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온공의 교류인물(5) 호정 하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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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4-20 11:11 조회1,637회 댓글0건본문
호정 하륜 선생은 척약재공(1338년생)보다 9세 연하(1347년생)이지만 가장 오랫동안 생존하여 척약재공의 아드님이신
부사공(김명리)이 척약재학음집을 간행할때 생존한분중에서 하륜만큼 아버님을 아시는 분이 없다 하면서
서문을 부탁하였습니다.
척약재 학음집 서문
내가 젊어서 목은 선생 문하에 다녔는데, 좌상의 손님으로는 포은 정선생척약재 김선생도은 이선생 같은 분이 있었다. 나는 모습과 행동을 보고 담론을 듣고 모두 당대의 위인(偉人)인 줄 알았었다. 그 뒤부터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하다가 더불어 종유(從遊)한 지가 20여 년이었으니, 서로 허물없는 정도가 진실로 얕지 않다. 김선생이 사명을 받들고 요동으로 가려고 할 적에 나는 한 마디 말로 권면하였더니, 선생은 나라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서 감히 청하지 못하고 바로 떠났다. 그래서 결국 대리국(大理國)으로 귀양가게 되어 복명(復命)하지 못했으니, 아, 애석한 일이다. 그 뒤 10여 년 사이에 포은과 도은이 모두 돌아가시고 목은 선생도 세상을 떠났으니, 평생에 서로 좋아하던 처지임을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흐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내가 휴가를 얻어 시골에 와서 선영에 참배하기 위하여 10여 일을 머물러 있는데, 이 고을 판윤(判尹)은 바로 척약재의 둘째아들로 내가 아버지의 친구라고 해서 융숭히 대우하였다. 하루는 유고(遺藁)를 받들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우리 선친이 저술한 시문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닌데, 당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짓는 대로 없애고 다행히 이 몇 편만이 겨우 남았으므로 이것을 간행하여 후세에 전하게 하려 하는데 우리 선친을 아는 사람이 그대만한 이가 없으니 그대는 부디 이 책머리에 한 마디 써주기를 바란다.' 하였다. 내가 그 말에 감동하여 받아서 읽어보니 마치 그 음성을 들으며 마주앉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아, 시도(詩道)는 어려운 것이다. 위(魏)진(晉) 이전의 작자들은 고대와 동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경》 3백편의 남긴 뜻에 어긋나지 않은 것이 적으며, 시가 당(唐)에 와서 지극했다고 하나 당 나라 사람의 시요, 또한 시(始)정(正)변(變)의 차이가 있어서 정음(正音)에 들어간 것은 많지 못하였다. 하물며 우리 동방은 지역이 중국과 멀리 떨어져서 풍기(風氣)가 같지 않고, 언어도 다르니 진실로 타고난 재주가 남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어찌 그 고루한 점을 변하여 정음에 가깝게 될 수 있으랴. 목은 선생은 중국에서 배웠기 때문에 우뚝하고 높은 안목이 있어 우리나라 사람의 시를 인정한 것이 적었으나, 오직 선생의 시에 있어서는 항상 감탄하며 칭찬하기를, ꡐ평담(平淡)하고 정심(精深)한 것이 급암(及庵)과 꼭 같다.ꡑ 했으니, 평담하고 정심한 지경에 이르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평담하고 정심하면 정음(正音)에 돌아갔을 것이니, 이 몇 편을 빨리 간행해서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범이 되게 해야 하기에 이것을 써서 서문으로 한다.
건문원년(1400년정종2년)구월기망 분충장의정사공신자헌대부
정당문학겸판도평의사사사수문전대학사제점서운관사 진산군
호정 하륜 서
(建文元年(1400年定宗2年)九月旣望 奮忠仗義定社功臣資憲大夫政堂文學兼判都評議使司事修文殿大學士提點書雲觀事 晉山君 浩亭 河崙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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