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16 (53세, 13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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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4-13 22:02 조회1,494회 댓글0건본문
(53세) 1393년 태조2
태조 003 02/01/19 (을축) 001
/ 안종원 등과 계룡산에 가서 신도 후보지를 살펴보려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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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송경(松京)을 출발하여 계룡산(鷄龍山)의 지세(地勢)를 친히 보고 장차 도읍을 정하려고 하니, 영삼사사(領三司事) 안종원(安宗源)·우시중(右侍中) 김사형(金士衡)·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지란(李之蘭)·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 등이 따라갔다.
태조 003 02/05/25 (기사) 002
/ 이성 등지로부터 의탁한 여진인을 돌려 보내도록 하고, 황제에게 주문할 일을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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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이성(泥城)·강계(江界) 등지에서 와서 의탁한 여진(女眞)의 인물을 찾아 돌려보내기를 명하였다. --- 명하여 시중(侍中)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 등과 더불어 황제에게 주문(奏聞)할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태조 003 02/06/22 (병신) 001
/ 현빈 유씨의 일을 함부로 논한 대간·형조의 관원들을 순군옥에 가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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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에 임금이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과 우시중(右侍中) 김사형(金士衡)에게 이르기를,
“궁중(宮中)의 소수(小竪)와 빈잉(嬪媵)을 내쫓아 처벌하는 것은 내 집안의 사삿일이므로 외인(外人)이 알 바가 아닌데, 지금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이 일을 함부로 논(論)하게 되매, 반드시 외인(外人)이 망령되게 스스로 의심을 내어 전해서 서로 모여서 의논하게 될 것이니, 다만 이 무리들의 뜻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 이 무리들을 옥에 가두어 국문(鞫問)하고자 한다.” 하니,
조준 등이 대답하지 아니하고 나가서 도승지 이직(李稷)에게 이르기를,
“대간(臺諫)과 형조는 한 나라의 기강(紀綱)이 매여 있으므로 예로부터 이를 소중하게 여겼는데, 온 관사(官司)가 갇히게 되면 국체(國體)에 손상됨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말을 잘 해서 계문(啓聞)하오.” 하였다.
이직이 들어가서 아뢰니, 임금이 옳게 여겨 다만 장무(掌務)만 가두어 국문하고자 하였으나, 그 공사(供辭)가 관련되어 미치게 된 까닭으로, 명하여 모두 가두게 한 것이었다.
○ 둘째아들 승(陞) 28세, 음사로 출사하여 1393년(태조2년) 사헌부 중승에 제수되었다.
*밀직사사공 김승(密直司使公 金陞) (1366년 고려공민왕 15년∼1436년 조선 세종 18년)
이후 승정원 우부승지로서 1395년 3월 조선개국 원종공신에 책훈되고
1398년 1월 중추원사 동지밀직사사겸 도평의사에 이르렀다. 부인은 정부인 광산 김씨로 보리공신 광성군 김정의 딸이다.
○ 손자 김종한(김승의 2남)이 태어났다.
*부령공 김종한(部令公 金宗漢) (1393년 조선 태조 2년∼1469년 예종 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벼슬은 부령(部令)에 이르고 묘소는 익원공 묘하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전북 고창군 공음면 장곡리 선영에 설단하고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다.
○ 형 김사렴의 막내아들(6자) 식(湜), 1393년(태조2, 계유) 문과에 급제하였다.<1914 갑인보>,
*이후 벼슬은 이조좌랑에 이르렀으나, 진천군 문백면 막동에 은거하여 문학으로써 평생을 마치었는데 문하에 문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부인은 진천송씨(父송광우, 祖송소, 曾祖송지백, 外祖홍원노)이다.
<시대상황>
○정도전(鄭道傳), 1393년(태조 2)에 〈문덕곡 文德曲〉·〈몽금척 蒙金尺〉·〈수보록 受寶#녹15〉 등 3편의 악사(樂詞)를 지어 바쳐 이성계의 창업을 찬송하였으며, 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권근(權近), 1393년(태조 2)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태조의 아버지 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바쳤는데, 이 글들은 모두 후세사람들로부터 유문(鎪文)·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뒤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중추원사 등을 지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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