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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언묘갈(金世彦墓碣)<부사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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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6-05-03 20:22 조회1,56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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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언묘갈(金世彦墓碣)


· 시       대 : 조선

· 연       대 : 1704년(숙종30)

· 유형/재질  : 비문/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       기 : 높이 147cm, 너비 58cm, 두께 26cm

· 출  토  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산 (어은동)

· 소  재  지 : (한국)경기도박물관-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

                   (한국)-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산(어은동)

· 서       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신완(申琓)/김구(金構)/미상


1704년(숙종 30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어은동에 세워진 김세언(金世彦)의 묘갈명이다. 묘갈은 비좌개석(碑座蓋石)의 형태로 대석에는 당초문(唐草紋), 운문(雲紋) 복련(覆蓮)이 있고 개석은 팔작지붕형태이다. 비석은 양호한 편이나 옆면의 마모가 심하다. 찬자는 경암(絅庵) 신완(申琓)이며 서자는 김구(金構), 전액(篆額)은 김집(金潗)이 썼다. 김세언(金世彦 : 1630~1658년)은 안동인(安東人)으로 김응하(金應河)의 막내동생 응해(應海)의 손자이다. 나이 29세로 단명하였는데, 항상 총융공(摠戎公) 응해(應海)를 모시면서 효성을 다하였다. 비문에는 무신 명문가문으로서 요동백(遼東伯) 김응하 가문의 내력과 김세언의 가족과 자손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는데 단명한 관계로 충효를 더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표현되어 있다. 옆면 추기(追記)에는 묘소가 1717년 송진리(宋眞里) 이장(移葬)되었음이 양자로 들어간 찬자 집(潗)에 의해 밝혀져 있다.


【판독문】

贈戶曹參判金世彦之墓」

贈貞夫 人晋州姜氏祔左」


通德郞 贈嘉善大夫戶曹參判金公墓碣銘」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平川君申琓 撰」

崇政大夫行吏曹判書兼知 經筵事 世子左賓客 金構 書」

奧在 皇明萬曆戊午金將軍應河死綏於深河之役 天子嘉其節 詔贈遼東伯金氏之忠節自此聞於天下矣」

有季曰應海亦以武擧官至摠戎使子孫繩其祖武皆以忠孝相傳世所豔稱而今黃海道節度使金君重元乃其曾」

孫也自黃岡走書致命曰吾父早殊吾兄弟以藐爾孤乃能成立者莫非遺訓則其可無顯刻以詔來世耶願有以記」

之謹按其狀公諱世彦聖伯其字也系出安東上洛公方慶之後也代有聞人而至摠戎公與其兄遼東伯實世其家」

而有二難之稱焉卽公之祖考也曾祖諱地四考諱克鍊俱 贈戶曹參判皆以子若孫之貴也公天資至孝常奉侍」

摠戎公左右服勤少無違色鄕黨稱其孝人皆知金氏之忠孝之推也不幸短命卒於戊戌距其生年庚午得年僅二」

十九噫其命矣夫配 贈貞夫人晋山姜氏同知說之女與公同年生賢而有婦德卒於辛亥享年亦菫四十有二合」

窆於鐵原寬洞向庚之原從先兆也有子二人長重元卽節度君也次重三歷水使今爲會寧府使節度娶水使趙猷」

女生二子三女男長泂娶士人尹商老女次潗娶士人安胤迪女生子幼府使娶府使李萬枚女無子取兄子潗爲後」

焉嗚呼公以名家子忠孝之行得其家傳若使天假之年則固可以立揚於 朝移孝爲忠而卒蔪其壽者亦豈非有」

待於後而然耶今節度昆季乃克負荷接武登朝建節制閫爲 國家干城之用嗚呼其可謂不良之報也歟銘曰」

士或有有才而無命者人固不可以無年身雖不得享其祿猶可以責報於天系以銘詩俾後人有所勉旜」

崇禎紀元後七十七年甲申三月 日立」

歲丁酉十月十五日遷墓于宋眞里向卯原碣亦移樹盖先志也碣成後丙申先君卒官統」

制使男泂癸巳先圽無嗣不肖潗還于宗三女適李萬恒鄭壽樞沈鉐側出男汲二女水使」

元百揆妾李眞實妻甲午季父卒官兵使取三從弟郡守重三第八子漵爲後側出二男淇」

滌女權夢衡妻也 乙巳九月 日孫前府使潗謹識」


【해석문】

통덕랑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김공 묘갈명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평천군 신완이 글을 짓고,

숭정대부 행이조판서 겸지경연사 세자좌빈객 김구 가 글씨를 쓰다.


황명 만력 무오년(광해군 10, 1618년)에 김장군 응하께서 심하의 군역에서 돌아가셨다. 천자가 그 절의를 아름답게 여겨서 요동백에 증봉하였다. 김씨의 충절은 이때부터 천하에 알려졌다. 막내아우 응해 또한 무과 급제하여 벼슬이 총융사에 이르렀다. 자손이 그 선조의 무공을 이어 다 충효로서 서로 전하여 세상에서 선망과 칭송을 받고 있는데, 현재 황해도절도사 김군 중원이 바로 그 증손이다. 황강으로부터 서신을 전해 와서 말을 전하기를, “우리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셨으나 우리 형제가 묘연히 의지할 곳 없는 고아로서 능히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남겨주신 교훈 아님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현각을 하여 후세에 가르쳐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글을 지어주시기를 바라옵니다.”라고 하였다.

그 행장을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세언이요 성백은 그의 자이다. 선계는 안동에서 나왔으니, 상락공 방경의 후손이다. 대대로 유명한 분들이 있었는데, 총융공과 그의 형 요동백에 이르러 실로 그 집안을 대대로 이어서 이난의 칭호가 있었으니, 바로 공의 조고이다. 증조의 휘는 지사이고, 아버지의 휘는 극연이며, 함께 호조참판에 증직되었으니, 다 아들과 손자가 귀해졌기 때문이다.

공은 천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항상 총융공을 받들어 모실 적에 좌우에서 모시면서 수고로움을 대신하여 조금도 낯빛을 어김이 없었으므로 향당에서 그의 효성을 칭송하였으며, 사람들이 모두 김씨가 충효를 추존함을 알았다. 불행히도 단명하여 무술년(1658년)에 돌아가셨다. 그 태어난 해인 경오년(1630년)과의 거리를 계산해보면 향년 겨우 29세였으니, 아 ! 운명인가보다. 부인은 증정부인 진주강씨로 동지 열의 딸이다. 공과 동년생으로 어질고 부덕이 있었다. 신해년(1671년)에 돌아가셨으니, 향년이 또한 겨우 42세였다. 철원 관동 경좌의 언덕에 합폄하였으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은 중원이니 바로 절도군 이고 차남은 중삼이니 수사를 역임하고 현재 회령부사이다. 절도는 수사 조유의 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형으로 사인 윤상로의 딸과 결혼하고 차남은 집으로 사인 안윤적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부사는 부사 이만매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 집을 취하여 후사를 삼았다.

아! 공은 명문가의 아들로서 충효의 행실을 그 집안에서 전수 받았으니, 만일에 명 년 만 더 살게 해주었다면 진실로 조정에서 입신양명하여 효를 옮겨 충을 할 수 있었는데 끝내 장수를 누리지 못하였으니, 또한 어찌 훗날에 기다림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절도사 형제가 마침내 능히 계승하여 조정에 올라 부절을 잡고 한지방의 군사를 통솔하여 국가의 간성의 쓰임이 되었으니, 아! 불식지보라고 이를만하도다. 명하기를,


선비는 혹 재능은 있으나 좋은 운명이 없는 자도 있으며 사람은 진실로 오래살 수 없도다.

자신은 비록 그 녹을 누리지 못했지만 오히려 하늘에 보답을 요구할 수 있다네.

명시로서 이어서 후인들로 하여금 권면할 바가 있게 하노라.


숭정기원후 77년 갑신(숙종 30, 1704년) 3월 일에 세우다.


정유(1717년) 10월 15일에 송진리 묘좌의 언덕으로 묘를 옮기고 묘갈 또한 옮겨 세웠으니, 이는 선의 뜻이었다. 묘갈을 완성한 후 병신년에 선군께서 돌아가셨다. 벼슬은 통제사이다. 장남 형이 계사년에 먼저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서 불초 집이 양자 와서 본종을 이었다. 세 딸은 이만항∙정수추∙심성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측실에서 낳은 아들은 급이고 두 딸은 수사 원백규의 첩과 이진실의 첩이 되었다. 갑오년에 계부께서 돌아가셨다. 벼슬은 병사이다. 삼종제 군수 중삼의 여덟째 아들 서을 취하여 후사를 삼았다. 측실에서 낳은 두 아들은 기와 척이고 딸은 권몽형의 처가 되었다.


을사 9월 일에

손자 전부사 집이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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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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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홈의 부사공파란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