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24 (61세, 1401년)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6-04-26 23:47 조회1,544회 댓글1건본문
(61세) 1401년 태종1
태종 001 01/01/25 (을유) 004
/ 공·후·백의 작호를 부원 대군·부원군·군으로 고치다
--------------------------------------------------------------------------------
공(公)·후(侯)·백(伯)의 호(號)를 고치었으니, 참람되게 중국을 모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익안공(益安公) 이방의(李芳毅)·회안공(懷安公) 이방간(李芳幹)은 모두 고쳐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봉하고, 봉녕후(奉寧侯) 복근(福根)·영안후(寧安侯) 양우(良祐)·완산후(完山侯) 천우(天祐)와 상당후(上黨侯) 이저(李佇)·청원후(靑原侯) 심종(沈淙)은 모두 고쳐 군(君)으로 봉하고,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상락백(上洛伯) 김사형(金士衡)·예천백(醴川伯) 권중화(權中和)·창녕백(昌寧伯) 성석린(成石璘)·여흥백(驪興伯) 민제(閔霽)·서원백(西原伯) 이거이(李居易)·진산백(晉山伯) 하윤(河崙)은 모두 고쳐 부원군(府院君)으로 봉하고, 단산백(丹山伯) 이무(李茂)는 고쳐 단산군(丹山君)으로 삼았다.
태종 001 01/03#01 (경인) 002
/ 문익점의 아들 중용과 최무선의 아들 해산에게 벼슬을 내리다
--------------------------------------------------------------------------------
이거이(李居易)를 파면하여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을 삼고, 하윤(河崙)으로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을, 김사형(金士衡)으로 좌정승(左政丞)을, 이서(李舒)로 우정승(右政丞)을, 조영무(趙英茂)·곽추(郭樞)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이직(李稷)으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조박(趙璞)으로 삼사 좌사(三司左使)를, 조호(趙瑚)로 예문관 태학사(藝文館太學士)를 삼고, 문중용(文中庸)을 뽑아서 사헌 감찰(司憲監察)을 삼고, 최해산(崔海山)으로 군기 주부(軍器注簿)를 삼았다. 참찬(參贊) 권근(權近)이 상서하기를,
---
태종 001 01/06/04 (신유) 001
/ 태상왕의 명으로 회안군을 소환하려 하자 의정부와 백관이 반대하다
--------------------------------------------------------------------------------
이방간(李芳幹)을 소환(召還)할 것을 명하니,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간(諫)하여 말리었다. 정부(政府)에 전지(傳旨)하기를,
“회안군(懷安君)의 경진년 일은 그 본심(本心)이 아니고, 다만 박포(朴苞)에게 현혹된 것이었다. 이제 황제께서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주시어 군신(君臣)의 분수가 이미 정하여졌으니, 무엇을 혐의할 것이 있는가? 사람을 보내어 소환하라.”
하였다. 이에 영삼사사(領三司事) 하윤(河崙)·좌정승(左政丞) 김사형(金士衡)·우정승(右政丞) 이서(李舒) 등 20여 인이 상소하여 그 불가함을 진달하고, 대간(臺諫)이 교장(交章)으로 상언(上言)하여 소환하지 말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여 말하기를,
---
태종실록001 01/04/15(계유)
사헌 감찰(司憲監察) 김간(金艮)을 파직(罷職)시켰다. 임금이 종묘(宗廟)에 제사할 때에, 헌부(憲府)에서 감찰 김명리(金明理)를 시켜 제사(祭祀)를 감찰(監察)하게 하여, 명리가 이미 재계(齋戒)를 하였는데, 간(艮)이 헌부(憲府)의 영(令)이라 사칭(詐稱)하고 대신 행사(行事)하였으니, 아마도 종묘에서 집사(執事)를 하면 질(秩)이 승진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헌부에서 탄핵하여 파직한 것이었다.
태종 001 01/06/14 (신미) 003
/ 문하부 낭사에서 별사금 황녹에게 죄주기를 청한 상소문
--------------------------------------------------------------------------------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가 상소하여 별사금(別司禁) 황녹(黃祿) 등의 죄를 청하였다. 처음에 별사금 황녹·고영수(高永壽)·유혜강(柳惠康) 등이 주장(朱杖)을 가지고 사람들을 벽제(辟除)하다가, 잘못하여 좌정승 김사형(金士衡)에게 부딪쳤다. 낭사(郞舍)가 탄핵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신극례(辛克禮)가 아뢰었다.
“이것은 과오로 범한 것입니다.”
태종 002 01/07/04 (신묘) 001
/ 좌정승 김사형이 병으로 사직하는 전을 올리다
--------------------------------------------------------------------------------
좌정승(左政丞) 김사형(金士衡)이 병(病)으로 인하여 전(箋)을 올려 사직(辭職)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태종 002 01/07/13 (경자) 003
/ 개정된 관제에 따라 하윤·이서·김사형·이무 등을 임명하다
--------------------------------------------------------------------------------
하윤(河崙)으로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를, 이서(李舒)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김사형(金士衡)으로 좌정승(左政丞), 이무(李茂)로 우정승(右政丞)을, 조영무(趙英茂)로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를, 이원(李原)으로 대사헌(大司憲)을, 유관(柳觀)으로 승녕부 윤(承寧府尹)을 삼았다.
태종 002 01/07/23 (경술) 001
/ 궁실 건축 반대한 좌사간 윤사수 등을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용서하다
--------------------------------------------------------------------------------
사간원(司諫院)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윤사수(尹思修)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가 다시 직사(職事)에 나아가게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상소하여 토목(土木)의 역사를 정지하기를 청하니, --- 정승(政丞) 김사형(金士衡) 등이 대궐에 나아오니, 임금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지 않으며 말하기를, “한양(漢陽)으로 향하는 날을 기다려서 만나자.”
하였다. 사형 등이 황송하고 두려워서 물러갔다. 이튿날 영사평(領司平) 하윤(河崙)·판승추(判承樞) 조영무(趙英茂)·참찬문하(參贊門下) 이직(李稷) 등이 임금의 노여움을 풀고자 하여, 이른 아침에 대언사(代言司)에 모이어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으로 하여금 한양으로 이어(移御)하는 것을 정지하고, 궁궐을 영건(營建)할 것을 청하게 하였다. ---조금 뒤에 좌정승 김사형(金士衡)·우정승 이무(李茂) 등이 이르러서 간관(諫官)이 갇혔다는 말을 듣고, ---
태종 002 01/08/22 (무인) 001
/ 원자의 학당 지을 터를 성균관에 보게 하다
--------------------------------------------------------------------------------
--- 정승 김사형(金士衡) 등이 전조(前朝)의 사기(史記)를 가져다가 예왕(睿王)이 원자(元子)가 되었을 때의 입학례(入學禮)를 상고하고자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예왕의 일을 어찌 법받으랴?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상고하는 것이 가하다.”
○ (1392년) 상락(上落) 김공(金公 상락은 봉호(封號))이 처음 시중을 배수할 때, 국로(國老 나라의 원로) 창녕(昌寧 본관) 성공(成公 *성여완)이 그 가문의 아름다움을 서술하고 시(詩)를 지어 축하하였는데, 명경 거유(名卿巨儒)들이 이어 화답한 시 몇 수와 (1396년) 공이 어명을 받고 동정(東征)할 때 전별차 지은 많은 갱운(?韻 남의 시에 차운하여 화답하는 것)을 연이어 큰 축(軸)을 만들고, 호정(浩亭) 하공(河公 이름은 륜(崙))이 그 끝에 발문(跋文)을 붙였다. 공이 권근에게 서문을 지으라 하였다. <양촌선생문집 제18권 (序類) /시중(侍中) 김사형(金士衡)을 축하하는 시의 서>
변계량(卞季良)이 쓴 시 ‘상락백(上洛伯)의 시권에 쓰다’가 춘정집(春亭集) 제3권에 실려 있다.
상락군(*김질)의 증조(曾祖) 익원공(翼元公 익원은 김사형(金士衡)의 시호)이 좌정승(左政丞)으로 있을 적에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공 제(閔公霽)가 사명을 받들고 남방(南方)으로 가게 되자, 익원공이 제공(諸公)과 함께 자하동(紫霞洞)에 모여 전송하였는데, 이 때 부원군이 익원공에게 준 시에
“김 정승(*김영후)의 손자인 또 김 정승(*김사형)은 죽마 타던 어린 시절을 내(*민제) 일찍이 기억하는데 임금의 교화 빛내는 것은 그대 집의 일이라 정사당 안에서 날로 전전긍긍하누나[金政丞孫金政丞 當時竹馬記吾曾 丹靑王化君家事 政事堂中日戰兢]” 하여,
진산군(晉山君) 하륜(河崙)이 서문을 짓고 금릉 봉사(金陵奉使) 단목지(端木智)와 정승 성석린(成石璘) 등이 운(韻)을 나누어 시를 지었으니 이 때가 건문(建文 명 혜제(明惠帝)의 연호. 1399∼1402) 3년 가을이었다.
*** 이 시축(詩軸)이 전해져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1464∼1487) 4년(무자)에 상락군(=김질)이 또 우의정에 제배되자, 중추부사 서거정(徐居正)이 이 시축(詩軸)에 이어 서문을 짓고 또 나(=김종직)에게 시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점필재집 시집 제6권 /[시(詩)] /상락군의 시권에 두 수를 쓰다[書上洛君詩卷二首]>
태종 002 01/12/01 (을묘) 001
/ 조회를 마치고 하윤·김사형·이무 등 삼정승을 불러 시식케 하다
--------------------------------------------------------------------------------
조회가 파하매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하윤(河崙)·좌정승 김사형(金士衡)·우정승 이무(李茂)를 불러 시식(侍食)케 하였다.
태종 002 01/12/05 (기미) 002
/ 영사평부사 하윤이 급제한 문신은 임금이 직접 시험할 것을 건의하다
--------------------------------------------------------------------------------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하윤(河崙)·좌정승 김사형(金士衡)·우정승 이무(李茂)·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조영무(趙英茂)·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 등이 시식(侍食)하였다. 하윤이 아뢰기를,
태종 002 01/12/14 (무진) 001
/ 경덕궁에서 사신 축맹헌에게 잔치를 베풀다. 말값과 명에 보낼 말숫자
--------------------------------------------------------------------------------
임금이 축맹헌 등에게 경덕궁(敬德宮)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맹헌 등이 대궐에 나와 돌아갈 것을 고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잔치를 베풀어 위로한 것이다. 영사평(領司平) 하윤(河崙)·좌정승 김사형(金士衡)·우정승 이무(李茂)·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조영무(趙英茂) 등이 아뢰기를,
---
태종 002 01/12/21 (을해) 002
/ 좌정승 김사형을 소요산에 보내 태상왕을 문안하다
--------------------------------------------------------------------------------
좌정승(左政丞) 김사형(金士衡)을 소요산(逍遙山)에 보내었으니, 태상왕(太上王)께 문안하기 위함이었다.
<시대상황>
○태 종(太宗), 1401년에 문하부를 혁파하면서 종래까지 의정부 합좌에 참여하였던 삼사·예문춘추관·삼군총제를 제외시키고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 국정을 합의하게 함으로써 의정부제를 정립하였다.
또한, 간쟁을 관장하던 문하부낭사(門下府郎舍)를 사간원으로 독립시켰으며, 삼사와 삼군부는 사평부(司平府)와 승추부(承樞府)로 개정하였다. 1405년에는 육조직계제로의 전환기도에 따른 의정부기능 축소와 육조기능 강화책으로 육조장관을 정3품 전서(典書)에서 정2품의 판서로 높였고, 전곡(錢穀)과 군기를 각각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시켰다.
한편 좌·우정승이 장악하였던 문무관의 인사권을 이조·병조로 이관하였다. 같은해에 대언사(代言司)를 강화하여 동부대언을 증설하고 6대언으로 하여금 육조의 사무를 분장하도록 하였으며, 육조의 각 조마다 세개의 속사(屬司)를 각각 설치하고 아울러 당시까지 존속한 독립관아 중에서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서 육조에 분속시켜 각각 육조로 하여금 관장하거나 지휘하게 하는 속사제도와 속아문제도(屬衙門制度)를 정하였다.
1400년(정종 2)에 방원이 세자로 책립, 곧 이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은 대단히 컸다. 태종이 즉위한 뒤에 태조는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逍遙山)과 함주(咸州:지금의 함흥)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특히, 함주에 있었을 때에 태종이 문안사(問安使)를 보내면, 그때마다 그 차사(差使)를 죽여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디에 가서 소식이 없을 경우에 일컫는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태조의 태종에 대한 증오심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1402년(태종 2)12월 서울로 돌아왔다. 태조는 만년에 불도(佛道)에 정진하였다. 덕안전(德安殿)을 새로 지어 정사(精舍)로 삼고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1408년 5월 24일 창덕궁(昌德宮) 별전(別殿)에서 죽었다. 시호는 지인계운성문 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고,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며, 능은 건원릉(健元陵: 현재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 인창리)이다.
○권근(權近),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 |
김항용 |
---|---|
작성일 |
1401년(태종1년)에 작호를 공,후,백에서 부원대군, 부원군, 군으로 바뀌었군요. 그래서 익원공게서는 상락백에서 상락부원군으로 바뀐 것이구요.
그리고 이때(61세) 좌정승이 되셨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