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22 (59세, 13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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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4-22 23:40 조회1,497회 댓글0건본문
(59세) 1399년 태조8 정종원년
정종 001 01/01/02 (계유) 002
/ 홍제원에 거둥하여 명나라 서울에 가는 우정승 김사형을 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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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원(弘濟院)에 거둥하여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을 전송하였다. 김사형은 명나라 서울(*남경)에 가서 등극(登極)을 하례하고, 정당(政堂) 하윤(河崙)은 진위 조제례(陳慰弔祭禮)를 행하였다.
정종 001 01/01/09 (경진) 007
/ 계품사 설장수를 진향사로 고쳐 김사형, 하윤과 함께 명나라에 입조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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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품사(計稟使) 설장수(偰長壽)를 진향사(進香使)로 고쳐 김사형(金士衡)·하윤(河崙)과 함께 명나라에 입조하게 하였다. 처음에 설장수가 파사포(婆娑鋪)에 이르니,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3년에 한 번씩 조빙(朝聘)하는 시기에 어긋난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설장수가 돌아와 의주(義州)에 이르러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매년 조빙할 것을 청하여 다시 주문(奏聞)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진위(陳慰)할 때 진향사(進香使)로 차견(差遣)하든지 하십시오.”
하니, 이때에 아뢰어 진향사를 삼았다.
○조준(趙浚)·김사형(金士衡)·권중화(權仲和)·김희선(金希善) 등이 편찬한 의약서(醫藥書)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1399년(정종 1) 김희선이 강원도에서 간행하였다. 1399년 5월 권근이 발문을 지었다.
이 책은 망실되어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433년 세종 때 발간한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과 ≪향약제생집성방≫에서 388증(症)과 2,803방(方)을 인용하였다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방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총 30권 중 일부(제6권)가 처음 발견되어 보물 1178호로 지정되었다.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1201 가천문화재단 소장)
양촌선생문집 제22권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발 권근(權近)
제생원(濟生院)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은 백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처음에 평양백(平壤伯) 좌정승(左政丞) 조공 준(趙公浚)과 상락백(上洛伯) 우정승(右政丞) 김공 사형(金公士衡)이 국사를 다스리던 여가에, 곤궁한 백성들이 병이 들어도 치료하지 못함을 불쌍하게 여겨 널리 구제하고자, 동지중추(同知中樞) 김공 희선(金公希善)과 협력하여 제생원을 설치하고 약제를 모아놓고 치료를 하였으며, 또 예천백(醴泉伯) 권상 중화(權相仲和)와 더불어 그가 전에 저술한《향약방(鄕藥方)》을 토대로 다시 더 수집하여 전서(全書)를 만들어서 중외에 반포하고 영원히 전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모두 지역에 따라 약을 구할 수 있고 병에 따라 치료할 수 있음을 알게 하였다. 또 우마(牛馬)의 병에 약을 잘못 써서 죽게 함을 염려하여 그 처방(處方)을 집성하였으니, 백성을 사랑하고 짐승을 아끼는 마음이 깊고 또 간절함이 이와 같았다. 건문(建文) 원년(정종 1, 1399)에 그 책이 완성되자, 김 중추(金中樞)가 강원도 관찰사로서 각공(刻工)을 시켜 목판에 새겨 그 전함을 영원하게 하였다. 아! 평양백과 상락백의 인후한 덕으로 그 일을 총괄하였으며, 예천백의 정박(精博)한 학문으로 그 책을 편찬하였으며, 김공이 또 능히 힘을 써서 그 일을 시종 성취하였으니, 네 분이 우리나라 백성에게 혜택을 베푼 바가 마땅히 이 책과 함께 만세에 전하여 무궁함을 기할 것이다. 이 제생원의 일을 주간(主幹)하는 이는, 서원군(西原君) 한공상경(韓公尙敬)ㆍ순흥군(順興君) 안공 경량(安公敬良)ㆍ김군 원경(金君元囧)ㆍ허군 형(許君衡)ㆍ이군 종(李君悰)ㆍ방군 사량(房君士良)으로서 모두 여기에 공로가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아울러 책머리에 밝힌다.
기묘년(정종 1, 1399) 여름 5월 상순(上旬)
향약제집성방 (鄕藥濟集成方) 보물 1178 호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1201 가천문화재단
향약제집성방은 조선 태조 때 김희선과 권중화 등이 의료 경험과 종래의 의약서 등을 참고로 하여 제생원(濟生院)에서 편찬한 것을 정종 1년(1399)에 김희선이 강원도에서 간행한 의학서이다. 이 책은 총 30권으로 되어 있는 가운데 일부(제6권)로서, 처음 발견된 유일한 책이다. 책의 내용은 각종 질병을 부분별로 제시하고 있으며, 세종 15년(1433)에 간행된 향약집성방의 기초가 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자생하는 약초를 이용해 우리 풍토와 체질에 알맞은 향약을 적용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으며, 의약서와 인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399년(정종1), 조준(趙浚)·김사형(金士衡)·권중화(權仲和)·한상경(韓尙敬)
·방사량(房士良) 등이 수의학서(獸醫學書) 신편집성마의방우의방(新編集成馬醫方牛醫方)을 편찬하였다. 1책. 목판본. 방사량이 서문을 지었다.
1399년에 제생원(濟生院)에서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을 편집, 간행할 때에 부록으로 함께 편성되었다.
그뒤 1580년(선조 13)에 전라도 전주에서 재간되고, 1633년(인조 11)에 제주에서 복간되었다. 최근 제주본을 대본(臺本)으로 만주 봉천시(奉天市:지금의 瀋陽) 췌문재(萃文齋)에서 영인된 사실은 중국에까지 널리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편집성마의방우의방(新編集成馬醫方牛醫方)
1399년(정종 1)에 편찬된 수의학서(獸醫學書). 1책. 목판본. 편자는 권중화(權仲和)·한상경(韓尙敬)·조준(趙浚)·김사형(金士衡)·방사량(房士良) 등이다. 이 책은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과 함께 간행된 것이다.
전의소감지제생원사(典醫少監知濟生院事) 방사량의 서문에 의하면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이 권중화와 한상경에게 명하여 중국의 백락(伯樂)의 경(經)을 날〔經〕로 하고 원나라의 결(訣)을 씨〔緯〕로 하여 제서(諸書)의 효력 있는 방문들을 모으고 동인(東人)이 이미 시험한 술법을 채집하여 편성한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송·원나라 때의 마의방·우의방서와 동인들의 경험방을 참작, 수집한 고려시대의 수의학의 전통을 이어 온 전문의방서라 할 수 있다.
정종 001 01/06/27 (병인) 002
/ 하등극사 김사형 등 사신들이 명나라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돌아오니 임금이 친히 맞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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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등극사(賀登極使) 우정승 김사형(金士衡)과 진위사(陳慰使) 정당(政堂) 하윤(河崙)과 진향사(進香使)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가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받들고 명나라 서울[京師]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친히 맞고, 백관들이 공복(公服)차림으로 전(箋)을 올려 하례하였다. 자문(咨文)은 이러하였다.
정종 002 01/07/19 (정해) 002
/ 여러 종친과 재상에게 명하여 태평관에서 김사형·설장수·하윤 등을 위해 잔치하도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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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공후(公侯)와 재집(宰執)에게 명하여, 우정승 김사형(金士衡)·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정당(政堂) 하윤(河崙)을 태평관에서 잔치하도록 하였다.
정종 002 01/10/04 (경자) 001
/ 밤에 우뢰하고 번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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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우뢰하고 번개하였다. 이튿날 원중포(原中浦)에서 사냥하고, 돌아와 기탄(岐灘)에 머물렀다. 임금이 노루 두 마리를 쏘아 잡았다. 도성(都城)에 머물러 있던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 등이 와서 임금에게 연향(宴享)을 베풀었는데, 밤에 파하였다.
정종 002 01/10/17 (계축) 002
/ 조례 상정 도감을 설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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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례 상정 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고 나누어 3방(房)으로 하여, 정안공(靖安公)과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무(李茂)·이거이(李居易), 대사헌(大司憲) 전백영(全伯英),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유관(柳觀)으로 판사(判事)를 삼고, 우산기(右散騎) 윤사수(尹思修) 등 9인으로 속관(屬官)을 삼았다.
정종 002 01/11/08 (갑술) 003
/ 우정승 김사형이 병을 칭탁하고 사직을 청하니 병의 차도를 기다리라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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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병이라 칭탁하고 전(箋)을 올려 사직하니,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에게 이르기를,
“아직 이 전(箋)을 머물러 두고 그 병의 차도를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정종 002 01/11/17 (계미) 002
/ 도승지 이문화를 보내어 김사형에게 일을 보라고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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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보내어 김사형(金士衡)에게 일을 보라고 일렀다.
정종 002 01/12/01 (정유) 007 / 이화·조준·김사형·심덕부·성석린·이거이·민제·권근에게 관직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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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李和)로 영삼사사(領三司事)를, 조준(趙浚)으로 판문하(判門下)를, 김사형(金士衡)으로 상락백(上洛伯)을 삼고, 심덕부(沈德符)로 좌정승(左政丞)을, 성석린(成石璘)으로 우정승(右政丞)을, 이거이(李居易)로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를, 민제(閔霽)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권근(權近)으로 정당 문학(政堂文學)을 삼았다.
<시대상황>
○정 종(定宗) 즉위
■ 1357∼1419
■ 조선의 제2대왕
■ 재위 1399∼1400
■ 본관은 전주(全州)
태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경(), 초명은 방과(芳果), 자는 광원(光遠)이다.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고 정비 정안왕후(定安王后)는 판예빈시사 증문하좌시중 월성부원군 (判禮賓寺事贈門下左侍中 月城府院君) 김천서(金天瑞)의 딸이고, 슬하에 15군, 8옹주를 두었다.
1399년(정종 1) 3월 개경으로 천도하였고, 같은해 8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하여 관인(官人)이 권귀(權貴)에게 의존하는 것을 금지하여 권귀를 약화시켰으며,
또, 1399년 3월 집현전을 설치하여 장서(藏書)와 경적(經籍)의 강론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해 5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하였고, 11월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고,
1400년 2월 이른바 제2차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안군을 세제로 책봉하였다.
그해 4월 정당문학 겸 대사헌(政堂文學兼大司憲) 권근(權近)과 문하부좌산기상시(門下府左散騎常侍) 김약채(金若采) 등의 상소를 받아들여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내외의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계속하여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三軍府)로 고치면서, 삼군의 직장(職掌)을 가진 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의정부는 정무를 담당하고, 삼군부는 군정을 담당하는 군·정분리체제를 이루었다. 이러한 개혁은 왕권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고 방원의 영향력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1400년 6월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하여 노비변정을 기도하였다.
4. 방원에게 양위하다
재위시에도 정무보다는 격구(擊毬) 등의 오락에 탐닉하면서 보신책을 삼았지만,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상왕(仁文恭睿上王)으로 인덕궁(仁德宮)에 거주하면서 격구·사냥·온천·연회 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으며, 태종의 우애를 받으면서 천명을 다하였다.
1419년(세종 1)12월 온인공용 순효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의 시호를 받았고, 1420년 4월 중국으로부터 받은 공정(恭靖)의 시호를 더하여 공정온인 순효대왕(恭靖溫仁 順孝大王)으로 개시되었다. 오랫동안 묘호(廟號)가 없이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 7) 정종(定宗)의 묘호를 받았다. 능호는 후릉(厚陵)으로 풍덕에 있다.
○권근(權近), 정종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私兵制度)의 혁파를 건의, 단행하게 하였다.
○태종 이방원, 1399년(정종 1)에 새로 설치된 조례상정도감판사(條例詳定都監判事)가 되었으며, 강원도 동북면의 군사를 분령(分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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