安東府)가 곧 그 고향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