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신라말 청해진 대사 무역왕 장보고에 의하여 이룩한 막강했던 해상지배권이 신라가 망하면서 많이 쇠퇴한 것은 사실이나 궁예의 신임을 받아 시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신분과 배경을 보면 그 또한 수군 출신인 백선장군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 금성태수 융도 해상무역상이었다고 하니 고려가 건국된 후 왕건은 해상권에 대하여 강화하였을 가능성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왕건은 수군을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가 진도를 점령하고 영산강을 거슬러 당시 내해적인 지형인 금성을 점령하고 견훤을 섬멸하는 교두보로 삼은 사람으로 해상무역가의 아들이고 수군출신인 그가 바다에 대하여 해박하게 알며 관심 또한 깊었을 것임으로 해상정책에 소홀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고려시대의 해상정책이나 선박에 관한 자료는 별로없다. 고려 인종때인(1123년)에 송나라 사신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다양한 문물을 보고 글과 그림으로 남긴 서경(徐競1091~1153)의 "고려도경"제33권 주즙(舟楫)조에 보면 당시의 배 4종류가 보이는데 순선(巡船),관선(官船),송방(松舫),막선(幕船)이며 함선(艦船)이나 과선(戈船)등의 전함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여몽의 동정연합군이 제1차 일본침공을 하였을 때 약 3만명의 연합군을 수송한 전함 9백여 척을 부안의 변산에서 건조하였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중심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여몽 연합군의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른다. 고려사의 충렬왕 즉위년 10월초와 김방경전에는 몽고군이 2만5천여명에 고려군이 8천명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일본인 이케우찌의 심도있는 연구서에 의하면 몽고군 2만명에 고려군이 5천3백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사 제27권 원종(元宗.15년 1274년)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갑술15년 봄 정월에 원나라 총관 찰홀을 보내어 전함 3백척의 조선을 감독하고 그 공장과 일꾼,일체의 물건을 오로지 본국(고려)에 맡겨 부담케 하거늘 이에 문하시중 김방경으로 동남도 의 도독사를 삼았다] 원나라가 또 소용대장군홍다구로 감독 조선관군민총관을 삼으니 다구가 정월 15일로써 역사(役事) 일으키기를 약속하고 재촉이 심히 엄하거늘 왕이 추밀원부사 허공으로 전주도지휘사를 삼고 우복야 홍록주로 전라도 지휘사로 삼고 또 대장군 나유를 전라도에 김백균을 경상도에 박보를 동계에국자가업반부를 서해도에 장군 임계를 교주도에 보내어 각각
부부사를 삼아 공장,역도,3만5백명을 징집하여 조선소에 나아가게 하니 때에 역기가 낙택하고 서무가 번극하여 기한이 급박하매 빠르기가 뇌전과 같으니 백성이 심히 괴로워하였다. 이 고려사기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제1차 일본정벌을 위한 준비로 수송 전함선의 건조를 전주도의 부안(당시는 보안현)변산과 나주도의 천관산등에 설치하도록 하고 그 감독 책임자를 임명한 내용과 배를 만드는 목수와 그에따른 일꾼 3만5백명을 동원한 규모를 밝히고 있으며 일의 빠른 진첩을 위하여 독촉과 채찍이 얼마나 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위의 내용중 "전함3백척의 건조를 감독케 하거늘"의 3백척은 실제로 전투에 임하는 대선인 전함을 자칭한 것이고 전함을 건조하는 기술자인 공장(목수)과 일꾼들, 그리고 그에 따른 일체의 물자를 고려가 부담하도록 하여 고려의 목수들에 의하여 대선 300척,보급선300척이 건조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대선의 크기가 실제로 얼마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일부 기록에 의하면 길이가 36보(35m내외)라 하였으며 250톤 내지 280톤인 것으로 추정되므로 그 크기가 상당하였으니 이와같은 크기의 배를 수 백척 변산에서 건조하였다고 볼 때 그 엄청난 양의 목재 수요를 변산이 감당하였을까 싶지 않으며,주변 고창,정읍등지에서도 보급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그리고 변산과 천관산의 조선소에만 함선 건조의 책임자를 임명한 것이 아니라 각 도에도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도록 동남도,경상도,동계.서해도.교주도등 전국의 각 도에 부부사를 임명하여 3만5백명에 이르는 많은 목수와 인부를 징집하여 서둘러 조선소에 보급하니 나라 안이 온통 들 끓었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얼마나 급박하기에 충분하다. 얼마나 급박하게 일을 다그쳤으면 "빠르기가 뇌전(번개)과 같았다"고 하였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잠시 앞의 고려사 의 기록에 보이는 원나라의 감독조선관민총관 홍다구(준기)와 도독인 김방경에 대하여 한마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여몽 연합군의 일본정벌 주비의 총 책임자격인 홍다구 라는 자는 원래 고려 사람으로 고려의 역신인 홍복원의 아들인데 원나라와 싸울 때 그 아비가 항복하여 부자가 조국을 배반한 인물이다. 홍다구는 원나라에 충성을 다하면서 원나라를 등에 업고 고려 조정에 대하여 온갖 간섭을 다하고 괴롭혔으며 삼벌초의 난 평정과 일본정벌의 싸움에 김방경과 함께 참여 하면서 김방경을 모함하고 혹독한 고문을 가하는 등 귀양까지 보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