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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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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4-03 14:15 조회1,3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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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작가와 작품이 소개되어 있는 곳 : http://newsisfeel.com/

 

<제6회>

 

 

 

  『 그래, 내가 있으면 불편할 수도 있겠구먼. 모쪼록 몸 조섭(調攝) 잘 하시오. 』
 남편이 일어섰다. 그녀는 남편을 잡지 않았다. 그런데, 장지문을 열고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이 구부정하고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여태껏 보지 못하던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겨울에 봉은사에 찾아갔을 때는 만나러 내려오지도 않던 사람이 대과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자리한 것하며, 여태껏 보여주지 않은 자상한 태도가. 혹시 내가 큰 병에라도 걸린 것은 아닐까? 다만 땀을 좀 많이 흘리고, 기운이 없을 뿐인데. 피… 땀을 닦으려고 무의식적으로 왼 손을 내밀다 손에 묻은 피를 보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부르르 떤다. 피… 그러나 그것은 첫째와 둘째 아이를 낳을 때도 그랬다. 내가 자궁이 좀 약해서 그렇다고 여의원이 말했었다.
   『 아씨, 몸도 편찮으신데 또 책을 읽었어요? 』
  초희가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방안을 치우던 소순이 남편이 앉았던 방석 옆에 놓인 책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책, 남편이 보던 책. 그러나 그녀는 소순이 집어든 그 책의 표제를 보자 안색이 일그러졌다. 남편이 보던 책은, 운잠수좌(雲岑首座)에게 간청하여 겨우 받은, 운잠이 목판 뜰 글씨를 써준 자신의 시첩(詩帖)이었던 것이다.
  지난겨울 초희가 공부하러 들어간 남편을 위해 옷가지와 밑반찬을 마련하여 봉은사에 갔을 때, 남편은 봉은사 깊은 암자에 있었다. 사동(寺童)을 남편이 기거하고 있는 암자에 보내 자신이 왔음을 기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그녀를 만나러 본찰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서 뜻밖에도 *註)송운상인(松雲上人)을 시봉(侍捧)하여 와 있는 운잠수좌를 만났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아우를 시켜 그의 행처를 수소문하고 있던 터이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셋은 다담상(茶談床)을 마주하고 앉았다. 한양에 들를 일이 있을 땐 그들 사제는 봉은사에 머문다고 했다. 아마 봉은사는 송운상인이 방장으로 주석한 적이 있는 절이기 때문이리라. 운잠은 둘째 오라버니 상배(喪配)에서 본 이래 일 년만 이었다. 그는 많이 수척해 있었다. 도를 넘는 참선공부로 몸을 많이 상했다고 송운상인이 말했다.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 같아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마침 퇴고를 위한 세 필로 쓴 시고를 갖고 있었다. 초희는 곧 시집을 낼 계획이라고 조심스레 말을 꺼내고는, 목판(木板)을 뜰 저본 글씨를 운잠이 써 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운잠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세간과는 인연을 끊었다며… 초희는 놀랐다. 그 거절하는 성색에 한기마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곰곰이 듣고 있던 송운상인이 말했다. 써 주어라, 여기서 난설재(蘭雪齋)를 만난 것은 그대와 난설재의 인연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 일지어니. 운잠은 스승의 명이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가 내미는 시고를 받았다.
  이튿날 그녀는 산을 내려왔다, 나중에 아우를 보내 운잠이 글씨를 쓴 시고(詩稿)를 받기로 하고. 산을 내려오는 초희의 마음은 착잡했다. 그녀를 배웅할 때 운잠이 한 말 때문이었다. 그대의 시를 세상에 내놓는 것은 업(業)을 짓는 것이 될 것이오. 밤새 그녀의 시를 통독하며 내린 결론이었다고 운잠은 말했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운잠이 그녀의 시에 대해서 항상 우호적인 평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애정이 있는 평이었다.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된 것일까? 운잠도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시고는 석달 후에 왔다. 시고는 행서에 해서를 곁들여 쓰여 있었다. 십 년 만에 다시 보는 운잠의 글씨, 그러나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글씨였다. 그때는 방정하고 전아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번에는 담박하면서도 고졸(古拙)하여 세속을 벗어난 듯한 무심함이 깃 든, 그러면서도 세상을 향하여 서릿발을 세우는 골기가 느껴지는 글씨였다. *註)청사(淸沙)선생이나 봉래선생이 감탄했다더니,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그런데, 그 글씨를 남편이 봐 버렸다. 운잠이 쓴 글씨로 세상에 시집이 나오기도 전에. 그녀는 곤혹스러웠다. 내 잘못, 내 잘못이다. 눈에 띄지 않게 시첩을 잘 갈무리해 놓지 못한 내 잘못. 그러나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 그나마 운잠이 아우를 통해 그가 글씨를 쓴 시고와 함께 보낸 서찰을 시첩에 끼워 넣어두지 않은 것이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초희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운잠이 뭐라고 하든, 남편이 뭐라고 하든 내 마음은 이미 결정이 되었다 시집을 출판하기로... 다만 남편이 엉뚱한 상상이나 않았으면 좋으련만. 우선 옷부터 갈아입자.
   『 소순아, 나 옷 좀 갈아 입혀다오. 』

 

 註)
 *송운상인(松雲上人 1544-1610)선승. 경남 밀양산. 사명당(泗溟堂), 유정(惟政)등 다른 법호도 있다. 1561년 승과 급제. 글씨에 능했고 임란시 전공이 높고 전쟁이 끝난 뒤 일본에 잡혀간 포로쇄환에도 공이 있다.
*청사(淸沙1543-1605) 한호의 호. 송악(개성)산. 석봉이라는 호도 있다. 자는 경홍(景洪). 조선전기 사대명필 가운데 일인. 출신이 한미하여 1567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한동안 방황하다 중년 이후는 오랫동안 사자관으로 있었고, 임란시 수많은 외교문서를 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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