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원관 묘지명 속의 상락군(김흔), 충숙공(김승용), 문순공(민적 : 문온공 구용 외증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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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05-03 09:55 조회1,393회 댓글0건본문
"스토리사격장 원관 묘 문화재 가치 충분 "
스토리사격장 내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초리 산 47-1번지에 있는 신도비(이하 묘비)에는 고분의 주인을 ‘원관’이라고 적고 있고 ‘광정대부 /첨의찬성사 /진현관 대제학 /부총부사’라는 관직명이 적시되어 있어 ‘고려시대’ 인물로 당시 지위를 가늠케 한다. 원관은 고려 개국공신인 원극유의 11대손(원주 원씨 원성백계)으로 밝혀졌다.
미군전용 국제사격장으로 변모할 스토리사격장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고분이 발견된 것은 지난 5월말 신라 57대 경순왕 직계후손인 원주 김씨 김거 공(公)의 고분 등이 발견된 후 두 번째다.
원주 원씨 원성백계 종친회에 확인한 결과, 원관의 묘는 1997년 정화사업을 통해 단장된 것이었고 묘비는 조선 중기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효종의 부마공인 심익현이 글을 쓴 것. 이런 사실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묘지발견기(묘비 뒤편에 새겨져 있음)’에서도 재차 확인되었다. 묘비의 형태도 조선 중기의 것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원관 묘비의 문화재적 가치는 조선시대 왕실 무덤인 ‘서오릉(경기도 고양시 신도동. 사적 제 198호. 1970년 5월 26일. 문화재청)’에 있는 익릉도 능표(陵表)는 송시열이 찬(撰)했고 심익현이 글씨를 섰다는 데에서도 확인되는 대목이다. 익릉은 숙종왕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이다.
중앙대 진성규 교수(고려시대 불교사 전공)는 묘비를 통해 “원주 원씨 원관이라는 사람의 비로 고려 충렬왕, 충선왕때 사람”이라고 확인해주었다
특히 원관묘는 묘비뿐만 아니라 1997년 정화사업도중 발견된 ‘고려시대 묘지석’도 문화재적 가치와 학술적 가치가 높다. 현재까지 고려사 연구 자료는 몇몇 문헌을 제외하면 희박한 상황에서 고려시대 묘지석은 고려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어 왔다. 당시 발견된 묘지석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가 되어 현재는 경기도박물관 수장고에 보관중이다.
원정식씨(69. 자양동. 원주원씨 원성백계 삼사공파)는 “묘지석은 묘소가 파손되어도 묘의 주인을 알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며 “묘안에다 관직 등 모든 것을 적시해 넣어둔다. 산소에 묘지석에 없으면 주인이 묘연하다”고 설명했다.
경기도박물관 유물관리부 김준권 학예사도 “원관묘가 수해로 쓸려 정화작업을 하던 중 지석이 나왔는데 지석은 넓적한 돌로 되어 있다”고 전했다. 그는 “조선시대 지석은 도자기로 열장, 스무장장씩 구워나오는데 고려시대는 넓은 돌판 앞뒤로 글씨가 들어가 경우가 많다”면서 “묘지석은 매장당시 같이 매장한 것이기 때문에 묘지석 자체는 고려시대의 글”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문화유산연대회의(준) 김성한 사무처장은 “지난 5월말경 스토리사격자에서 조선 세종때 고분이 발견된 이후 지속적인 조사를 하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원관묘발견기’와 묘지석을 확인했다”면서 “원관 묘비는 고려 중기 시대사를 조명할 수 있으며 우암 송시열이 쓴 ‘묘비발견기’는 금석문 해석을 달아놓은 것으로 연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김 사무처장은 “고려 후기 권문세가들이 직접적인 혼인관계를 통해 권력을 유지한 형태를 엿볼 수 있는 것”이라며 “고려시대 묘지명이 많이 발견되지 않아 연구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스토리사격장 내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묘지 발견기는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거듭 강조했다.
스토리사격장 내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초리 산 47-1번지에 있는 신도비(이하 묘비)에는 고분의 주인을 ‘원관’이라고 적고 있고 ‘광정대부 /첨의찬성사 /진현관 대제학 /부총부사’라는 관직명이 적시되어 있어 ‘고려시대’ 인물로 당시 지위를 가늠케 한다. 원관은 고려 개국공신인 원극유의 11대손(원주 원씨 원성백계)으로 밝혀졌다.
미군전용 국제사격장으로 변모할 스토리사격장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고분이 발견된 것은 지난 5월말 신라 57대 경순왕 직계후손인 원주 김씨 김거 공(公)의 고분 등이 발견된 후 두 번째다.
원주 원씨 원성백계 종친회에 확인한 결과, 원관의 묘는 1997년 정화사업을 통해 단장된 것이었고 묘비는 조선 중기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효종의 부마공인 심익현이 글을 쓴 것. 이런 사실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묘지발견기(묘비 뒤편에 새겨져 있음)’에서도 재차 확인되었다. 묘비의 형태도 조선 중기의 것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원관 묘비의 문화재적 가치는 조선시대 왕실 무덤인 ‘서오릉(경기도 고양시 신도동. 사적 제 198호. 1970년 5월 26일. 문화재청)’에 있는 익릉도 능표(陵表)는 송시열이 찬(撰)했고 심익현이 글씨를 섰다는 데에서도 확인되는 대목이다. 익릉은 숙종왕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이다.
중앙대 진성규 교수(고려시대 불교사 전공)는 묘비를 통해 “원주 원씨 원관이라는 사람의 비로 고려 충렬왕, 충선왕때 사람”이라고 확인해주었다
특히 원관묘는 묘비뿐만 아니라 1997년 정화사업도중 발견된 ‘고려시대 묘지석’도 문화재적 가치와 학술적 가치가 높다. 현재까지 고려사 연구 자료는 몇몇 문헌을 제외하면 희박한 상황에서 고려시대 묘지석은 고려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어 왔다. 당시 발견된 묘지석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가 되어 현재는 경기도박물관 수장고에 보관중이다.
원정식씨(69. 자양동. 원주원씨 원성백계 삼사공파)는 “묘지석은 묘소가 파손되어도 묘의 주인을 알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며 “묘안에다 관직 등 모든 것을 적시해 넣어둔다. 산소에 묘지석에 없으면 주인이 묘연하다”고 설명했다.
경기도박물관 유물관리부 김준권 학예사도 “원관묘가 수해로 쓸려 정화작업을 하던 중 지석이 나왔는데 지석은 넓적한 돌로 되어 있다”고 전했다. 그는 “조선시대 지석은 도자기로 열장, 스무장장씩 구워나오는데 고려시대는 넓은 돌판 앞뒤로 글씨가 들어가 경우가 많다”면서 “묘지석은 매장당시 같이 매장한 것이기 때문에 묘지석 자체는 고려시대의 글”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문화유산연대회의(준) 김성한 사무처장은 “지난 5월말경 스토리사격자에서 조선 세종때 고분이 발견된 이후 지속적인 조사를 하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원관묘발견기’와 묘지석을 확인했다”면서 “원관 묘비는 고려 중기 시대사를 조명할 수 있으며 우암 송시열이 쓴 ‘묘비발견기’는 금석문 해석을 달아놓은 것으로 연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김 사무처장은 “고려 후기 권문세가들이 직접적인 혼인관계를 통해 권력을 유지한 형태를 엿볼 수 있는 것”이라며 “고려시대 묘지명이 많이 발견되지 않아 연구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스토리사격장 내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묘지 발견기는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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