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5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6-04-01 10:34 조회1,361회 댓글0건

본문

 

      <제5회>

 

 

 

       3. 시첩(詩帖)

   초희는 잠에서 깨어났다. 약 기운에 취했기 때문이었을까? 전번과는 달리 깊은 잠, 꿈도 없는 잠을 잔 것 같았다. 머리 속은 여전히 몽롱하고 비를 맞은 듯  온몸이 젖어 있었으나 아랫배에 통증만은 좀 가신 것 같았다. 그녀는 깨어나서도 한동안 무연히 천정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온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만한 힘도.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환한 빛이 방안에 비치는 것으로 보아 낮인 것 같았다. 날이 샌 것일까? 그녀는 탕제를 마시고 잠든 기억 밖에 없었다. 
 그녀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소순이거니 했는데 남편이었다.  남편은 초희의 손을 잡고 모로 기울어져 잠들어 있었다. 남편 왼쪽에 책이 놓여져 있었다. 아마 남편은 그녀를 간병하며 책을 읽다가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기울어져 잠들어있는 남편의 모습이 어딘가 쓸쓸하게 보였다. 불쌍한 사람. 그녀는 남편을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무난한 여자를 만났으면 이렇게 마음고생을 않아도 되었을 사람인데.
 몸을 움직이자 아랫도리의 느낌이 축축했다. 그녀는 쓴 미소를 지었다. 어른이 이게 뭐람. 손을 아랫도리로 가져갔다. 손에 끈적끈적한 액체가 묻어 있었다. 빛에 비추어 보았다. 피였다. 피. 그때, 그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남편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얼른 손을 감추었다. 이불 속으로. 잠이 덜 깬 남편의 부스스한 음성이 따라왔다.
   『 깨어났소? 』
 남편이 그녀의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오늘이 며칠일까?
   『 오늘이 며칠이오이까? 』 초희의 목소리는 아주 미약했다.
   『 날이 새었으니 열나흘이겠구료. 』
  나흘이나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구나. 아니다. 아니다. 어젯밤에 일어났다. 극심한 산통으로 혼절한 후 어젯밤에 깨어났었다. 어젯밤 나를 깨운 것은 꿈이었다. 그런데 그 꿈은 악몽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늪에 빠져 있었다. 늪 저쪽 숲 그늘에 아이들이 있었다. 내가 잃은 아이들이었다. 불쌍한 내 아이들. 그녀는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아이들을 부르다 깨어났다. 그리고 사산이라는 소리에 다시 의식을 잃은 자신을 그녀는 겨우 기억해 내었다.
   『 우리 아이… 제가 또 당신에게 그리고 이 집안에 죄를 지었군요. 』
 초희는 아차 했다. 그녀가 평소 남편을 비꼴 때하는 말투였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착잡해졌다. 쌓인 미움과 불신이란 이래서 무서운가 보다. 남편은 어두운 시선으로 옆에 놓아 둔 그가 간밤에 읽던 책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왜 이럴까? 언제부터인가 남편을 보면 치밀어 오르는 미움을 갈무리하기가 어렵다.
  『 아이는 또 낳으면 될 것이오. 당신이 건강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
 또 낳으면 된다고? 이 사람은 우리가 다시 아이를 낳아도 될 만큼 아직 정이 남아 있는 부부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름만 부부일 뿐 이미 남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아니, 어쩌면 남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미움과 불신만 남아 있으니. 그런데, 어떻게 알고 왔을까? 누가 알렸을까? 시어머니?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대과가 다음 달인데. 그럼 소순이?
  『 산 일이 기한보다 한 달 반이나 빨랐는데,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
  『 만갑 아범이 조산이라고 한걸음에 달려 왔더구먼. 』
 역시 소순이었구나. 그런데 갑자기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고, 남편의 모습이 시아에서 멀어졌다. 비 오듯 땀이 흘러 눈을 찔렀다. 웬 땀이 이렇게 날까? 책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남편이 물수건으로 그녀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 몸은 어떻소? 』
  『 괜찮아요, 조금 땀이 날 뿐… 』
 그녀의 음성은 아주 미약했다.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 만큼.
 남편이 땀을 닦아주고 있는데도 연신 땀이 흐르고 있었다. 웬 땀이 이렇게 나는 걸까? 아직 초봄인데. 온 몸이 비에 젖은 것 같았다. 나는 정말 늪에 빠졌던 것은 아닐까? 바닥도 없는 그 늪에.
  『 안색이 너무 나빠. 맥을 좀 짚어 봅시다. 』
 남편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한다. 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떤다, 조금 전에 아랫도리에서 묻어 나오던 피가 생각나. 다행이 남편은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왼손 맥을 짚은 남편의 안색이 아주 어두웠다. 그때 밖에서 기척이 나고 소순이 들어왔다. 아침상을 들고. 남편이 그녀의 손을 놓았다. 빨리 옷을 갈아입고 싶다.
   『 피곤하실 텐데 가서 쉬세요. 』
 한동안 어두운 안색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 남편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