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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익원공파 연보자료 30(끝)---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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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5-03 23:17 조회1,3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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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5년 1412년 태종12


○ 8촌 김구덕, 1412년(태종 12)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이어서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해(1414년) 또 한성윤(漢城尹)으로서 들어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기 위하여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윽고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거쳐 숭정(崇政)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춘정집(春亭集) 제3권  시(詩) 

사명을 띠고 가는 김 참지(金參知) 구덕(九德) 의 시운에 따라 ---변계량

문명 시대 소년이 사명 띠고 나가니          / 少年觀國際文明

전별의 그 시가 구절마다 청아하네           / 贈別新詩句句淸

우습게도 병들어서 두문불출하던 나도      / 自笑病夫甘閉戶

호기 생겨 필단을 마음대로 휘둘렀네        / 筆端豪氣 ? 縱橫



○ 8촌 김구용의 아들 김명리,


태종실록024 12/07/09(임진)

  명하여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 권완(權緩), 경력(經歷) 김명리(金明理)와 전 도관찰사 이상(李湘)을 순금사에 가두게 하였다. 경인년 겨울에 정부에서 하교를 받아 이문(移文)하기를,

  “과전(科田)에서 수조(收租)하는 것은 5결(結)마다 모두 저화(楮貨) 1장씩을 수납토록 하라.”

  하였는데, 이상과 김명리는 단지 1년만 행하고 그쳤으나, 권완은 신묘년에 수조(收租)한 뒤, 본직(本職)을 받았던 까닭에 명하여 다시 직임에 나오게 하였다. 이상의 직첩을 거두어 영주(寧州)에 부처(付處)하고, 김명리는 장(杖) 60대를 속(贖)받게 하였다.


○ 목민심서의 원조 목민심감 간행자는 우리 문중 明理(명리) 공이시다.

(2003. 12. 30. 윤만(문) 제공)

牧民心書의 元祖 牧民心鑑 刊行者 金明理


1) 인터넷 검색 “牧民心鑑”

  지방관의 정신자세와 牧民活動의 원칙을 제시한 책이다. 저자는 明나라 湖廣憲僉을 지낸 朱逢吉이며 1404년(明 永樂 2)에 간행되었다. 조선에서는 1412년(태종 12)에 權 緩(?∼1417)과 金明理가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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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의 11년 여름에 희가 이 현의 수령으로 부임하게 되자, 곽정랑존중이 목민심감 1책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간행을 위촉하며 이를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내가 시험삼아 읽어보니, 참으로 근민하는 사람이 마땅히 강독해야 할 책이었다. [그래서] 감사 영가공 권완과 경력 김군명리에게 보고하고, 현학에서 간행하므로써 이를 널리 [후세에] 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영락 10년 7월  일 통선랑지평감무겸근농병마단련판관 함령 김희회는 삼가쓰노라.】

-(후 략)-

《출전 : 牧民心鑑 硏究/김성준/고대민족문화연구소/1990》



사후16년 1421년 세종3

세종 011 03/01/24 (정해) 002

/ 상락백 김사형의 아내 마한 국대부인 박씨에게 제사를 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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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환관을 보내어 상락백(上洛伯) 김사형(金士衡)아내 마한 국대부인(馬韓國大夫人) 박씨에게 제사를 하사하였는데, 그 제문의 대략은,

“선정(先正)이 정성을 다하여 공이 사직에 있으므로, 국가에서 예절을 도탑게 하여 은혜가 규문(閨門)에 미치노라. 오직 그대 박씨는 천성이 온유하고 조행이 숙신(淑愼)하여, 그 원로를 도와 작(爵)이 명부(命婦)가 되었더니, 갑자기 부음을 들으니, 상심되고 간절함이 배나 간절하여, 이에 하치않은 제물로 사람을 보내어 세유(繐帷) 앞에 전(奠)드려서 보통 법식보다 넉넉하게 하여 그것으로 정숙한 혼을 위로하노라.”

고 하였다. 대신의 아내가 죽어서 사제를 하사한 일이 없었으나, 하윤과 김사형은 국가에 훈공이 있었다 하여, 특별히 사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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