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검모포진영의 주변은 문물이 매우 활발하게 형성된 지역이라는 점이다.12.13세기의 우리나라 도자기 공예의 찬란한 문화를 피어나게 한곳도 검모포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 연안이었다.세계적인 명품 상감청자도 검모포 연안에서 구웠다.따라서 고려시대에 문물의 발달이 활발하였던 곳은 부령현이 아니라 보안현이었으며,그 중심이 되었던 곳이 검모포지역이었다.그리고 줄포항이 점차 매몰되어 가자 1938년에 구진마을 바로 옆의 곰섬과 범섬을 인공적으로 매립 연결하여 곰소항을 개설하였는데 이때 매립공사를 하면서 검모포진영이 있었던 구진마을 입구의 갯벌속에서 수 백년동안 바다 뻘속에 묻혔던 아람드리 못탕목이 수없이 발굴 되었는데 이 못탕목 일부가 지금도 구진마을에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못탕목은 배를 건조할 때 밑에 까는 깔이목으로 이 못탕목 위에서 배를 건조한다.변산과 나주의 천관산에서 건조된 900여척의 함선에 몽고군 2만여명. 고려군 5천3백여명으로 연합군을 편성한 여,몽정군은 1274년10월초에 합포(지금의마산)를 출발 곧바로 대마도와 일지도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일거에 무찌르고 규수의 비전국, 축전국 등을 점령 크게 분전하였으나 마침 큰 태풍을 만나 많은 전함과 병사를 잃고 철수하여 합포로 돌아오니 죽은자가 13500여명에 이르렀다. 이것이 여,몽연합군의 제1차 일본침공이다. 고려왕의 호소에도 불고하고 원의 세조( 쿠비라이)는 일본침공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고려로 하여금 전함,군수물자 등을 준비하도록 명 하였는데 이후 일본은 더욱 완강하여져 두 차례나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죽이고 규수의 하카다에 몽고방누의 성벽을 쌓는등 대비하였다. 그후 충렬왕 7년,즉 1281년 5월에 다시 편성된 여,몽연합군인 동로군은 중국남쪽의 만족으로 편성된 강남군까지 합하여 10만여의 대병으로 제2차 일본정벌에 나섰는데 이때도 고려에서 병선 900여척,초공 수수(배를 운항하는 인부)1만5천여명, 정군 1만명에 군량곡 11만석을부담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 병선은 그 건조한곳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역시 변산과 나주에서 건조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제2차의 일본침공도 일본의 완강한 저항에 부딧쳐 60여일을 싸웠으나 7월1일 또 태풍이 내습하여 전함과 병사의 대부분을 잃고 돌아 오니 고려인은27,250명 중 생환자는 19,397명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일본침공 연합군의 수송함대의 선박을 건조한 구체적인 장소로는 당시 보안현 변산의 검모포진영이 있었던 구진마을 이였을 것으로 보고 이 구진마을의 변천하여 온 연혁을 좀더밝혀 보기로 한다.구진는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로 면사무소가 있는 곰소로부터 동쪽으로 1.5km쯤의 바닷가 마을이다. 검모포가 서남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여서 이곳에 수군의 진영인 검모포
진영이 설치되면서부터 진영마을로 생성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데 이렇게 본다면 마을의 시초는 백제때부터가 아닌가 여겨진다. 마을뒤에 작은 동산을 배산으로 검모포앞바다를 향하고 배산임수형의 남향마을을 이루고 40여호에 인구 109여명인데 지금은 어업보다는 농업이 주업된 마을이다. 마을 뒷동산 중턱에 남향으로 옛진영의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그 뒤로 석누를 쌓은 성벽의 자취가 지금도 완연하다 진영터의 동편으로 수백년된 몇아름드리 느티나무당산 신목이 용줄을 밑둥에 감고 마을을 굽어보며 수호하고 있음이 인상적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부안현의 관방조에 "관방일검모포병선박입"이라 하였으니 수군들의 진영이었음을 밝힌 것이다.좀더 구체적으로 구진의 연혁을 밝혀보자. 구진마을에 천여년 이상 있어 왔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검모포진영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1812년에 진영을 지금의 진서리초등학교 자리로 옮겼으며 만호1인,수구의 정원830명에 병선이 두 척이었다고 전한다. 수군 830명이란 정원이 그러하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그 절반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1887년에 간행된부안지의 관방조에 의하면 "검모포영:재현남 51리수군만호1인 당우계유혁파"라 하였다.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진서면 구진부락에 왔던 검모포진 수군의 진영은 1812년에 진서리로 옮겨가 1873년(고종10년)에 혁파(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진영이라는 기관이 옮겨짐으로 해서 새로운 지명이 생겨났는데 새로 진영이 옮겨진 곳의 이름은 신진리(新鎭里)또는 진의 서쪽마을이란 뜻의 진서리(鎭西里)라 하고 옛 진영터의 마을은 구진리(舊鎭里)라 부르게 된 것이다.따라서 진서면(鎭西面)이란 면의 이름도 검모포진(黔毛浦鎭)에서 유래된 역사 문화적인 내용이 담겨진 화석(化石)된 명칭이다. 이와 같이 진서면 구진마을은 고려시대 이래로 우리나라 서해를 지키는 요충지의 진영(鎭營)의 마을 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여,몽동정연합군 수송선단의 수백척에 이르는 배를 건조한 조선소의 마을이었으며 고려말 우왕(禑王)초에는 일본 해적 왜구들이 50척으로 내습하여 와 구진의 검모포진을 점령한 후 적현(호벌치)을 넘어 부령현까지 점령하고 동진교를 헐어 버린 왜구의 난을 가장심하게 겪은 마을 이기도 하다.그럼에도 오늘 구진마을은 화석(化石)하여 버린 부안역사 문화의 일부를 간직한 채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한낱 구진(舊鎭)마을로만 남아 있어 안타깝다. 정말로 이 고장의 역사,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고장의 문화를 바르게 정립하려 한다면 겉치레 낯내기 문화행사,푸석하고 알맹이 없는 홍보적 행사는 이제 그만두고 구진마을 같은 (역사의 현장마을)하나라도 찾아 그 입구에 마을 연역비라도 세우는 것이 우리들의 가슴에 향토문화를 채워주는 일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