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8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6-04-08 18:10 조회1,347회 댓글0건

본문

 

<제8회>

 

http://newsisfeel.com/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을 이룬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자꾸만 뇌리에 아내에 대한 미움의 연기가 피어올랐던 것이다. 그는 그 연기를 걷어내듯 이불을 걷고 서안 앞에 앉았다. 어머니 말처럼 대과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내에게 보란듯이 이번 대과에는 반드시 입격해야 할 것 같았다.
 옷을 추스르고 서가에서 맹자를 뽑아 진심장(盡心章)을 서안 위에 펼쳤다. 그리고는 서안 위에 놓인 연적에 물을 붓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서책의 글씨를 보자 어젯밤 시첩에서 본 글씨의 서늘한 골기가 떠올라 자신도 글씨를 쓰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필사(筆寫)는 마음이 산란할 때 그가 하는 공부방법이기도 했다. 그는 서안 위에 습자지를 펼치고, 방모(方毛)에 먹을 찍어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써 내려가던 붓을 멈추고, 자신이 쓴 글씨를 보고는 쓰게 웃었다. 어제 본 글씨에서 느낀 서늘한 골기는커녕 비슷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붓을 들어 계속 써 내려갔다. 대과가 얼마 남지 않았고 맹자는, 특히 진심장은 책(策)의 논제가 출제되는 빈도가 높은 장구(章句)였다.
 그러나 십 여 쪽 이상을 써내려 가다 그는 다시 붓을 멈추고 말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젯밤 아내 시첩에서 읽은 시를 습자지에 쓰고 있었던 것이다. 농조아라, 농조아. 아내가 시집을 내려하고 있다. 그러나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가슴이 답답했다.
 그때 밖에서 행랑아범의 기척이 있어 점심 때문이겠거니 하는데 손님이 오셨는뎁쇼, 라는 전갈이었다. 그는 붓을 놓고 습자한 종이를 옆으로 밀었다. 문을 열었다. 밖은 화창한 햇살로 가득한 한낮이었다. 손님은 계미년(1583) 이후 다소 소원해진 이종제(姨從弟) 신흠(申欽)이었다.
  『 아니, 자네가 어쩐 일인가? 』
  『 왜 난 이 집에 오면 안 되우? 』
 신흠이 그의 맞은편에 좌정하기를 기다려 행랑아범이 점심을 어떻게 할지를 물었다. 그는 점심생각이 없었다. 신흠은 먹고 왔다고 말했다. 그는 술상을 봐 오라 일렀다.
  『 대낮부터 무슨 술이우? 차나 마시면 될 것을. 』
  『 우리가 언제 때를 가려 술을 마셨던가?  그런데, 자네야말로 무슨 바람이 불어 대낮엡 』
  『 미운 털 박힌 놈은 바람 부는 대로 다니는 법 아니겠소? 』
 신흠이 씁쓸히 웃으며 대꾸했다.
 하인이 술상을 들여왔다. 둘은 번갈아 상대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미운털이라. 하긴 미운털이 박혔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게 그의 입장이리라. 일찍부터 듣던 준재란 명성에 걸맞게 삼 년 전 스물 하나에 등과 한 신흠은, 등과 전에 이이(李珥)를 옹호한 것이 집권동인들의 눈 밖에 나 소과 입격자나 맡는 학유(學諭)나 훈도(訓導) 참봉(參奉)따위 미관말직을 떠돌다 얼마 전에는 더럽다고 그 관직을 던져 버렸다.
  『 그래도 자네는 나보다 나으이. 자네에 비하면 난… 』
  성립이 자조적으로 말하며, 잔을 비웠다.
   『형님답지 않은 소리! 』
 신흠이 술잔을 소리나게 주안상에 놓으며 말했다.
  『 아닐세, 난 바보임에 분명해. 이 나이 먹도록 아직 이 모양이니… 』
  『 자학(自虐)마오. 퇴계공은 서른넷에야 등과 했소. 형님은 이제 겨우 스물여덟이우. 더구나 삼 년 동안 시묘를… 』
  『 그만하게. 위로 않아도 되네. 』
 성립이 다시 잔을 비우며 대답했다.
  『 참, 이모님께 들었는데, 셋째아이를…, 그리고 산모마저 위독하다면서? 』
  『 …그렇다는군. 』
 그는 남의 이야기하듯 말하고, 어두운 얼굴로 다시 술잔을 비웠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성립이 어두운 안색으로 술잔만 기울이기 때문이었다. 성립의 얼굴은 고통과 번민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신흠은 그 침묵이 어색했던 모양으로 성립이 옆에 밀어놓은 습자한 종이를 넘기다 성립이 쓴 시에 시선을 멈추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