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23 (60세, 14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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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4-26 00:07 조회1,551회 댓글0건본문
(60세) 1400년 정종1 태종원년
정종 006 02/11/13 (계유) 002
/ 주상을 높여 상왕이라 하고, 상왕의 거처를 공안부, 중궁의 거처를 인녕부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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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主上)을 높여 상왕(上王)을 삼고, 부(府)를 세워 ‘공안부(恭安府)’라 하고, 중궁(中宮)의 부(府)를 ‘인녕부(仁寧府)’라 하였다. 민제(閔霽)로 여흥백(驪興伯)을, 김사형(金士衡)으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이거이(李居易)로 문하(門下) 좌정승을, 조박(趙璞)으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정구(鄭矩)로 대사헌을, 이백강(李伯剛)으로 청평군(淸平君)을, 김수(金需)로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를, 이내(李來)로 예문 학사(藝文學士)를, 맹사성(孟思誠)으로 좌산기(左散騎)를, 김구덕(金九德)으로 중승(中丞)을 삼았다. 밤 2경에 추동(楸洞) 본궁(本宮)으로 돌아왔다.
정종 006 02/12/22 (임자) 002
/ 수창궁이 화재를 당하다. 사관 노이가 사책을 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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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궁(壽昌宮)이 화재를 당하였다. 사약(司鑰)이 실화(失火)하여 침실(寢室)에서 시작해서 대전(大殿)에까지 불길이 미치었는데, 여흥백(驪興伯) 민제(閔霽)·판문하(判門下) 김사형(金士衡)·좌정승 이거이(李居易)·우정승 하윤(河崙)이 모두 모여 불을 구제하였다. 임금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궁궐은 이미 불타서 구제할 수가 없으니, 사람이나 상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이때에 사고(史庫)가 수창궁 안에 있었는데, 입직하던 사관(史官) 노이(盧異)가 사고(史庫)를 열고 손수 사책(史冊)을 꺼내었다.
○ 손자 김종숙(김승의 4자)이 태어났다.
*동추공 김종숙(同樞公 金宗淑) (1400년 정종 2년∼1471년 성종 2년)
벼슬은 가선대부 행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474년(성종5년) 3월에 정헌대부 의정부 찬성을 지낸 후 아드님인 좌의정 문정공 김질의 훈로로 대광보국 승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상락부원군에 추증되었다.
○ 9촌조카 김명리(40세), 1400년 晉陽牧使로 나갔을 때 선친 김구용의 시문을 편차하고 世係行事要略를 지어서, 관찰사 趙璞의 협조를 얻어 <척약재학음집>을 간행하였다.
*척약재학음집본
저자의 시문은 아들 金明理가 편차하여 1400년 晉陽牧使로 나갔을 때 관찰사 趙璞의 협조를 얻어 간행하였다.《초간본》 초간본은 2권 2책의 목판본으로서 저자의 유고를 모은 本集과 저자와 교유한 諸人들의 시문을 모은 外集으로 편차되어 있으며, 序ㆍ跋 및 世係ㆍ行迹은 본집 권수에 수록되어 있다. 이 본은 현재 尙州 趙誠穆氏 소장본(보물 제1004호)이 전하는데, 이는 후쇄본으로서 본집 卷首尾와 외집이 落張되어 있고, 자획이 많이 완결되어 있다.
문집은 本集 上ㆍ下 2권과 外集 합 2책으로 되어 있으며, 本集은 모두 저자의 詩이고 外集은 附錄이다.
권수에는 1399년 河崙이 지은 序, 1386년 鄭道傳이 지은 序, 李穡이 지은 跋과 아들 金明理가 지은 世係行事要略이 실려 있다.
<시대상황>
○정 종(定宗), 1400년 2월 이른바 제2차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안군을 세제로 책봉하였다.
그해 4월 정당문학 겸 대사헌(政堂文學兼大司憲) 권근(權近)과 문하부좌산기상시(門下府左散騎常侍) 김약채(金若采) 등의 상소를 받아들여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내외의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계속하여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三軍府)로 고치면서, 삼군의 직장(職掌)을 가진 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의정부는 정무를 담당하고, 삼군부는 군정을 담당하는 군·정분리체제를 이루었다. 이러한 개혁은 왕권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고 방원의 영향력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1400년 6월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하여 노비변정을 기도하였다.
○이방원(태종), 1400년 방간(芳幹)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포(朴苞) 등이 주동이 된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뒤 세자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게 되었다.
세자로 책봉되자 병권장악·중앙집권을 위하여 사병을 혁파하고 내외의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어 정무를 담당하게 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군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어 1400년 11월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등극하였다.
○태 종(太宗) 즉위
■ 1367∼1422
■ 조선 제3대 왕
■ 재위 1401∼1418
■ 이름은 방원(芳遠)
■ 자는 유덕(遺德)
이름은 방원(芳遠)이고 자는 유덕(遺德). 아버지는 태조 이성계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고, 비는 민제(閔齊)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1400년(정종 2)에 방원이 세자로 책립, 곧 이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은 대단히 컸다. 태종이 즉위한 뒤에 태조는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逍遙山)과 함주(咸州:지금의 함흥)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특히, 함주에 있었을 때에 태종이 문안사(問安使)를 보내면, 그때마다 그 차사(差使)를 죽여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디에 가서 소식이 없을 경우에 일컫는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태조의 태종에 대한 증오심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1402년(태종 2)12월 서울로 돌아왔다. 태조는 만년에 불도(佛道)에 정진하였다. 덕안전(德安殿)을 새로 지어 정사(精舍)로 삼고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1408년 5월 24일 창덕궁(昌德宮) 별전(別殿)에서 죽었다. 시호는 지인계운성문 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고,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며, 능은 건원릉(健元陵: 현재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 인창리)이다.
○조준(趙浚), 1400년(정종 2)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있으면서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에게 무고되어 한때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이방원에 의하여 석방되어,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하고 좌정승·영의정부사에 승진, 평양부원군에 진봉되었다.
그는 사학(史學)을 잘하고 경학(經學)과 시문에도 능하였으며, 문집으로 《송당집》을 남겼다.
○우현보(禹玄寶), 1400년(정종 2)에 제2차 왕자의 난 때 문인 이래(李來)로부터 반란의 소식을 듣고 이를 이방원에게 알려준 공으로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에 봉해졌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손 성범(成範)이 공양왕의 부마로 왕의 재위시에는 탄핵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으며, 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정몽주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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