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12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6-04-22 06:59 조회1,463회 댓글0건

본문

<제12회>

 

 

 

 Ⅱ章

  

           1.蓬萊先生(봉래선생)

  또 하품이 났다. 온몸이 나른하고 자꾸 눈이 검실검실 감겼다. 어깨와 팔도 아팠다. 초희는 문갑 위에 놓인 물시계를 보았다. 유시(酉時)까진 아직 이각(二刻)이나 남아 있었다. 힐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만들고 있는 도포에 시선을 모은 채 바느질에 열중이었다. 옆에는 세 살배기 아우가 세상모르고 모시 강보에 쌓여 잠들어 있었다.
 다시 하품이 났다. 초희는 손으로 작은 입을 가리고 어머니 몰래 하품을 했다. 눈 꼬리에 눈물이 묻어났다. 한양으로 오고 나서 어머니는 애일당(愛日堂)에서와는 달리 초희에게 엄격해졌다. 초희는 오전에는 여계(女戒)를 읽고 오후에는 수(繡)나 바느질 혹은 음식 만들기 같은 여공(女工)을 익혀야했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이런 일은 여자가 시집가기 전에 배워야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기척이 없는 딸의 동정이 의아했던 모양으로 바느질을 하던 손길을 멈추고 초희를 건너다보았다. 수틀을 무릎에 놓은 채 멍하니 앉아있던 초희는 어머니의 힐책(詰責)이 있기 전에 얼른 다시 수틀을 잡았다. 수틀 안 남색공단에는 몇 송이 작약꽃들이 선홍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꽃들은 향기가 없는 죽은 꽃들이다. 초희는 향기 가득한 진짜 꽃들을 꺾고 싶었다. 마당화단에는 이런 작약꽃이 활짝 피어있을 터였다. 어쩌면 지금 정원에서는 소순이 작약꽃잎을 따서 손톱을 물들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초희는 수를 놓아야했다.
 초희는 자신이 밑그림을 따라 타성적으로 손가락만 놀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 속이 나른해지고 눈이 감기는 바람에 수를 놓는 손이 점점 둔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아얏, 하고 소리를 질렀다. 순간적인 부주의로 바늘에 손가락을 찔린 것이었다. 골무를 않은 손가락에서 빨간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어머니가 놀라 바느질하던 손을 놓고 다가왔다.
  『 이 녀석아, 정신을 딴 데다가 두니 그렇지 않느냐! 』
 어머니는 문갑에서 지혈을 시키는 조개가루를 꺼내 상처에 바르고 반짇고리에서 작은 천을 꺼내 손가락을 처매주며 일을 이렇게 하기 싫어하니, 하고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는 물시계를 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 벌써 유시가 다 되었네. 그래, 오늘은 이만 나가 놀아도 좋다. 』
 그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바늘에 찔린 아픔도 눈꺼풀을 누르던 졸음도 벌써 어디론가 달아나고 없었다. 초희는 대청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막혔던 가슴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마당을 향해 서서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화단주변에서 소꿉놀이를 하던 소순이 보이지 않았다. 침모인 제 어미를 따라 저자에라도 간 모양이었다. 건넌방에 들어가 서책을 갖고 나왔다. 오라버니들은 *미암(眉庵)선생 댁에서 이미 돌아와 있을 터였다. 초희는 바깥채에 가기 위해 마당을 가로질러 문을 나섰다.

 

註)
*미암(眉巖1513∼1577) 조선중기 문신 유희춘(柳希春)의 호, 자는 인중(仁中) 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제주도·함경도에서 19년 동안 유배생활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