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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경순왕과 김선평과 김순묘지명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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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4-09 00:28 조회1,472회 댓글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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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敬順王)

■ ?∼979

■ 신라 제56대왕

■ 재위 927∼935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 문성왕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혹은 효종이 할아버지라는 설도 있음.)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며, 할아버지는 의흥대왕(懿興大王)으로 추봉된 관○(官○)이다.

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들이 둘 있었다.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이다. 고려에 항복한 뒤에 왕건의 큰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하였다.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 후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하여 수십일을 머물렀다. 왕건은 부하들에게 질서와 규율을 지키도록 하니, 수도의 아녀자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고 한다.

935년 그는 고려에 신라를 넘겨 줄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고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그가 신하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했는데, 그 지위는 태자의 위였다. 왕건은 또 그에게 녹(祿)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員將)을 모두 등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다.

무덤은 장단에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高麗史節要

 

김선평(金宣平)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때 공신. 본관은 안동.

930년(태조 13) 태조가 견훤(甄萱)과 싸울 때, 안동에서 권행(權幸)·장길(張吉)과 더불어 태조를 도운 공으로 대광(大匡)에 임명되었다. 뒤에 벼슬이 아부(亞父)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高麗史, 新增東國輿地勝覽. 〈李貞信〉


김순(金恂, 1258-1321)

---지치(至治) 원년 신유년(충숙왕 8, 1321, 64세)에 재상을 임명하면서 어진 이를 뽑도록 하였는데 공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8월에 보문각대제학 상호군(寶文閣大提學 上護軍)을 더하였다. 그 달 21일에 병이 들어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4세이다.

---영돈 등이 덕수현 마산(德水縣 馬山)에 무덤을 정하고 장례를 치르려고 하면서, 내(=민지)가 선공(=김순)의 친구라고 하여 공의 행장을 갖추어서 매우 간절하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내가 비록 병들었지만 차마 굳게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하고 글을 짓는다.

---


10.14일 민지(閔漬)가 <김순 묘지명>을 撰하였다. 그 내용중에 다음 기록이 우리 문중의 오랜 의문으로 남아 있다.


---公諱恂字歸厚系出新羅王金傅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公爲金傅十五代孫而安東府卽其桑梓之鄕也---

---공의 이름은 순(恂)이고, 자는 귀후(歸厚)이며, 가계가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 敬順王)에서 나왔다. 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 공은 김부의 15대손으로 안동부(安東府)가 곧 그 고향이다.---


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 부분중

‘內孫’‘족친’으로 볼수 있다. 지금도 같은 집안을 표현하는 말로 종친, 현종, 종인, 족친, 일가 등 여러 가지가 있으므로 1321년 당시에도 여러 표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중의 한 표현으로 볼수 있다.


따라서 상기 부분은

---공의 이름은 순(恂)이고, 자는 귀후(歸厚)이며, 가계가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 敬順王)에서 나왔는데, (김부의) 족친으로 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을 지낸 金宣平이 있다. 공은 김부의 15대손으로 안동부(安東府)가 곧 그 고향이다.---


즉, 경순왕 김부와 김선평은 동시대 인물로, 가까운 선대에서 갈린 한 일가사람으로 볼수 있다.



댓글목록

김태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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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3태사 중에 한분인 김선평은 시대적 배경으로 봐서 경순왕 김선평 왕건과 동시대(935년)의 인물이다. 고려 개국에 큰 역할을 한 분들이다. 경순왕과 김선평은 몇촌인지는 몰라도 한 할아버지의 자손인 (內孫)의 관계였던 것은 분명하다. 민지공께서 문영공(김순)의 묘지명을 찬하며 고려 개국에 크게 공헌한 두분(경순왕,김선평)을 부각시켜 주신게 아닌가 판단된다. 적어도 경순왕과 김선평은 내손의 관계 즉 할아버지나 증.고조부님가 한 할아버지 였을 것으로 봐야 하고 이에 대한 연구는 정밀하게 해야 할 것이다. 전 김윤회 님의 일방적 판단은 매우 잘못된 것이며 역사의 사실과 기록을 그렇게 검증없이 하면 안 될 것이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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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만에 뵙습니다.
정겨운 웃음으로 맞아 주시던 아저씨의 모습을
요즘은 우째 자주 뵐 수가 없는지...
늘 함께 해 주시면 에너지를 충전할 것 같은데..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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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완님! 누구신가요? 연락 바랍니다. 010-2206-4986

김태완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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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일가, 종친, 현종, 종인, 족친등의 표현은 촌수를 따지기 어려울 만큼 멀어져 있을 때  사용한다, 즉 안동김씨라면 어느 표현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내손이라함은 손자(孫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예를 들면, 이태조(이성계)의 내손이라면 이성계의 손자들로써 방원이 낳은 양영대군, 효령대군, 창령대군(세종)과  방석등이 낳은 대군들간에 내손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다. 좁은 의미로는 손자인 4촌의 관계이다. 좀더 넓은 의미로는  6촌 8촌의 관계도 내손의 관계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할아버지나 증조부, 고조부까지의 범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태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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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公諱恂字歸厚系出新羅王金傅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公爲金傅十五代孫而安東府卽其桑梓之鄕也...

공의 이름은 순(恂)이고, 자는 귀후(歸厚)이며, 가계가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 敬順王)에서 계출하였다. (김부)와 내손관계인 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을 지낸 (자랑할만한) 金宣平이도 있다. 공(김순)은 김부의 15대손으로 안동부(安東府)가 곧 그 고향이다.---
좀 수정을 했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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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公諱恂字歸厚系出新羅王金傅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公爲金傅十五代孫而安東府卽其桑梓之鄕也
공의 휘는 순(恂)이고, 자는 귀후(歸厚)이며, 가계가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 敬順王)에게서 나왔다.
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
공은 김부의 15대손이며, 안동부(安東府)는 곧 그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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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사전에서는 ‘내손’을 ‘현손의 아들’이라 풀이하는데, 고려시대에는 누구를 ‘내손’이라 했는지 궁금하던 차입니다.
  과문하여 그 당시에 사용한 ‘내손’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하다가 &lt;파한집&gt;에서 그 낱말을 보았습니다.
  이인로는 문영공보다 100년 정도 앞선 시기에 살았던 사람이므로 낱말 뜻이 변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중약과 이담지의 계보를 확인하면 국어사전의 풀이가 맞는지, 또 다른 뜻이 있는지 알 수 있으련만, 사정이 여의치 못해 미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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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회 대부님과 태완 아저씨 두 분 견해대로 경순대왕과 태사 김선평 공은 동시대를 살았던 분입니다. 국어사전 풀이대로 ‘내손’을 ‘현손의 아들’이라 하면 앞뒤가 안 맞네요. 그러면 경순대왕과 김선평 공의 계대상 항렬을 가리키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lt;파한집&gt; 中 17
-전략-
나의 벗 이담지(李湛之)는 바로 좌사(左司)의 내손(來孫)으로 내게 그 진필(眞筆)을 보여 준 일이 있다.
-하략-
※ 좌사(左司) : 이중약(李仲若)

■내손(來孫) : 현손(玄孫)의 아들.
■문영공 : 1258-1321(고종45-충숙왕8)
■이인로 : 1152-1220(의종6-고종7)
■이중약 : ?∼1122(인종 즉위년)
■이담지 : 생몰년 미상. 고려 명종ㆍ신종 때의 문인.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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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 죄송합니다. 그렇군요. 제가 잘못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타가 났습니다.
국어사전의 '내손'은 '來孫'이고, 이중약과 이담지의 기록은 '內孫'입니다. 정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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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파한집&gt; 中 17
-전략-
나의 벗 이담지(李湛之)는 바로 좌사(左司)의 내손(內孫)으로 내게 그 진필(眞筆)을 보여 준 일이 있다.

김태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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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김윤식님께
잘 보았습니다.
그러나 내손의 한자가 다릅니다. 윤식님이 찾은 래손(來孫)은 손자의 손자의 아들이므로 5대손을 말하는 단순 지명(指名)명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손(內孫)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들 - 손자 - 증손자 - 고손자 - 현손자 - 래손자 입니다.
※ 좌사(左司) : 이중약(李仲若) ■내손(來孫) : 현손(玄孫)의 아들.
(이 내용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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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예, 아저씨. 來孫이 아니라, 內孫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중약과 이담지의 계보가 內孫 관계라는 것을 고려하면 경순대왕과 김선평 공과의 관계를 유추하는 데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