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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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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4-16 23:19 조회1,46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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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다시 눈이 감겼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게는 아직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한데…. 그녀는 눈을 뜨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눈꺼풀은 천근만근 나가는 바위 같은 무게로 그녀를 짓눌렀다. 그녀의 의식은 그 무게에 눌려 자꾸만 가라앉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아니,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그래, 잠이 모자라서 그럴 거야.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그녀는 더 이상 수마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서히 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봄 날. 꽃이 만발한 정원이었다. 애일당(愛日堂) 정원 꽃밭 속이었다. 꽃밭 속에서 작은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빛, 눈부신 햇살이었다. 그 빛을 받으며 작은 소녀는 까르르 웃었다. 그 작은 소녀 옆에 소년 티를 갓 벗어난 청년 하나 빙긋이 웃고 있었다. 한양서 며칠 전에 온 작은 오라버니였다. 가을에 있을 초시 마지막 정리를 하기 위해 애일당에 와 있었다. 꽃밭 속에 앉아 오누이는 배를 만들고 있었다.
 마침내 배가 완성되었다. 오라버니, 경포에 배 띄우러 가. 내일 가자. 곧 날이 어두워 올 거야. 지금 가. 경포가 배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런 엉터리 같은 녀석! 작은 오라버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웃으며 작은 소녀를 앞세우고 집을 나섰다. 오누이는 집 앞 솔숲 오솔길을 걷었다.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자 소금기가 밴 습한 바람이 밀려왔다. 그 바람결 저 너머 푸른빛 반짝이는 바다가 보였다. 마침내 눈앞에 물. 끝이 없는 호수, 거울처럼 맑은 경포(鏡浦)가 보였다. 오누이는 버드나무 우거진 호수 물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물가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배를 띄우며 놀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목란배를 들고 물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작은 소녀는 소리쳤다. 오라버니 너무 깊이 들어가지마. 그러나 청년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계속 걸어 들어갔다. 청년이 마침내 목란배를 띄웠다. 청년은 작은 소녀를 등지고 물 속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배가 자꾸만 커져가고 있었다. 아니면 오라버니가 자꾸만 작아지고 있는 것이었을까? 청년이 배에 올라탔다. 청년이 소리쳤다. 초희야, 너도 올라타. 오라비와 함께 이 배를 타고 봉래도(蓬萊島)로 가자꾸나.
 작은 소녀가 물 속으로 찰방찰방 걸어 들어갔다. 오라버니와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배 앞에 닿자 청년이 손을 내밀었다. 작은 소녀는 오라버니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문득 손에, 아니 온 몸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오라버니의 손이 얼음처럼 차가웠던 것이다. 작은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오라버니의 손을 놓아버렸다. 청년이 작은 소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다시 손을 잡힌 작은 소녀는 자신의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소녀는 그 손을 세차게 떨쳐 내었다.
  『 아씨, 깨셨어요? 』
 소순이 와 있었다. 소순이 차가운 물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주다, 초희의 떨침이 다소 머쓱했던 모양으로 변명처럼 말했다.
  『 주무시면서 계속 땀을 흘리시기엡 』
 초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꿈이었구나. 꿈. 참으로 오래 전 일이다. 강릉, 애일당. 그때 나는 어머니를 따라 강릉 애일당에 가 있었다. 어머니 뱃속에는 아우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웬 꿈을 이렇게 자주 꿀까? 그것도 죽은 사람들 꿈을. 작은 오라버니는 죽었다. 작년. 초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힘이 부쳤다. 소순이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 언제 왔니? 막내서방님은? 』
  『 조금 전에요. 그런데, 막내서방님이 출타하신 후 열흘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는군요. 그래서 아씨분부를 행랑아범에게 전달하고 왔어요. 』
 과거준비를 해야 할 때인데, 균(筠)이가 아직도 마음을 못 잡고…. 둘째 오라버니가 죽은 뒤 아우는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하고 있었다. 하긴 나도 아직 둘째 오라버니가 꿈에 보이니. 다시 땀이 나기 시작했다.
  『 집안에 다른 일은 없지?』
  『 마님께 인사 여쭙고 싶었습니다만, 아씨 분부가 엄해서… 둘째 서방님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집안이 적막강산 같더군요. 도련님들 글 읽는 소리가 들리긴 해도. 』
 친정 집 이야기를 들으니, 초희는 불현듯 친정 집에 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내가 몸이 나아 다시 친정 집에 갈 수 있을까. 어쩌다 우리 남매들이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가슴이 답답했다.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 그녀는 일어섰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없어 털썩 주저 안고 말았다. 소순이 놀라 다가왔다.
  『 소순아, 나 창가에 좀 데려다 다오. 가슴이 답답하다. 』
 소순이 그녀를 부축하여 창가 걸상에 앉혀 주었다. 초희는 창 밖을 보았다. 밖에는 해거름이 내리고 있었다. 담 밑 화단에는 꽃나무들이 해거름을 받아 봄빛으로 난만했다. 봄빛이 저렇게 좋은데 친정 집은 적막강산 같더라고? 수줍게 꽃을 피운 매화, 시샘하듯 따라 핀 이화, 그리고 마악 꽃망울을 맺은 작약… 저런 꽃밭 속에 내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사랑채엔 오라버니들이 글 읽는 소리가 들리고, 작약꽃망울을 따서 손가락에 물을 들이던 어린 내가 있었다. 그땐 정말 행복했었다. 꿈처럼 행복했었다. 초희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유년의 기억저쪽으로 갔다.

 

 

댓글목록

김태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서
작성일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처럼
처음 피었을때의 아름다움은 십일을 넘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우리들 인생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