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東金氏修譜 및 永慕齋建築原委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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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6-05-14 05:46 조회1,468회 댓글0건본문
몇 년 전에 본 홈에 소개했던 글입니다.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게 하는 자료입니다.
강진의 영모제 조성경위 및 判書公 諱 愃의 설단, 大提學公 이하 3대위 墓碑 개수 비용. 안동 회곡리의 죽주박씨 할머님 단소 改碑에 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안사연의 정기산행을 겸한 파주 선유리 일대의 군사공파 선조님 묘소 참배 및 경순대왕릉. 숭의전을 참배할 예정입니다.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새기며 다녀오겠습니다.
安東金氏修譜 및 永慕齋建築原委說
歲乙未에 서울 晙會로부터 花樹錄을 編輯하자는 通告文이 有한 同時宗族發鏞氏와 相議한 後兩人이 上京參會하여 總務에게 郡事公派宗族을 探問한즉 金浦陽東에 居住한 在德宗이 入單되었다함으로 기뻐서 乘暮扣門하여 面晤詳悉한즉 郡事公派가 아니고 卽典書公派라 하여서 心甚無聊하야 다시 問曰郡事公派가 어데어데 居住하신지 在德曰 저기 殘嶝을 넘어가면 元會氏가 居住한다기에 尋訪次道中에서 路人의게 元會宅을 물은즉 저기 큰 瓦室이 卽此라 하여서 心顔이 俱喜하야 到門尋主하여 通姓名한後 花樹之情을 相敍하든中 夕飯을 新炊款待하다 夕飯後에 前後事實과 康津落南來歷을 一一히 說明한데 元會가 卽時譜冊을 奉來하여 우리 康津派를 찿진즉 無有라 자못 疑訝心을 두기에 余曰 우리는 康津에서 二十四代祖 大提學公 諱承用 以下 三代 斧堂을 奉護하고있는 後孫이라하니 元會愀然曰 우리는 三代墓所를 失傳 한 줄로만 알고 있었더니, 그러면 어찌하여 漏譜가 되었느야고하기에 하도 語義가 없어서 不意中 그리되었다고 대답하고 其當時有司不察로 歸責할뿐 이었다. 夜深토록 不成眠하고 京畿宗族과 修譜할 것을 窮究하다가 鷄鳴後에야 就寢하였다. 朝飯後에 告別하고 仙遊里在殷氏를 相面한 後에 우리는 大提學公先山下에 居住한 後孫인데 極히 艱難하여 3代山所를 奉護하고 酒果獻參뿐이니 相互協助해서 此期에 祭位土幾斗落을 買供及己라한데 在殷曰 此是不難하니 우리 郡事公派後孫이 七百戶가 넘으니 戶當白米三升式만 義損收合하면 位土幾斗落은 容易買供할 수 있다 하거늘 余曰 期於謀忠하시라고 申申付託하고 또 우리 康津派는 甲戌譜에 漏落되엇으니 花樹錄完成後에 繼續修譜함이 如何오한데 在殷曰 善哉哉라.
人生世間에 食粟만 일삼을 것이 아니고 사람의 道義를 닦아야한다고 稱贊不己하다. 己而오 作別還家하고 其後 花樹錄이 竣功되자 發鏞氏가 上京하야 修譜할 것을 相議結定하였습니다. 그 翌年 二月에 陰城天黙氏 在奉氏가 來臨하여 修譜事을 相議하기에 서울로 連結을 接授하였고 修譜當時委員長이 晙會總務가 在殷氏 였으나 中間에와서 在殷氏는 仙化하시고 晙會氏는 家事에 失敗하여 中斷된 것을 忠北陰城榮來氏가 委員長이되어 허다한 曲折을 經過하면서 越三年 丁酉에 완성되었습니다.
至于庚子歲하야 大提學公祭室建築事를 參議하려고 十月十日時祭에 多數上祀하심을 各派로 通告한 結果 扶安鳳黙 京畿忠黙 忠南陽黙 慶北在福氏와 및 山下近邑諸族이 參席하여 天雨를 不抱하고 墓前開會하였는데 或은 祭室三問만을 建築하자는者 혹은 山直室까지 並築하자는者 衆論이 紛紜未定하여 于先酒一巡을 行하든次 神鳥가 環飛而鳴이라 心甚驚異之러니 이윽고 어대서 山崩聲이 나더니 山直이 같다와서 報曰 屋梁이 摧折이라하여서 諸族이 往視之하니 果然이라 다시 墓前으로 돌아와서 發言하되 大提學公先祖는 靈魂이 洋洋히 如在하시도다.
嚮者某某氏가 祭室三問만을 建築함을 主張하시니까 祖靈께서 그 말을 否認하시고 證視하심이로다. 이로因하여 山直室까지 並築하기로 一致可決하였다. 翌年 三月一日에 京畿平澤寺里在潤氏宅에서 再會議結果 祭室은 勿論이요 大提學公改碑까지 하기로 結定하고 委員長榮來 副委員長鳳黙 東黙 炳吉委員 在潤 庚黙 發鏞 在殷 先會 重黙 顧問 泰一 總務 敬黙 以上 諸任員이 專力을 다하기로 하고 金三百萬圜을 豫算立案派錢하되 郡事公派가 百五拾萬圜 典書公派가 壹百萬圜 副司公派 가 五拾萬圜 合參百萬圜을 收歛次로 鳳黙氏와 同行하여 扶安東黙氏를 찾아가니 東黙이 慰勞曰 宗事에 얼마나 賢惱하신가 一次來往이 於誼爲當而未得遂意라하고 脫穀만하면 金錢은 卽速付送할터이오 凡事는 始作이 居半이니 勉旃이 어다하고 自己의 早歲食貧한 許多勤苦를 歷說하시면서 그런데 쓰기爲하여 敦篤키한것이시 其後에 京畿平澤 坡州仙遊 金浦 淳昌 忠南保寧으로 次次巡廻하고와서 四月三日부터 門任永號氏 指示下에 許證도없이 伐木을 하는데 어대서 저것저것하고 驚怯하는 소리치는 同時 나무누는 소리가 와직끈하고 들였다. 急走視之하니 農夫小兒가 隨耕而遊라가 偃然히 臥木技間에 立在하였는라 衆皆驚異하다라 追後祭室建築時凡百事가 靈魂의 도움인지 順成落之하고 또 其後에 巨重한 碑石을 運搬時에도 一箇人傷指者도 無하니 以上數件事를 推念컨대 우이로 祖先의 昭靈이 黙佑하시고 아래로 後孫의 悃誠所致이온즉 此後耳之目之者 어찌 感激치아니하리오.
檀紀四二九七年 甲辰 十月
大提學公 二十一世孫 敬黙
西紀一九六一年 辛丑年에 永慕齋(在於康津郡鵲川面土馬里)를 建築하였음. 建築費 七六八, 六二O圜
西紀一九六二年 壬寅三月一日에 大提學公以下 三代位碑를 改豎하였음. 改碑條 一, 三四七, 八八O圜
西紀一九六三年 癸卯年에 山直屋을 지었음. 建築費 四O七, 八八O圜
計 二, 五二四, 四八O圜
西紀一九六七年 丁未 二月二十七日에 判書公諱愃字配淳昌郡夫人薛氏神壇을 奉築하였음. 立碑條 一二四, 九六七원
壇在於土馬里大提學公山所上 扶安鳳黙氏의 旋力으로 奉築하였음
西紀一九六七年 丁未 九月八日 南山門間을 지었음. 建築金 七二, 九O二원
西紀一九六六年 丙午 十月十一日 忠烈公妣位山所改碑을 하였음. 改碑條 壹拾萬參阡參百圓
一九七O年 度祭位上畓四百坪을 買入하였음. 一六一 , 二OO원
一九七六年 度祭位畓參百七拾坪을 買入하였음. 一七五, OOO원
<원문을 수정 없이 그대로 옮겼습니다. 뒤에 성금을 내주신 300여분들의 명단은 생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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