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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원공 연보자료15 (52세, 13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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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4-12 23:24 조회1,432회 댓글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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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세) 1392년 공양왕3, 조선태조1년


<1월>

고려사절요 제35권 /공양왕 2(恭讓王二) /임신 4년(1392), 대명 홍무 25년

○ 봄 정월에 조사(詔使)에게 수창군에서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였는데, 밀직사 이염(李 恬)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이어서 찬성사 조준(趙浚)ㆍ판개성부사 안익(安翊), 예문관 대제학 유구(柳玽), 지문하 김사형(金士衡)을 이에 대신하게 하고 성헌에 명하여 순군부와 함께 같이 국문하게 하였다.



<4월>

고려사절요 제35권 /공양왕 2(恭讓王二) /임신 4년(1392), 대명 홍무 25년

4월 ○ --- 태종이,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고 몽주가 돌아감에 미쳐서 곧 조영규(趙英珪) 등 4,5명을 보내어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쳐서 죽였다.

태종이 또 화(和) 등과 의논하여 공정왕(恭靖王 정종(定宗))을 보내어 아뢰기를, "만약 몽주의 당을 신문하지 않으면 신등을 죄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대간을 순군옥에 가두고, 또 이르기를, "외방으로 귀양보냄이 옳을 것이며, 국문할 필요는 없다." 하다가,


태조 001 총서 131

/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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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후에 판삼사사(判三司事) 배극렴(裵克廉)·문하 평리(門下評理) 김주동(金湊同)·순군 제조(巡軍提調) 김사형(金士衡) 등에게 명하여 대간을 국문하게 하니,

좌상시(左常侍) 김진양(金震陽)이 말하기를,

“몽주·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가 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조호(趙瑚)를 보내어 신(臣) 등에게 이르기를, ‘판문하(判門下) 이성계(李成桂)가 공(功)을 믿고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다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보좌역(補佐役)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 이성계를 도모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숭인·이종학·조호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조금 후에 김진양과 우상시(右常侍) 이확(李擴)·우간의(右諫議) 이내(李來)·좌헌납(左獻納) 이감(李敢)·우헌납(右獻納) 권홍(權弘)·사헌 집의(司憲執義) 정희(鄭熙)와 장령(掌令) 김묘(金畝)·서견(徐甄), 지평(持平) 이작(李作)·이신(李申)과 이숭인·이종학을 먼저 먼 지방에 귀양보냈다.


善竹橋(선죽교) 익원공 김사형

曾聞周國伯夷淸

일찍 주나라 백이숙제의 결백함을 들었는데

餓死首陽不死兵

그들은 수양산에서 주려 죽은 것이지 병정손에 죽은 것이 아니다

善竹橋邊當日事

선죽교 다릿가에 그날 당한 일은

無人扶去鄭先生

정선생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던가



고려사절요 제35권 /공양왕 2(恭讓王二) /임신 4년(1392), 대명 홍무 25년

○ 조준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 백극렴을 수문하시중으로, 조준을 찬성사로, 설장수(偰長壽)를 판삼사사로, 이원굉(李元紘)을 삼사 좌사로, 김사형(金士衡)삼사 우사로 삼고,---


이어 삼사 좌사(三司左使)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를 제배(除拜)하니 이 이후로부터는 본조(本朝, *조선)에 들어왔다.



<7월>

태조 001 01/07/17 (병신) 001

/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16일(을미)에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김사형(金士衡)·---·남은(南誾)·---정총(鄭摠)---조견(趙狷)---오사충(吳思忠)---함부림(咸傅霖)·한상경(韓尙敬)---등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邸宅)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마을의 골목에 꽉 메어 있었다.


--- 이에 이색(李穡)·조민수(曹敏修) 등이 신우(辛禑)의 처부(妻父)인 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그 아들 창(昌)을 도와 왕으로 세웠으니, ---전일에, 신우(辛禑)의 악(惡)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인데, 그 무리 이색·우현보(禹玄寶) 등은 고집하고 미혹(迷惑)하여 깨닫지 못하고 신우(辛禑)를 맞아 그 왕위를 회복할 것을 모의하다가 간사한 죄상이 드러나매, 그 죄를 모면하려고 하여 그 무리 윤이(尹彝)·이초(李初) 등을 몰래 보내어 중국에 도망해 들어가서, --- 이로 말미암아 간사한 무리들이 중앙과 지방에 흩어져 있으면서 더욱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김종연(金宗衍)은 도피 중에 있으면서 당(黨)을 결성하여 난리를 꾀하고, 김조부(金兆府) 등은 안에 있으면서 그 변(變)에 응하기를 도모하여, 화란(禍亂)의 일어남이 날마다 발생하여 그치지 않았는데,



태조 001 01/07/28 (정미) 005

/ 홍영통·안종원·배극렴·조준·이화·윤호·정도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문하부(門下府)에 교지를 내려 --- 김사형(金士衡)좌명 공신 문하 시랑찬성사 판팔위사 상락군(佐命功臣門下侍郞贊成事判八衛事上洛君)으로, 정도전(鄭道傳)을 좌명 공신 문하 시랑찬성사 의흥친군위 절제사 봉화군(佐命功臣門下侍郞贊成事義興親軍衛節制使奉化君)으로, ---으로 삼았다.



<8월>

태조 001 01/08/20 (기사) 002

/ 개국 공신의 위차를 정하다

--------------------------------------------------------------------교지(敎旨)로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위차(位次)를 정하게 하였다. ---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裵克廉)·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 등은 천명(天命)의 거취(去就)와 인심(人心)의 향배(向背)를 알고, 백성과 사직(社稷)의 대의(大義)로써 의심을 판단하고 계책을 결정하여, 과궁(寡躬)을 추대하여 대업(大業)을 함께 이루어 그 공이 매우 컸으니, 황하(黃何)가 띠[帶]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과 같이 작게 되어도 잊기가 어렵도다! ---위에 말한 사람들에게는 차례대로 공신(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그 포상(褒賞)의 전례(典禮)는 유사(有司)에서 거행할 것이다.



<9월>

태조 002 01/09/16 (갑오) 002

/ 공신 도감에서 개국 공신의 포상 규정을 상언하니 윤허하다

--------------------------------------------------------------------공신 도감(功臣都監)에서 상언(上言)하였다.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裵克廉)과 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 등 16인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의 소재(所在)를 환하게 알고서 의논과 계책을 결정하여 전하를 추대하여 왕업을 이루었으니, 이것은 비록 전하의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이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마음에 따른 것이겠지마는, 역시 일세(一世)에 뛰어난 신하들의 충성을 다하고 대의에 힘써서 천명을 도와 나라를 세운 것[佐命開國]이니, 진실로 성상의 교서(敎書)에 이른 바 그 공이 매우 커서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礪]과 같이 작게 되도록 길이 공을 잊기 어렵다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일등공신(一等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전각(殿閣)을 세워서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을 기록하고, 작위(爵位)를 봉하고 토지를 주며, 그 아버지·어머니·아내에게는 3등을 뛰어 올려서 봉작(封爵)을 증직(贈職)하며, 직계 아들에게는 3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蔭職)을 주고, 직계 아들이 없는 사람은 생질(甥姪)과 사위에게 2등을 뛰어 올려서 음직을 주고, 전지 몇 결(結), 노비 몇 구, 구사(丘史) 7명, 진배파령(眞拜把領) 10명을 주고 처음 입사(入仕)함을 허락하고, 적장(嫡長)은 대대로 이어받아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고, 자손은 정안(政案) 내에 일등 공신 아무개의 자손이라고 자세히 써서, 비록 범죄가 있더라도 사면(赦免)이 영구한 세대(世代)에까지 미치게 할 것입니다.

---임금이 이를 윤허(允許)하고, 또 명하여 일등 공신 배극렴과 조준에게 식읍(食邑) 1천 호(戶), 식실봉(食實封) 3백 호, 전지 2백 20결, 노비 30구를 내려 주고, 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에게는 전지 2백 결, 노비 25구를 내려 주고,


태조 002 01/09/26 (갑진) 002

/ 배극렴 등이 여러 왕자들에게 규정된 과전 외의 전지를 더 주도록 청하다

--------------------------------------------------------------------좌시중(左侍中) 배극렴·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 등이 아뢰었다.


<10월>

연려실기술 별집 제1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제향(祭享)

○ 태조 1년 10월에 임금이 친히 종묘에 제사드렸다. 하루 앞서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사당송경(松京)의 종묘 동문 밖에 이르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제삿날에 임금이 면류관ㆍ곤룡포를 갖추어 입고 나가 친히 술을 부어 강신(降神)하고 신위에 잔을 올렸고, 세자가 아헌(亞獻)하고, 우의정 김사형(金士衡)이 종헌(終獻)하였다.



<12월>

태조 002 01/12/02 (무신) 001

/ 친히 배극렴의 빈소에 가서, 장례를 주관하던 안순을 불러 조문하다

--------------------------------------------------------------------임금이 친히 배극렴(裵克廉)의 빈소(殯所)에 나아가서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사형(金士衡)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임금이 슬퍼하기를 매우 심하게 하고 주상(主喪)하는 사람을 불러서 조문(弔問)하였다. 배극렴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누이의 외손(外孫)인 안순(安純)이 상사(喪事)를 주관하였다.

 

태조 002 01/12/13 (기미) 001

/ 조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왕우 아들의 성을 외가를 따라 노씨로 하게 하다

--------------------------------------------------------------------조준(趙浚)을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으로 삼고, 김사형(金士衡)문하 우시중(門下右侍中) 상락백(上洛伯)으로 삼고, 식읍(食邑)은 1천 호(戶), 식실봉(食實封)은 3백 호로 하고, 권중화(權仲和)를 예문춘추관 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로 삼고, 정도전(鄭道傳)과 최영지(崔永沚)를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삼고,



상락(上落) 김공(金公 상락은 봉호(封號))이 처음 시중을 배수할 때, 국로(國老 나라의 원로) 창녕(昌寧 본관) 성공(成公)이 그 가문의 아름다움을 서술하고 시(詩)를 지어 축하하였는데, 명경 거유(名卿巨儒)들이 이어 화답한 시 몇 수 ---

양촌선생문집 제18권  (序類)

시중(侍中) 김사형(金士衡)을 축하하는 시의 서



국조보감 제1권 /태조조(太祖朝) /1년(임신, 1392)

○ 평주(平州) 온천에 행행하였다가 야차(野次)에 가마를 멈추고서 상락백(上洛伯) 김사형(金士衡),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과 함께 잠저(潛邸) 때 서로 잘 지냈던 정리와 개국(開國)에 수고한 일들을 말하면서 잔술을 주고받았는데, 서로 친근하기가 마치 옛날과 같았다.



여말선초의 갈림길에서...

여말선초의 역성혁명시에 우리가문의 선조님들 가운데에서 고려조 충신으로 기록된 분은 군사공 김칠양, 안렴사공 김사렴, 서운관정공 김수, 자포옹 김전, 전서공 김성목과 그의 아들 학당 김휴 등이 있고, 이성계의 조선개국에 적극 참여한 분은 익원공 김사형, 정의공 김철 등이 있고, 안정공 김구덕, 김구용의 아들 김명리, 김휴의 아들 김익정 김익렴 형제 등은 이조개국후 곧바로 관직에 나아갔다.

이때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고려조 충신으로 절의를 지킨 분들은 정몽주나 이색의 경우처럼 죽음이나 몰살을 당한 사람들이 많은데, 위에 열거한 분들은 이리저리 피해다니고 향리에 운둔한 기록은 있어도 죽음을 당한 경우는 없는 듯 하다. 이는 익원공 김사형의 배경(힘)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수 있다.


○형 김사렴(58세), "여말 8청"의 한분으로서 추앙을 받았는데, 이분들은 고려 사직이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게 되자, 불사이군의 절의로 벼슬을 그만두고 배록동에 은거하였는데, 공을 비롯하여 어은 金浚, 어촌 孔 府, 대은 李裕, 둔촌 李集, 대제학 尹珪, 사암 閔 兪, 송은 具鴻 등을 이른다. 배록동이란 이씨 조선에서 전조의 신하들에게도 봉록을 주었지만, 이들 고려의 절신들은 한 마을에 살면서 이를 거절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분들 모두 "두문동 72현"으로 모셔져 내려오고 있다.

공은 청주에 피해 숨어 살며 한양을 향하여 앉지도 아니하고 매양 읊조리되 "열녀는 지아비를 두 번 바꾸지 아니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하느니라" 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공에게 사간원 좌사간 벼슬을 주고 여러번 불렀으되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급기야 도산으로 들어가 더욱 문호를 굳게 닫고 빈객을 사절하면서 회한으로 여생을 살았다. <1822 고려명신전>



<시대상황>

○공양왕,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간성군(杆城郡)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고, 1394년 삼척부(三陟府)로 옮겨졌다가 살해되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에 있는 고릉(高陵)인데,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에도 공양왕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 불안했던 왕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이 건국된 후 태종 16년에 이르러 공양왕으로 추봉되었다.


○태조(太祖) 이성계,

■ 1335∼1408

■ 조선 제1대왕

■ 재위 1392∼1398

■ 본관은 전주(全州)

■ 자는 중결(仲潔)

■ 호는 송헌(松軒)

조선의 건국자로 이름은 성계, 호는 송헌이다. 등극 후에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晋)으로 고쳤다.

화령부(和寧府: 함경도 영흥)출생. 자춘(子春)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고,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하였으며,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났다.


4. 조선건국과 제도정비

마침내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초에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高麗)’라 칭하고 의장(儀章)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故事)를 따를 것임을 선언하였으나,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자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우선, 명나라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쓰면서, 명나라의 양해 아래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확정, 1393년(태조 2)3월 15일부터 새 국호를 쓰기로 하였다. 다음에는 새 수도의 건설이 필요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왕사(王師) 무학(無學:自超)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을 새 서울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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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지난해 하얼빈에서 정리하다가 만 익원공 연보자료를 다시 정리하려고 합니다. 많은 의견을 보태 주시기를 바랍니다.

김태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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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어디서 발췌한 자료인가요? 아니면 ?
&lt;4월&gt;
고려사절요 제35권 /공양왕 2(恭讓王二) /임신 4년(1392), 대명 홍무 25년
4월 ○ --- 태종이,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고 몽주가 돌아감에 미쳐서 곧 조영규(趙英珪) 등 4,5명을 보내어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쳐서 죽였다. 태종이 또 화(和) 등과 의논하여 .....................(본문중에서)

1392년은 조선국을 개국하고 개성에서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한 해이지요. 태종은 이성계의 아들 방원인데 이방원이 등극한 것은 1401년입니다. 1418년 창령대군(세종)이 등극하고 난 후에 태종이라는 칭호를 붙인 것인데...
 
어떻게, 1392년(개국)의 4월에 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까? 차라리 이방원이라고 하던가, 아니면 그당시 직책으로 이방원이라고 해야 맞지요, 이와같은 용어의 선택이나 직위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가끔 많은 것을 느낍니다.
복사도 중요하지만 세심한 검증을 부탁드립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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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완 종친님 반갑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문온공파 18세손(문온공)으로 경기 광주에 사는 영윤입니다 올려주시는 글 잘 보고있습니다
위 내용은 고려사 절요를 원문대로 인용한 것으로 편찬 당시의 사관의 입장으로 본 호칭이라 봅니다 1392년 4월은 조선 개국 전이라 모든 호칭이 맞지 않음을 지적해주신 것은 옳다고 보지만 위 자료의 본질에는 큰 하자는 아니리라 여겨집니다 아울러 출처를 밝혀 옮기는 이가 임의로 일부를 수정하여 전재 함도 여의치 못하리라 생각됩니다
님의 답글 중 창령대군은 충령대군의 오타인 것 같습니다
얼굴도 뵙지 못한 초면에 결례가 되었다면 너그러이 양해 바랍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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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고려사 원문:太宗曰,時不可失,及夢周還,乃遣趙英珪等四五人,要於歸路,殺之
譯者도 임의로 방원으로 번역 하기에는 무리라 보고
주석을 달아 옮김이 바람직하다 생각됩니다

김주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주회
작성일

  아시다시피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조선 세종 말년에 세종이 정인지 등에게 편찬하게 한 것입니다. 본 연재는 제목에서 보듯이 자료모음 입니다. 따라서 원전을 편의상 수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호칭 문제는 영윤 대부님 말씀과 같이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태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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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김영윤 대부님께
익원공 후손입니다. 글 잘 보았습니다.
문온공파 영윤대부님께서 올려주신 글 들 잘 보고 있습니다.
특히, 경진보 발에서 김上舍 胤先공에 대한 제학공이냐? 문온공이냐? 하는 역사적 고찰과 검증은 존경스럽습니다. 영윤 대부님의 뛰어난 혜안과 성찰능력은 우리 안김이 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복사를 했던 창작을 했던 간에, 올린 글에 대하여 지적을 하는 것은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조그만 지적이라도 발전된 글을 위한 생명수가 될 수 있습니다.
기분 나뿐일이 아닙니다. 여러편의 논고를 써 봐도 지나 놓고 보면 오류가 있씁니다. 필자를 향한 지적은 한번더 심사숙고하자는 계기가 될 뿐입니다.
앞으로 올리는 글에 대하여 필요한 경우, 많은 비판을 가할 것입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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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너그럽게 이해 해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좁은 소견으로 괜한 기우를 했음입니다
저도 태완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소극적 무관심 보다는 적극적인 관심과 지적이 본 홈의 발전에 동력원이 되리라 믿습니다 자주 뵙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