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10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6-04-12 18:13 조회1,600회 댓글0건

본문

 

<제10회>

 

 

 

     5.목란배

   초희는 방안에 덩그러니 혼자 누워 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기려는 눈을 겨우 참으며. 수마(睡魔)라더니, 그 수마가 내게 온 걸까. 도대체 웬 잠이 이렇게 쏟아진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다 섬칫 몸을 떨고 다시 눈을 뜬다. 잠들면 다시는 못 일어 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것은 본능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안돼, 다시 잠들어서는 안돼.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초희는 오전은 내내 정신이 맑았다. 수심에 찬 얼굴로 옆에서 간병하고 있는 소순을 위로하는 여유마저 보일 수 있었다. 점심 무렵에 극심한 공복감이 왔다. 아침에 없던 식욕이었다. 마침 온 여의원의 조언을 받아 소순이 준비해 놓은 전복죽을 데워왔다. 그런데 더운 전복죽이 몇 술 속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아랫배에 극심한 통증이 왔고, 이어 비릿한 내음과 함께 하혈이 왔고,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초희가 다시 깨어났을 때에 어두운 음성으로 낮게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음성이 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뜰 기운마저 없었다.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가 가끔 부분적으로 들렸다. 음성으로 보아 시어머니와 여의원이였다. 남편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대화 중간 중간에 소순의 소리 죽인 흐느낌이 들렸다. 그녀는 대화 내용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미루어 보건데 자신에게 어떤 끝이 왔음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할 만큼 담담했다. 마치 그 끝을 알고 있었던 듯.
  초희가 깨어났을 때 진맥을 하는 여의원의 표정과 말씨는 밝았다. 그러나 초희는 단박에 그 표정과 말씨가 꾸민 것임을 알았다. 그녀는 여의원에게 자신의 병세를 묻지 않았다. 묻더라도 바르게 답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 송씨는 자상하고 근심스러운 말씨로 그녀의 병세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초희는, 평소와는 다른 시어머니의 태도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끝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자꾸 눈이 감겼다. 잠들지 않으려면 어딘가 시선을 둘 곳이 있어야 했다. 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햇살. 장지문을 투과해 들어온 봄 햇살이 눈에 부셨다. 햇살은 방바닥에 몇 무리의 빛의 동그라미를 만들며 놀고 있었다. 초희는 그 빛 무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 빛 놀이들을 보던 초희는, 그 빛들을 한 움큼 손에 잡아보고 싶어졌다. 그녀의 아이들이 살아있을 때 아이들과 함께 하던 버릇대로.
  그녀는 이불 속에서 손을 내밀어 그 빛 무리를 잡으려했다. 그러나 빛은 저만큼, 그녀의 손닿지 않는 곳에서 춤추고 있다. 내민 손이 쑥스러워졌다. 그녀는 몸을 움직이어 빛 있는데 까진 가지 않았다.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득 손으로 얼굴을 만져본다. 얼굴에는 여전히 흥건한 땀. 그렇지만 아랫배 통증은 여의원이 제조한 탕제를 마시고 난 후 한층 가시었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나른하고 기력이 하나도 없고 자꾸만 눈이 감겼다.
 다시 눈이 감긴다, 자신도 모르게. 그러나 그녀는 애를 써서 감기는 눈을 겨우 겨우 뜬다. 다시 빛의 동그라미들이 눈앞에 와 있었다. 그녀는 그 빛 놀이들을 보고만 있었다. 빛 놀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데 소순은 왜 이렇게 늦는담.
 여의원이 저녁때 오겠다며 자리를 떠나고 난 뒤에도 시어머니는 초희 옆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이마나 맥을 짚어보거나 땀을 닦아주며 혹은 이불깃을 여미어 주면서, 또 때때로 기분은 어떠냐 혹은 특별히 먹고 싶은 것은 없느냐고 말을 건네면서. 태도로 보아 시어머니는 저녁때까지 있을 품새였다. 그러나 초희는 마음이 불편했다. 전에 없던 따뜻한 말씨나 그녀를 위한 배려가 거북스럽고 불편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혼자 있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할 일이 있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
  초희는 단도직입적으로 시어머니에게 말했다. 혼자 있고 싶다고. 시어머니는 처음엔 뜨악한 표정을 짓더니 그래 환자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가장 나은 간병일 테지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소순에게 그녀를 잘 간병하라 이르고 선선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시어머니가 안채로 돌아 간 것을 확인한 뒤에 그녀는 소순을 옆에 앉히고 말했다. 마른 냇골에 가서 아우를 불러오라고. 다른 하인을 시키지 말고 직접 가라고.
 소순은 아픈 아씨를 두고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정색을 했다. 초희는 소순을 엄히 나무랐다. 남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직접가야 한다고. 그러나 소순은 완강했다, 남편이 있으면 남편을 보내겠다고. 만갑아범이라면 믿을 수 있긴 했다. 그런데 소순이 나간지  두 시진(時辰)이 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걸로 보아 직접 간 모양이었다. 남정네 걸음으로 갔다면 벌써 돌아오고 남을 시간이었다.
 초희는 은근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녀는 문갑 위에 놓인 물시계를 보았다. 유시(酉時)에서 세 각(刻)전이었다. 아낙이어도 재빠른 소순의 걸음이면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이었다. 혹시 소순이 친정어머니에게 미주알 고주알 그녀의 건강상태를 일러 어머니의 심기를 흔들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하는 걱정이 일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