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6) 경순왕과 9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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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4-24 18:33 조회2,170회 댓글0건본문
경순왕은 신라의 제56대 왕으로 마지막 왕이다. 제 46대 문성왕의 후손으로 이름은 부이다.
경순왕의 아버지는 신흥대왕으로 추봉된 이찬 효종이며 어머니는 계아태후이다. 경순왕의 첫
왕비 이름은 전하지 않는 데(*주:죽방부인 박씨, ) 그녀와의 사이에 두 아이가 있다.
큰아들은 마의 태자이고 둘째 아들은 범공으로 통한다.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에 바친 뒤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하였다.
경순왕은 원래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다. 견훤이 927년 경주를 급습하여 경애왕과 그의 비빈등
많은 왕족을 모두 잡아 왕비를 강간하고 경애왕에게는 자결을 명하였다. 경애왕이 죽고 난 후
경애왕의 친척인 김부를 내세워 신라의 왕에 앉히니 그가 바로 경순왕이다.
견훤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으니 후백제의 횡포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비해 고려의 왕건은 신
라에 우호적으로 대하였다. 왕건은 신라는 후백제를 무너뜨리면 자연히 넘어 올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그리하여 신라에 대해서는 무조건 우호적이었다. 931년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의 왕건을 수도로
초청하였다. 이때 태조는 경순왕을 왕으로써 대접하고 군기를 바로잡아 신라의 민가는 건드리지
못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견훤에 의해 약탈당한 적이 있는 지라 왕건이 왔을 때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군사들이 민가를 괴롭히지도 않고 신라인을 고려인과 같이 대하니 감격하여
왕건에게 민심이 쏠렸다.
이때 경순왕은 신라에 마음이 기울어졌다. 후백제의 미움을 사지 않는 한에서 신라에 협조하고 있었다.
935년 후백제의 내분이 일어났다. 견훤에게는 아들이 여럿이 있었는데 중에서도 후궁이 낳은
넷째 아들 금강을 무척 사랑하였다. 견훤은 사후 금강에게 왕위를 주고 싶었다. 이것을 눈치 챈
큰아들과 둘째, 셋째는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받고 싶어 거사를 단행하였다.
큰아들인 신검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왕위에 즉위했다.
분하게 여겼던 견훤은 후백제에서는 분을 풀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고려의 왕건을 생각했다. 그
래서 사람을 보내 왕건에게 의견을 타진했다. 왕건은 견훤을 후히 대접하겠다고 약속했고
견훤이 투항해오자 아버지라 하며 후대하였다.
935년 경순왕은 견훤의 투항으로 크게 자극되었다. 10월 경순왕은 백관들을 불러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는 문제를 의논하였다. 일부의 군신들은 찬성하였고, 일부의 군신들은 반대하였다.
특히 마의태자는 통곡해마지 않았다.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마땅히 충신과 의혈지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나라를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항복을 의논함이 옳을 것입니다.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넘겨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경순왕이 말했다.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를 온전히 유지할 수 없으니 이왕 강해지지도 못하고 또 더
이상 약해지지도 못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내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태자의 반대를 물리치고 경순왕은 시랑 김봉후에게 명을 내려 조서를 짓게 한 뒤 고려 태조에게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그러자 마의태자는 통곡하면서 왕과 이별을 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바위틈에 집을 짓고 마의를 걸친 채 풀뿌리로 연명하여 일생을 마쳤다.
935년 11월 태조 왕건은 대상 왕철등을 보내 항복하려 오는 경순왕 일행을 맞이하였다. 경순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경주를 떠나 태조 왕건이 있는 송악으로 향했다. 경순왕일행을 태운 향거보마가
30여리에 뻗었고 일행이 지나가는 길은 신라의 마지막을 구경하려는 인파로 뒤덮였다.
태조 왕건은 교외까지 경순왕을 마중나왔다. 왕건은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신라를 차지한 왕건은 그해 12월
경순왕을 정승공으로 봉했는데 이 직위는 태자보다 높은 일인지하의 높은 자리였다. 왕건은
경순왕에게 녹 1천석과 시종들을 주었다. 그리고 신라의 도읍인 금성을 경주로 고쳐 경순왕에게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태조 왕건이 자신의 딸을 후궁으로 주자 경순왕은 조카딸을 왕건의 후궁으로 주었다. 태조 왕건은
경순왕의 조카딸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고려 현종의 아버지로 나중에 안종으로 추봉된다.
또한 고려 경종은 경순왕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고 경순왕을 상부령으로 삼았다. 경순왕은 978년
죽을 때까지 고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 백제의 의자왕과 고구려의 보장왕이 중국으로 끌려가
쓸쓸히 죽은 것과 비교하면 망국의 왕으로서는 행복한 편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경순왕 사당을 지어 그의 혼을 떠 받들었는 데 이유는 그가 고려의 태조에게 항복한
것이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자비심에서 우러나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순왕의 혼을 모시는
민속신앙은 일제시대까지도 성행했다고 한다
경순왕의 아홉 아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 김알지의 28세손)은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 한 뒤
왕위를 오르게 하였으나,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냈다.
첫째 김일(鎰)은 부안 김씨,
둘째 김굉의 아들김운발(金雲發)은 나주 김씨,
셋째 김명종(鳴鐘)은 경주 김씨 의 영분공파,
넷째 김은열(殷說)은 경주 김씨 은열공파, 선안동김씨
다섯째 김석(錫)은 의성 김씨,
여섯째 김건,
일곱째 김선(鐥)은 언양 김씨,
여덟째 김추(錘)의 아들(김위옹)은 삼척 김씨,
아홉째 김덕지(德摯)는 울산 김씨 등이 되었다.
경순왕의 9아들중 첫째 아들 김일(鎰)과 김굉을 제외한 7아들은 낙랑공주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9아들중 마의태자(麻衣太子)로 잘 알려진 김일은 망국의 한을 품고
개골산(愷骨山 : 금강산)으로 입산(入山)하였다.
▣ 김주회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윤만 -
▣ 김은회 -
▣ 김태영 -
경순왕의 아버지는 신흥대왕으로 추봉된 이찬 효종이며 어머니는 계아태후이다. 경순왕의 첫
왕비 이름은 전하지 않는 데(*주:죽방부인 박씨, ) 그녀와의 사이에 두 아이가 있다.
큰아들은 마의 태자이고 둘째 아들은 범공으로 통한다.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에 바친 뒤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하였다.
경순왕은 원래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다. 견훤이 927년 경주를 급습하여 경애왕과 그의 비빈등
많은 왕족을 모두 잡아 왕비를 강간하고 경애왕에게는 자결을 명하였다. 경애왕이 죽고 난 후
경애왕의 친척인 김부를 내세워 신라의 왕에 앉히니 그가 바로 경순왕이다.
견훤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으니 후백제의 횡포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비해 고려의 왕건은 신
라에 우호적으로 대하였다. 왕건은 신라는 후백제를 무너뜨리면 자연히 넘어 올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그리하여 신라에 대해서는 무조건 우호적이었다. 931년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의 왕건을 수도로
초청하였다. 이때 태조는 경순왕을 왕으로써 대접하고 군기를 바로잡아 신라의 민가는 건드리지
못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견훤에 의해 약탈당한 적이 있는 지라 왕건이 왔을 때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군사들이 민가를 괴롭히지도 않고 신라인을 고려인과 같이 대하니 감격하여
왕건에게 민심이 쏠렸다.
이때 경순왕은 신라에 마음이 기울어졌다. 후백제의 미움을 사지 않는 한에서 신라에 협조하고 있었다.
935년 후백제의 내분이 일어났다. 견훤에게는 아들이 여럿이 있었는데 중에서도 후궁이 낳은
넷째 아들 금강을 무척 사랑하였다. 견훤은 사후 금강에게 왕위를 주고 싶었다. 이것을 눈치 챈
큰아들과 둘째, 셋째는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받고 싶어 거사를 단행하였다.
큰아들인 신검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왕위에 즉위했다.
분하게 여겼던 견훤은 후백제에서는 분을 풀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고려의 왕건을 생각했다. 그
래서 사람을 보내 왕건에게 의견을 타진했다. 왕건은 견훤을 후히 대접하겠다고 약속했고
견훤이 투항해오자 아버지라 하며 후대하였다.
935년 경순왕은 견훤의 투항으로 크게 자극되었다. 10월 경순왕은 백관들을 불러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는 문제를 의논하였다. 일부의 군신들은 찬성하였고, 일부의 군신들은 반대하였다.
특히 마의태자는 통곡해마지 않았다.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마땅히 충신과 의혈지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나라를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항복을 의논함이 옳을 것입니다.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넘겨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경순왕이 말했다.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를 온전히 유지할 수 없으니 이왕 강해지지도 못하고 또 더
이상 약해지지도 못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내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태자의 반대를 물리치고 경순왕은 시랑 김봉후에게 명을 내려 조서를 짓게 한 뒤 고려 태조에게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그러자 마의태자는 통곡하면서 왕과 이별을 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바위틈에 집을 짓고 마의를 걸친 채 풀뿌리로 연명하여 일생을 마쳤다.
935년 11월 태조 왕건은 대상 왕철등을 보내 항복하려 오는 경순왕 일행을 맞이하였다. 경순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경주를 떠나 태조 왕건이 있는 송악으로 향했다. 경순왕일행을 태운 향거보마가
30여리에 뻗었고 일행이 지나가는 길은 신라의 마지막을 구경하려는 인파로 뒤덮였다.
태조 왕건은 교외까지 경순왕을 마중나왔다. 왕건은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신라를 차지한 왕건은 그해 12월
경순왕을 정승공으로 봉했는데 이 직위는 태자보다 높은 일인지하의 높은 자리였다. 왕건은
경순왕에게 녹 1천석과 시종들을 주었다. 그리고 신라의 도읍인 금성을 경주로 고쳐 경순왕에게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태조 왕건이 자신의 딸을 후궁으로 주자 경순왕은 조카딸을 왕건의 후궁으로 주었다. 태조 왕건은
경순왕의 조카딸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고려 현종의 아버지로 나중에 안종으로 추봉된다.
또한 고려 경종은 경순왕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고 경순왕을 상부령으로 삼았다. 경순왕은 978년
죽을 때까지 고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 백제의 의자왕과 고구려의 보장왕이 중국으로 끌려가
쓸쓸히 죽은 것과 비교하면 망국의 왕으로서는 행복한 편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경순왕 사당을 지어 그의 혼을 떠 받들었는 데 이유는 그가 고려의 태조에게 항복한
것이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자비심에서 우러나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순왕의 혼을 모시는
민속신앙은 일제시대까지도 성행했다고 한다
경순왕의 아홉 아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 김알지의 28세손)은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 한 뒤
왕위를 오르게 하였으나,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냈다.
첫째 김일(鎰)은 부안 김씨,
둘째 김굉의 아들김운발(金雲發)은 나주 김씨,
셋째 김명종(鳴鐘)은 경주 김씨 의 영분공파,
넷째 김은열(殷說)은 경주 김씨 은열공파, 선안동김씨
다섯째 김석(錫)은 의성 김씨,
여섯째 김건,
일곱째 김선(鐥)은 언양 김씨,
여덟째 김추(錘)의 아들(김위옹)은 삼척 김씨,
아홉째 김덕지(德摯)는 울산 김씨 등이 되었다.
경순왕의 9아들중 첫째 아들 김일(鎰)과 김굉을 제외한 7아들은 낙랑공주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9아들중 마의태자(麻衣太子)로 잘 알려진 김일은 망국의 한을 품고
개골산(愷骨山 : 금강산)으로 입산(入山)하였다.
▣ 김주회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김항용 -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윤만 -
▣ 김은회 -
▣ 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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