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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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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3-29 09:08 조회1,364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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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회>

 

 

 

      2. 불사춘(不似春)

 성립은 밖으로 나와 장지문을 닫고 섬돌로 내려섰다. 밖으로 나오자 축축한 밤바람에 코가 트이는 것 같았다. 그는 바람을 맞받으며 마당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음력 춘삼월이라 하나 비 그친 뒤이어서인지 밤바람이 귀에 싸늘했다. 앞서나간 어린 아우 정립이 마음이 불안한 듯 마당을 맴돌고 있다가, 그에게 다가와 뭔가 이야기할듯하더니 말을 삼키고 돌아섰다.
 성립은 뒷짐을 지고 마당을 서성였다. 밤바람에 정원수들의 신록들과 꽃잎들이 날려 왔다. 그는 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은행나무와 청매화 배롱나무 따위 정원수들이 울을 친. 그는 물기에 젖은 정원수들이 길게 늘어뜨린 어두운 그림자들의 뾰쪽한 끝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떨어진 청매화 꽃잎들로 담 밑은 수를 놓은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초희가 혼수상태에 빠진 사흘동안 내린 비로 두 그루의 청매화는 그 여린 꽃잎들을 반나마 잃고 있었다. 배롱나무는 아직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때 뒤쪽에서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났다. 초희…  성립이 방 쪽으로 돌아섰다. 옆에 따라와 있던 아우가 놀라 방으로 가는 것을 그는 가만히 제어했다. 장지문너머로 몇몇 그림자가 등피 불빛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곤혹과 번민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다시 신음소리. 성립은 그 신음소리를 외면하듯 뒷짐을 지고 돌아섰다. 문득 후드득 정원수들을 흔들고 와 얼굴을 때리는 한줄기 바람에 빗물이 묻어 있었다. 그 빗물에는 겨울비처럼 차가운 한기가 있었다. 그는 서성이던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 춘래불사춘…』
 그랬다. 봄 같지 않은 봄. 몇 년 동안 집안에 어두운 일만 계속 생기고 있었다. 그는 남들보다 일찍 소과관문을 넘었건만 계속 대과에 실패하고 있었고, 부친이 급서 하셨고, 이태에 걸쳐 아이 둘을 연이어 잃었고, 작년엔 외숙이 타계했고, 그 뒤를 따라가듯 처남마저 세상을 떴다. 몇 년째 웃음이라고는 없는 집. 이런 집안에 이 봄에 태어날 아이만이 그나마 남은 가족들에게 위안이었다. 그런데 그가 조산이라는 소식을 듣고, 산에서 돌아왔을 때 아이는 햇빛 한번 못보고 이미 세상을 떴고, 아내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 집안에 올 봄은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일까?
 초희의 신음소리가 멈추었다. 성립은 다시 방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짓문너머 불빛에 흔들리던 그림자들이 정좌한 수도승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내는 잠이 든 것일까? 아마 맨 안쪽에 아내 앞에 있는 그림자가 여의원일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신음이 멈추어도 여의원은 좀처럼 일어날 기미가 아니었다.
 성립은 그 그림자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제발 아내에게만은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그런데 마음이 왜 이렇게 불안할까? 그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다시 돌아서 마당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만약 이대로 아내가 가버린다면…. 그는 생각하기도 싫은 듯 세차게 고개를 젓고는 하늘을 본다. 흐리던 하늘은 개어있었고 구름사이로 둥그런 달이 얼굴을 내밀고 웃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 모레가 보름이었다.
 삼월보름. 모레면 성혼 십 주년. 십년 전 삼월보름. 마른냇골[乾川坊] 허대감댁 안채마당 초례청에서, 재색을 겸비한 규수라고 소문으로만 듣던 초희를 그는 2년을 기다려 신부로 맞았다. 신부는 큰 머리에 연지곤지를 찍고, 활옷[華衣]넓은 소매를 들어 양손을 넣고, 숙인 고개 아래 살짝 *註) 아미(蛾眉)를 찡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달처럼 환한 얼굴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는 둥근 얼굴이 아니라 갸름한 얼굴이었다. 아마 두식(頭飾)으로 한 큰 머리 때문이었을 터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보였다. 그랬다. 얼굴을 들어 미간을 폈을 때 보름달처럼 환하게 웃는 듯한 얼굴. 그 날, 그런 신부가 한없이 좋았다. 마치 보름달이 그의 가슴에 가득 들어온 듯.
 뒤에서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립은 소리나는 곳으로 돌아섰다. 어머니가 치맛단을 여미며 나오고, 여의원과 산파가 뒤이어 나왔다. 성마른 어린 아우가 그들에게 달려갔다. 아우 정립이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물었다.
   『 어머님, 형수님은? 』 아우 정립은 유난히 아내를 따랐다. 아마 천자문과 소학을 아내에게 배웠기 때문일 것이었다.
   『 장부가 왜 그렇게 경망스러우냐? 』어머니가 언제나처럼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정립을 꾸짖었다.
  그러나 마음이 궁금하고 불안하기는 성립도 마찬가지였다. 늙은 여의원을 보고 물었다.
   『 경과가 어떠한가? 』
   『 잠드셨습니다. 』
   『 나는 경과를 묻고 있는 것일세. 』성립이 추궁하듯 다시 물었다.
   『 문제는 하혈입니다. 지혈이 안 되는 경우에는… 』여의원이 말끝을 흐렸다.
   『 안 되는 경우에는? 』 성립이 다그치듯 묻는다.
   『 소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습니다만, 현재로서는 기다려 보는 수밖에는 도리가 』
   『 기다려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구… 』 성립은 신음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너무 심려는 말아라. 아직 절망적인 것은 아니지 않느냐. 인명은 재천이라 했으니…』어머니가 위로하며 말했다.
   『 어머니, 그럼, 형수님이 죽는다는 말이야? 』 아우 정립이 울먹이며 물었다.
   『 정립아, 너는 무슨 망측스런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느냐? 』어머니가 엄한 목소리로 정립을 나무랐다.

 

*註) 아미(蛾眉):미인의 아름다운 눈썹

댓글목록

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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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春來不似春' 날씨가 갑자기 추워서 오늘이 어울리는 단어 인가요.
연재 하시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덕분에 잘 보고있습니다.

김행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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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올리시는 정성들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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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할아버님의 애틋한 마음 엿보고 갑니다 .

김태완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완
작성일

  작가님에 대하여 이력 경력 그동안의 작품들 소개 등,
특히 추구하시는 셩향 등 자세히 소개 좀 부탁 드려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