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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의 전설 1 -김응하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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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6-03-29 14:35 조회1,574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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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의 전설 1 -김응하 장군 | :::철원에산다 2004/04/29 16:35
http://blog.naver.com/toyzman/100002105646

1.     김응하[1](金應河)장군의 정화(情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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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하 장군이 급제(及第)하기 전 24세 때의 일이다. 그는 이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사냥을 나가서 철퇴로 한 마리의 erharhk 표범 한 마리를 잡고 난 후였다.

 곰에서 웅담을 꺼내고 표범 가죽을 벗겨 짐을 챙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무꾼을 만났다.

“여보 젊은 양반, 이 고개를 넘어가면 무서운 땡초 소굴이 있소. 그논들은 먼저 사람을 죽여놓고 나서 물건을 빼앗는 잔인한 놈들이니 정신을 바짝 차립시시오”하고 일러 주었다.

 나무꾼이 땡초라 하는 무리는 죄를 짓고 도망(逃亡)친 사람들이 산중에 모여 사찰(寺刹) 등을 점령하고 승(僧)인 척 속여 낮이면 동냥을 다니고 밤이면 도적질을 하눈 불한당의 무리라고 말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김응하는 이 마을의 한 조촐한 기와집 문전에 다가서서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였다.

 주인은 근심에 찬 얼굴로,

“오늘 밤 우리집에 도둑떼가 오게 되어 있오. 만일 낯선 사람의 눈에 띄었다가는 당장(當場) 참화를 당하게 될 것이니 아예 다른 집으로 가 보시오.”하고 거절을 하는 것이었다.

 “도둑뗴가 온다구요? 그것 참 잘 되었습니다. 내가 다 막아 드릴 터이니 저녁밥이나 두둑히 먹여주시오.”하고 청했다. 그러나 주인은 “공연히 젊은 목숨을 귀신도 모르게 잃지 말고 일찌감치 피할 도리(道理)나 생각하시오.” 하고 김응하의 힘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난 김응하는 짐에서 표범 가죽과 웅담을 꺼내 이것을 모두 자기가 때려 잡았다고 보여주었으나 이것 역시 믿으려 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화가 난 그는 마당가에 있는 반 아름이나 되는 배나무를 두 손으로 거머쥐고 용을 쓰자 배나무는 뿌리채 뽑혀졌고 옆에 있는 비위를 후려 갈기니 배나무가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이 광경을 본 주인은 김응하가 천하장사라는 것을 인정(認定)하고 사랑방으로 맞아들여 상좌에 앉히고 주안을 대접하고 자기 집안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자기는 원래 경기도(京畿道) 가평(加平) 사람으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이곳으로 피난왔다가 눌러살게 되었다는 것과 자기에게 조카딸이 있다고 들려 주었다.

 조카딸은 서울 재상집안의 금지옥엽(金枝玉葉)같은 귀여운 딸로서 병 중이라 요양(療養)하기 위해 얼마전부터 자기집에 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산골에서는 보기드문 절색(絶色)이라 소문은 곧 산너머에 있는 땡초떼의 두목, 마달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마달은 그녀를 자기의 셋째 첩(妾)으로 달라고 하므로 어쩔 수 없이 한달전에 조카딸이 데리고 온 몸종을 조카딸로 꾸며 마달에게 시집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마달은 그 눈치를 채고 바로 오늘 밤 진짜 신부를 곱게 단장 시켜 신방을 차려 놓고 기다리지 않으면 집안식구를 모두 죽여서 분을 풀겠다고 전해 왔다는 것이다. 조카딸은 도적 괴수에게 몸을 더럽히기 보다는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고 몇 번이나 자결하려는 것을 죽더라도 신방에 들어가서 ㅈ도적에게 얼굴이라도 보이고 죽어야 집안에 책망이 돌아오지 않겠으니 제발 다른 식구들의 목숨을 위해서 신방에 들어 가라고 타일러 조카딸을 신방으로 들여 보내놓고 지금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일장 설화(說話)를 듣고 난 김응하는 치밀어 오르는 의분을 감출 길이 없어 자기가 대신 신부 노릇을 하겠다고 했다. 그는 술을 반동이나 마시고 나서 신부방에 들어가 웃통을 벗고 불을 끄고는 깔아 놓은 비단 이불에 누웠다.

 이윽고 대문 밖에서 떠들썩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안있어 쿵하고 마루에 올라서는 소리가 났다. 마달이 온 것이다. 마달은 방에 들어서자 김응하가 신부인줄 알고 달려들었다. 김응하의 쇠뭉치 같은 손이 마달의 멱살을 잡고 주먹이 올라갔다.

 “어이구! 이년이 사람 잡는다!”하며 마달은 젖먹던 힘을 다하여 몸을 빼려 하였으나 어느 틈에 도적의 배를 타고 앉은 김응하는 돌덩이 같은 주먹으로 북치듯이 함부로 마달을 들이쳤다.

 김응하는 몸을 일으키며 닥치는 대로 패거리를 때려 뉘니 마당에는 열 댓명이나 되는 땡초가 즐비하게 쓰러졌고, 마달은 틈을 타서 슬그머니 도망해 버렸다.

 이에 김응하는 신방에 불을 켜놓고 주인이 차려온 술과 고기를 양껏 먹은 후 부드러운 비단 이불속에서 하루를 평안히 지냈다.

 김응하는 날이 새자 주인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러자 주인은 펄펄 뛰며 김응하를 붙드는 것이었다.

 “괴수 마달은 도망하였고 십여명의 졸개가 죽고 혹은 병신이 되었으니 그 놈들이 기필코 원수를 갚으로 올 터인데 만일 임자가 떠넌다면 우리 집은 아주 쑥밭이 되고 말 것이오. 그러니 어떻게 하든지 우리집 식구를 살려주고 떠나야겠오.”하며 때를 쓰고 매달리는 것이었다. 이러고 보니 박절하게 잡아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우선 주인을 안심시켜 놓은 김응하는 그날 밥으로 도적의 소굴인 화엄사(華嚴寺)를 들이쳐서 잡혀간 몸종도 찾아오고 또 그 절의 본 주인이었던 스님들도 구해 주기로 작정을 했다.

 그날 밤, 늦으막하게 김응하는 철퇴를 차고 뒷산을 넘어 화엄사에 도착(到着)하니 때는 거의 자정(子正)이었다. 마달은 마침 집 주인 조카딸의 몸종을 끼고 있었고 다른 패거리도 여자를 끼고 자고 있었다. 김응하는 호통을 치면서 철퇴를 휘두르며 도적들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여러 방에 흩어져서 자던 땡초들은 제각기 낫과 도끼와 창과 몽둥이를 들고 쫒아나와서 김응하를 여러겹으로 에워쌌다. 보통사람이었다면 창끝에 가슴팍이 파산적처럼 꿰어졌을 것이지만 상대방이 천하장사 김응하인지라 펄쩍 뛰어 몸을 반공중(半空中)으로 솟구쳤다가 내려오면서 발길로 두놈을 냅다 차니 쿵하고 마당 가운데로 나가 떨어지면서 그대로 뻗어 버렸다. 이 광경을 본 땡초들은 그만 겁에 질려 달려들지를 못했다. 김응하는 단순에 여러 도적들을 때려 뉘었다.

 도적의 소굴을 단신(單身)으로 소탕한 김응하는 절에 불을 지르고 땡초 두목의 방으로 가서 몸종을 등에 업고 마을로 내려왔다. 김응하는 몸종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그 이듵날 일찍 주인에게 하직을 고했다.

 그렂 주인은 김응하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인도하여 그를 융숭히 대접하면서 비로소 자기의 내력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기의 성(姓)은 본시 한씨(韓氏)로 일찍이 과거를 하여 양주군수(楊州君守)를 지냈고 조카딸은 인목대비[2]의 부친되는 영흥 부원군(府院君) 김계남[3]의 손녀(孫女)로서 광해군[4](光海君)이 간신 이이첨, 정인홍 등의 참소를 듣고 김해부원군(金海府院君)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후 다시 그 집안 남녀노소를 모두 잡아 죽이기도 하고 혹은 관비로 만드는 바람에 겨우 몸을 피한 조카딸은 다만 몸종 하나만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도망해오게 되었다는 것과 죄인의 몸이라 드러내 놓고 상당한 가문에 시집가기도 어려운 형편(形便)인데 마침 김응하의 용맹(勇猛)을 보니 멀지않아 국가에 큰 공을 세워 이름을 조야(朝野)에 떨칠만한 사람일뿐 아니라 또 이번에 조카딸을 위험에서 구해 주었으니 이 역시 인연(因緣)이라 아주 오늘로 작수 성례(成禮)를 한 후 고향으로 데려가 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김응하는 자기의 처지(處地)와 형편(形便)을 이야기 하며 굳이 사양하였으나 주인은 끝내 듣지 않고 그날로 은밀(隱密)이 성례(成禮)를 시킨 후 김응하를 신방으로 몰아 넣어 버렸다.

 신방으로 들어간 그는 눈을 들어 단정이 앉은 신부를 살펴보았다. 비록 열 여섯살이라고 하지만 의젖하고 단아하여 예법있는 양반(兩班)의 규수가 분명할 뿐 아니라 용모 또한 아름다웠다.

 김응하는 기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어 신부의 손을 잡고 “색시는 서울 재상집에서 금지옥엽같이 자라 난 귀한 몸이요. 나는 시골의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인데 오늘 이와 같이 부부의 연분을 맺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맞지 않을 것 같소.”하고 털어 놓았다. 그러자 규수는 “만사가 다 하늘이 정한 인연이 아닙니까? 하물며 도적에게 죽게 된 몸을 구해 주신 은혜를 생각하오면 일생을 두고 갚을지라도 다 갚지 못할까 하옵니다.”하고 대답했다. 김응하는 현재로서는 변변치 못한 자기를 낭군으로 섬기려는 그녀가 고맙기 이를데 없었다. 신방을 한씨(韓氏) 집에서 보낸 김응하는 나흘째 되던 날 신부와 몸종을 데리고 형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웅담과 호피를 판 돈으로 따로 집 세칸을 장만하여 동생까지 네 식구가 단란한 신접살림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1] 충무공(忠武公) 요동백(遼東伯) 김응하 장군은 철원 출생으로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다. 25세 되는 1604년(선조 37)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 선천 군수(宣川郡守) 등을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 요청에 의해 강홍립(姜弘立)을 원수(元帥)로, 김경단(金景端)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를 파견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합류하여 좌영장이 되어 병사 3천명을 거느리고 수만 명의 적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명나라 신종(神宗)은 그를 요동백(遼東伯)에 봉하였으며, 조선에서도 1620년(광해군 12) 그를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2] 본관 연안(延安). 성 김씨(金氏). 존호 소성정의명렬(昭聖貞懿明烈). 휘호(徽號) 광숙장정(光淑莊定). 제남(悌南)의 딸,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어머니이다. 1602년(선조 35) 왕비에 책봉되었다.

[3] 김제남(金悌男)

[4] 조선의 제15대 왕(재위 1608~1623). 휘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 공빈(恭嬪) 김씨의 소생.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기 때문에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출처:철원군지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새로운 전설, 감사합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윤
작성일

 

은회씨 요즘은 시간이 나시나 봅니다
글 이나마 자주 뵈니 반갑습니다
밑에 주해 (1)중 3행의 김경단(金景瑞)은 김경서의 誤譯이라 생각 됩니다  철원 포충사 內의 김응하 장군 모정비 안내판에서의 오류의 연속이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