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자료(2) 경순왕 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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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4-23 21:11 조회1,572회 댓글0건본문
♤경순왕(? ∼ 979)은 신라 제 56대 왕으로 성은 김씨.이름은 부로 문성왕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신흥대왕으로 추봉된 효종이고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이다.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있는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정책과 신라의 민심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리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하니, 왕경의 사녀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시랑과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 건이 있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935년 후백제의 잦은 침공과 각처의 군웅할거로 강토는 날로 줄어들어 국가기능이 마비되자
신하들과 더불어 고려에 항복할 것을 결정하고 김봉휴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여 재위 8년의 신라 마지막 왕이 되었다. 이 때 큰 아들 마의 태자는 항복을 극력 반대하였고,
막내아들 범공은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그가 백료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차와 보마가 30여리에 뻗쳤다 하며, 항복 후 왕 건에
의해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 받았으며 녹 1천석과 함께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사심관으로 임명되었고 왕 건 태조의 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 하였다. 경순왕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지 43년 후인 고려 경종 4년에 돌아 갔으며 경순이란 시호를 받았다.
경순왕릉은 조선 건국 이후 오래도록 실전(분실) 되었던 것을 1748년(영조 24) 감사 김 성운과
첨정 김응호 등이 봉축하고 제사하였으나 6.25후 방치 되었다가 1975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지금의 형태로 정화하여 오늘에 이루고 있다.
봉분은 원형의 호석을 두른 높이 3m ,둘레 19.5m의 크기이고 곡장으로 보호 받고 있으며 봉분
전면에는 4각의 대좌위에 서 있는 표석(105 .857cm)과 상석(103?cm),네면에 4각화창과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얺은 장명등(160cm)이 직선상에 높여져 있고 장명등 좌우에는 석양(105?cm),
망주석(150cm)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조선 후기의 양식이며 화강암 재질이다. 표석 전면은 「
신라경순왕지릉」이라 되어있고 뒷면은 5행으로 경순왕의 간략한 생애를 기술한 87자의 음기로
이루어져 있다.
건립연대는 1749년(영조 25)이다. 또한 좌측에는 1986년에 새로 건립된 1칸 규모의 비각과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형지붕으로 된 재실이 있는데, 비각안에는 경순왕의 신도비로
추정되는 비가 있다. 이 비는 6.25 전까지 고랑포리 시가지에 있었으나 수복 전후 도로변에
계속 방치되어 오던 것을 원당리 고랑포 초등학교 교정에 옮겨 보호해 오다 1986년 비각을
새로 건립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보존하게 된 것이다.
대좌는 최근에 화강암으로 다시 마련하였고 비신은 높이 132cm, 폭 66cm, 두께 15cm 규모에
상단을 모죽임한 변성암재질로 되어 있다.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전혀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비신 중간과 하단의 일부분에서 10자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경순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기도 내에 있는 것으로 옛 고랑포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곳에 잘 정비되어 있다
위 치 : 연천군 연천읍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문 의 : 연천군청 문화관광담당 : 031) 839 - 2063
: 연천군 문화원 : 031) 824 - 2350
▣ 김태서 -
▣ 김창우 -
▣ 김주회 -
▣ 김정중 -
▣ 김재익 -
▣ 김항용 -
▣ 김영윤 -
▣ 김은회 -
아버지는 신흥대왕으로 추봉된 효종이고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이다.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있는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정책과 신라의 민심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리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하니, 왕경의 사녀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시랑과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 건이 있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935년 후백제의 잦은 침공과 각처의 군웅할거로 강토는 날로 줄어들어 국가기능이 마비되자
신하들과 더불어 고려에 항복할 것을 결정하고 김봉휴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여 재위 8년의 신라 마지막 왕이 되었다. 이 때 큰 아들 마의 태자는 항복을 극력 반대하였고,
막내아들 범공은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그가 백료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차와 보마가 30여리에 뻗쳤다 하며, 항복 후 왕 건에
의해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 받았으며 녹 1천석과 함께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사심관으로 임명되었고 왕 건 태조의 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 하였다. 경순왕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지 43년 후인 고려 경종 4년에 돌아 갔으며 경순이란 시호를 받았다.
경순왕릉은 조선 건국 이후 오래도록 실전(분실) 되었던 것을 1748년(영조 24) 감사 김 성운과
첨정 김응호 등이 봉축하고 제사하였으나 6.25후 방치 되었다가 1975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지금의 형태로 정화하여 오늘에 이루고 있다.
봉분은 원형의 호석을 두른 높이 3m ,둘레 19.5m의 크기이고 곡장으로 보호 받고 있으며 봉분
전면에는 4각의 대좌위에 서 있는 표석(105 .857cm)과 상석(103?cm),네면에 4각화창과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얺은 장명등(160cm)이 직선상에 높여져 있고 장명등 좌우에는 석양(105?cm),
망주석(150cm)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조선 후기의 양식이며 화강암 재질이다. 표석 전면은 「
신라경순왕지릉」이라 되어있고 뒷면은 5행으로 경순왕의 간략한 생애를 기술한 87자의 음기로
이루어져 있다.
건립연대는 1749년(영조 25)이다. 또한 좌측에는 1986년에 새로 건립된 1칸 규모의 비각과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형지붕으로 된 재실이 있는데, 비각안에는 경순왕의 신도비로
추정되는 비가 있다. 이 비는 6.25 전까지 고랑포리 시가지에 있었으나 수복 전후 도로변에
계속 방치되어 오던 것을 원당리 고랑포 초등학교 교정에 옮겨 보호해 오다 1986년 비각을
새로 건립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보존하게 된 것이다.
대좌는 최근에 화강암으로 다시 마련하였고 비신은 높이 132cm, 폭 66cm, 두께 15cm 규모에
상단을 모죽임한 변성암재질로 되어 있다.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전혀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비신 중간과 하단의 일부분에서 10자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경순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기도 내에 있는 것으로 옛 고랑포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곳에 잘 정비되어 있다
위 치 : 연천군 연천읍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문 의 : 연천군청 문화관광담당 : 031) 839 - 2063
: 연천군 문화원 : 031) 824 -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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