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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43)민족에 내놓은 몸 9. 일제의 감옥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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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4-27 16:24 조회1,4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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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일제의 감옥 제도

우리가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온 후에 얼마 아니하여서 또 중대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소위 사내(寺內 : 데라우치-편집자 주*) 총독 암살 음모라는 맹랑한 사건으로 전국에서 무려 7백여 명 애국자가 검거되어 경무총감부에서 우리가 당한 악형을 다 겪은 뒤에는 105인이 공판으로 회부된 사건이다. 105인 사건이라고도 하고 신민회 사건이라고도 한다.

2년 형의 집행중에 있던 양기탁, 안태국, 옥관빈과 제주도로 정배갔던 이승훈도 붙들려 올라왔다. 왜놈들은 새로 산 밭의 뭉우리 돌을 다 골라 버리고야 말려는 것이었다. 그거나 그것으로 대한이 제 것으로 될까?

내가 복역한 지 7,8삭 만에 어머님이 서대문 감옥으로 나를 면회하러 오셨다.

딸깍 하고 주먹 하나 드나들 만한 구멍이 열리기에 내다본즉 어머니가 서 계시고 그 곁에는 왜 간수 한 놈이 지키고 있다. 어머님은 태연한 안색으로,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면회는 한 사람밖에 못한다고 해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와 있다. 우리 세 식구는 잘 있으니 염려 말아라. 옥중에서 네 몸이나 잘 보중하여라. 밥이 부족하거든 하루 두 번씩 사식 들여주랴?"

하시고 언성 하나도 떨리심이 없었다. 저렇게 씩씩하신 어머님께서 자식을 왜놈에게 빼앗기시고 면회를 하겠다고 왜놈에게 고개를 숙이고 청원을 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황송하고도 분하였다.

우리 어머님은 참말 거룩하시다! 17년 징역을 받은 아들을 대할 때에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실 수가 있으랴. 그러나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에는 눈물이 앞을 가려 발뿌리가 아니 보이셨을 것이다.

어머님이 하루 두 번 들여주시는 사식을 한 번은 내가 먹고, 한 번은 다른 죄수들에게 번갈아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받아먹을 때에는 평생에 그 은혜를 아니 잊을 듯이 굽신거리지마는 다음 번에 저를 아니 주고 다른 사람을 줄 때에는 '그게 네 의붓아비냐, 효자 정문 내릴라' 이러한 소리를 하면서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 내게 얻어먹는 편이 들고나서 나를 역성하므로 마침내 툭탁거리고 싸움이 벌어져서 둘이 다 간수에게 흠씬 얻어맞는 일도 있었다. 나는 선을 한다는 것이 도리어 악이 되는 것이었다.

나도 처음 서대문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는 먼저 들어온 패들이 나를 멸시하였으나 소위 국사 강도범이란 것이 알려지면서부터는 대접이 변하였다. 더구나 이재명 의사의 동지들이 모두 학식이 있고 일어에 능통하여서 죄수와 간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통역을 하기 때문에 죄수들간에 세력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를 우대하는 것을 보고 다른 죄수들도 나를 어려워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한 백여 일 동안 수갑을 채인 채로 있었다. 더구나 첫날 수갑을 채우는 놈이 너무 단단하게 졸라서 살이 패이고 손목이 퉁퉁 부었으므로 이튿날 문제가 되어서,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고 하므로 나는,

"무엇이나 시키는 대로 복종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였다. 그랬더니,

"이 다음에는 불편한 일이 있거든 말하라"

고 하였다.

손목은 아프고 방은 좁아서 몹시 괴로웠으나 나는 꾹 참았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이러한 생활에도 차차 익으면 심상하게 되었다. 수갑도 끌르게 되어서 몸이 좀 편하게 되니 불현듯 최명식 군이 보고 싶었다. 수갑 끌른 자리의 허물은 지금도 완연히 남아 있다.

최 군은 옴이 올라서 옴 방에 있다 하니 나도 옴이 생기면 최 군과 같이 있게 되리라 하여 인공적으로 옴을 만들었다. 의사의 순회가 있기 30분 전 쯤하여 철사 끝으로 손가락 사이를 꼭꼭 찔러 놓으면 그 자리가 볼록볼록 부르트고 맑은 진물이 나와서 천연 옴으로 보인다. 이것은 내가 감옥살이에서 배운 부끄러운 재주였다.

이 속임수가 성공하여 나는 옴장이 방으로 옮겨서 최명식 군과 반가이 만날 수가 있었다. 반가운 김에 밤이 늦도록 둘이 이야기를 하다가 좌등(佐藤)이라 하는 간수 놈에게 들켜서 누가 먼저 말을 하였느냐 하기로, 내가 먼저 하였노라 하였더니 나를 창살 밑으로 나오라 하여 세워놓고 곤봉으로 난타하였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아니하고 맞았으나 그 때에 맞은 것으로 내 왼편 귀 위의 연골이 상하여 봉충이가 되어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다행히 최 군은 용서한다 하고 다시 왜말로,

"하나시 햇소도 다다꾸도(이야기하면 때려 줄 테야)"

하고 좌등은 물러갔다.

감옥에서 죄수에게 이렇게 가혹한 대우를 하기 때문에 죄수들은 더욱 반항심과 자포자기심이 생긴다. 그래서 사기나 횡령으로 들어온 자는 절도나 강도질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만기(滿期)로 출옥하였던 자들도 다시 들어오는 자를 가끔 보았다.

민족적 반감이 충만한 우리를 왜놈의 그 좁은 소갈머리로는 도저히 감화할 수 없겠지마는 내 민족끼리의 나라에서 감옥을 다스린다 하면 단지 남의 나라를 모방만 하지 말고 우리의 독특한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

즉, 감옥의 간수로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이 있는 자를 쓰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는 것보다는 국민의 불행한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힘을 쓸 것이요, 일반 사회에서도 입감자(入監者)를 멸시하는 감정을 버리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한다면 반드시 좋은 효과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왜의 감옥 제도로는 사람을 작은 죄인으로부터 큰 죄인을 만들뿐더러 사람의 자존심과 도덕심을 마비시키게 한다. 예(例)하면 죄수들은 어디서 무엇을 도둑질하던 이야기, 누구를 어떻게 죽이던 이야기를 부끄러워함도 없이 도리어 자랑삼아서 하고 있다.

그도 친한 친구들에게면 몰라도 초면인 사람에게도 꺼림이 없고, 또 세상에 드러난 죄도 아니오, 저 혼자만 아는 죄를 뻔뻔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아도 그들이 감옥에 들어와서 부끄러워하는 감정을 잃어버린 표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잃을진대 무슨 짓은 못하랴. 짐승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감옥이란 이런 곳이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최명식과 함께 소제부의 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죄수들이 부러워하는 '벼슬'이다. 우리는 공장에서 죄수들에게 일감을 돌려주고 뜰이나 쓸고 나면 할 일이 없어서 남들이 일하는 구경을 하거나 돌아다녔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최 군과 나와는 죄수 중에서 뛰어난 인물을 고르기로 하였다. 내가 돌아보다가 눈에 띄는 죄수의 번호를 기억하고 명식 군도 기억하여 나중에 맞추어 보아서 둘의 본 바가 일치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내력과 인물을 조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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